“진보당 시절 혁신 운동하다 YS 상도동 합류”
“학생 등 구속된 사람들 면회·영치금 넣어줘”
“다들 죽을 각오로 민주화 전념…죽어도 좋다”
“민추협, 군정은 종식했지만…개혁에는 한계”
“YS와 DJ 두 양대산맥 갈라져, 이념도 뿔뿔”
“보수계에서 당선, 혁신 운동 꼬리표는 못 떼”
“문민정부 되면서 YS 한 번도 못 만나게 돼”
“김덕룡이가 제일 나아요. 그 사람은 믿어요”
“김정태·서의석·이근우…아, 나의 동지들이여”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윤진석 기자]
"한국전쟁 후, 1955년 여당인 자유당에 대항해 야당 통합 운동이 일어난다. 해방 당시 한민당은 우여곡절을 거쳐 민국당이 됐다. 민국당을 중심으로 야권을 전부 통합해 새로운 야당을 만들자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죽산 조봉암을 배제하자는 파와 배제하지 말자는 파로 나뉘어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인촌 김성수 선생의 권유대로 죽산은 ‘나는 공산당과 이미 오래전에 결별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조병옥·장면·윤보선 등은 죽산 배제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해공 신익희 선생은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인촌은 임종 직전까지 죽산을 품어야 한다고 유언했지만, 다수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죽산이 독자적으로 창당한 것이 진보당이었다.”
<제3의 길> 발행인 주대환 저서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의 한 대목이다. 진보당 창당 배경이 설명돼 있다. 죽산 조봉암은 이승만 정부에서 농지개혁의 공을 세웠다. 그러나 색깔론의 희생양이 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되짚기를 조명하는데 왜 진보당 얘기를 하는가 싶을 거다. 이번 되짚기의 주인공 때문이다. 신하철 전 국회의원은 진보당 출신으로 민추협에 가담했다. 그는 진보당의 현실이 말해주듯 안팎으로 많은 부침을 겪었다. 흔히 민추협을 두고 YS 상도동계와 DJ(김영삼) 동교동계가 결합한 결사체라고 한다. 정확히는 신하철처럼 뿌리는 다르나 민주화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합작품이라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세기말 블루스>로 유명한 신현림 시인이 그의 딸이다. 아버지인 그도 표현이 섬세하고 수려하다. YS를 중심으로 격동의 현대사를 기록한 저서 <그래도 새벽은 온다>가 그렇다. (책 제목 ‘새벽은 온다’는 YS 어록으로 시작해 현대사의 격언처럼 돼버린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에서 비롯됐다.)
3월 22일 여의도 국회헌정회에서 신하철 전 의원(이하 신하철)을 만났다. 정정했지만 2년 후면 아흔을 바라보고 있다. 예전 <시사오늘>과 인터뷰한 ‘민산되짚기’, ‘통일로’ 때보다 기억은 더 옅어진 듯했다. 흩어진 기억들을 맞추면서, 인터뷰는 흘러갔다.
(관련기사(1)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67 / 관련기사(2) https://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874)
1. 진보당서부터
1934년 경기도 의왕에서 태어났다. 한양대를 졸업하고, 단국대를 거쳐 중앙대 대학원을 다녔다. 해방 후 10대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좌익인사들을 많이 만났다. 일부는 월북했다. “아마 죽었을 거요.” 숙청으로 희생됐을 거라는 말로 들렸다.
- 정치입문 계기부터 설명해 주시죠.
“(민추협의) 다른 사람들하고는 정치하게 된 과정이 조금 달라요. 원래 나는 진보당 출신이었어요. 20세 때였죠. 자유당 시절인데 3·15 부정선거(4대 대선) 나기 전이오. 1956년 제3대 대선을 앞두고 진보당의 죽산(조봉암)과 민주당의 해공(신익희)이 회담을 했어요. 야권이 통합해야 한다고 했지만 불과 30분 만에 결렬된 거예요. 그런데 선거 보름을 앞두고 해공이 돌아가셨어요. 죽산한테 표가 많이 왔지요. (200만 표 이상을 얻은 죽산은 이승만 대통령의 대항마로 떠올랐다) 하지만 진보당 사건이 터지면서 아무것도 못 한 채 흩어지고 말았어요.”
1958년 진보당 간부들은 간첩혐의로 몰려 형을 살거나 사형됐다. 후에 조작설이 제기된 바 있다.
- YS와는 언제부터 함께했나요. 1979년 YH무역 노동자 농성 사건 때부터 인연을 맺은 건가요. (십여 년 전 ‘민산’ 인터뷰에서 그는 “YH 사건 때 신민당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YS를 도왔다”고 했다.)
“본격적인 것은 1980년대부터 인연이…. 알긴 그 전부터 알았지만 말이요.”
- 왜 YS한테 갔나요.
“(진보당 시절부터) 나는 뭘 했냐면 혁신 운동을 했어요. 절대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일념, 국가적인 부름에 의해 시작했어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어떤 우산이 없었어요. YS는 우산과 같았어요. 그 우산속에 들어간 거지.”
운동가로서 신망을 얻던 신하철에 대해 DJ 동교동계도 권노갑 비서실장을 통해 영입하려고 하는 등 신경전이 있었다. 80년대 초 DJ는 구속되고 망명을 떠났다. 민주화 운동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YS는 가택연금 중에도 전국 조직을 정비해 목숨 건 대여 투쟁을 펼쳐갔다. 그런 연유로 신하철도 YS와 연을 맺은 게 아닌가 싶다.
“민주주의 깃발 아래 보수와 진보가 같이 해 민주화 불꽃을 살리려 했다”고 신하철은 당시를 소회했다.
“내가 YS한테 가니까, 그 양반이 ‘아, 좋다.’ 했지요.”
처음 상도동으로 발길을 향하던 때가 생각나는지 빙그레 미소가 번졌다.
2. YS 단식과 세계의 이목
1984년 발족한 민추협은 민주산악회와 YS 단식을 계기로 태동해 신민당 창당의 모태가 됐다. 12대 총선 승리와 6월 항쟁을 거쳐 87 민주화 체제를 여는 동력이 됐다. 그 기간을 신하철은 YS와 함께했다.
- YS 단식 때는 어떻게 기억되나요.
“삼엄했어요. 서울대 병원서 만날 수 있긴 했지만, 전두환 정권서 방해도 했고 말이죠.”
- 처음엔 국민이 몰랐죠?
“보도가 엄격히 통제됐어요.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널리 퍼져갔지요. 동지들이 백방으로 뛰며 기자들에게 알리기도 했고요.”
신하철은 저서 <그래도 새벽은 온다>에서 당시에 대해 이렇게 적어나갔다.
“경찰병력이 철수한 서울대 병원으로 몰려든 지지자들은 광대뼈가 불거진 그의 핏기 없는 모습에 모두 오열했다. 김덕룡 비서실장은 ‘연금해제는 당연한 조치나 당초 금식을 시작한 이유가 아니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단식 2주일이 경과 되면서 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됐다. 세계 이목이 쏠린 가운데 동조 단식·지지집회·지지성명·격려 방문·전화 등이 쇄도했다. 국민의 지지는 눈덩이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신하철 <그래도 새벽은 온다> 중-
YS 단식은 광주의 진상규명 등을 촉구하기 위해 1983년 5월 18일부터 시작됐다. 23일째 되던 날 생명이 위독해지면서 멈추게 됐다.
3. 민산 안양지부 창립
- 민추협 전에는 민주산악회(민산)에서도 활동했잖아요. 초창기 멤버 아닌지요?
“아, 그렇죠. 故김동영(상도동계 좌장) 씨가 애 많이 썼어요.”
김동영은 민산 조직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YS 단식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도 각 지역 단위로 활동하던 민산 회원들 덕분이었다.
훗날의 일이지만 민주화의 산실과도 같은 민산은 YS 문민정부 개막과 함께 해체됐다. 혹여 생길지 모를 논공행상 논란을 막고 국민통합으로 나아가기 위한 YS 결단에 의해서였다. 민산 회원들은 자기 주머니를 털어 민주화운동을 해 온 사람들이었다. 고생만 했지, 아무 빛도 못 보고 뿔뿔이 흩어졌다.
YS로서도 뼈아픈 일이었다. 큰 버팀목이 돼온 거대 계파를 스스로 잘라냄으로써 이후 힘을 못 쓰는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하철은 민산 해체를 매우 중요한 YS 업적으로 꼽은 바 있다. ‘민산 되짚기’ 에서다.
“YS는 하나회를 해체하면서 민산도 함께 해체했습니다. 민산을 해체하지 않으면 형평성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250만 민산 조직을 살렸으면 그 뒤 누가 (대통령 선거에) 나와도 됐습니다. 하지만 YS는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민산을 해체시켰습니다. 250만 민산 회원들이 순식간에 지리멸렬하게 된 것입니다.”
- 2009년 <시사오늘> 민산되짚기 인터뷰 중-
신하철은 민산 초창기 때로 돌아가, 김동영을 떠올렸다.
“나더러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어요. 훗날 허주 김윤환도 그런 말을 했지만 말이요.”
- 어떤 면에서요?
“헌신적이고 독자적으로 자생하려 하고, 동지가 어려우면 아무리 고달파도 도우려 하고, 배타적으로 자르지 않고…. 이런 게 민주화운동이나 정치에서는 필요하거든요.”
그는 민산에서 안양지부를 창립했다. 경기도 민산도 만들었다. 수원지구에서는 민주화운동 대부로 불렸다.
- 조직을 꾸리고 관리하고 확장 시키는 데 탁월하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스킨십이 좋다거나.
“조직은 기본 다섯 명부터 출발합니다. 나는 농민운동, 시민운동부터 했어요. 경기도 내 일반 대중 조직을 많이 갖고 있었지요. 관리도 중요하지만, 사건이 나면 조직원들을 무사히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는 거기에 매진했어요.”
그가 살던 의왕 집은 민주화 운동가들의 아지트와도 같은 곳이었다. 김승윤(민청련 의장) 등에게 체포령이 떨어지면 아내 김정숙 여사와 함께 숨겨주기 바빴다. 안기부 심문을 당하기도 했다. 고초를 겪기 일쑤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4. 민추협과 신민당
- 민추협에서는 어떤 역할이었나요.
“사회국장을 맡았어요. 국장단 중에서는 내가 나이가 많았어요. 네다섯 살 위였을 거예요. 당시에는 사회국장이 제일 복잡하지 않겠어요? 내가 맡아서 했지요.”
- 사회국장이라면 어떤 일을 했나요.
“주로 학생들, 구속된 사람들 찾아가서 면회하고 영치금 넣어주는 일이었어요. 자금이 필요한 일이잖아요. 사비로도 많이 충당했지요. 그때 돈 300만 원을 갖고 노동자와 학생들 도와가며 조직화에 나섰지요.”
- 민추협이 1985년 신민당을 창당했잖아요. 12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는데요, 그 때 왜 못 나간 건가요.
“왜 못했느냐. 재밌는 얘기죠. 경기도 안양에서는 DJ계 이택돈 씨와 내가 라이벌이 됐던 거예요. 거산(김영삼)은 안양에는 신하철이 있다며 경쟁을 시켰어요. 그러나 공천은 이택돈 씨한테 돌아갔지요.”
YS는 민추협부터 50대 50으로 지분을 나눴다. 신민당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도동계의 양보가 전제된 선택이었다. 파이를 나눠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YS 소신이었다.
신민당은 민주화 열망을 안고 돌풍을 일으켰다. 신하철은 신민당 붐이 완전히 유세장의 분위기를 장악해버렸다고 했다. 뜨거운 열기를 보여준 정치 1번지 종로·중구 때를 보면 이렇다.
“(1985년) 2월 6일 옛 서울고교 자리인 현대인력개발원에서의 마지막 합동연설회는 개막 1시간 전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인파로 운동장과 스탠드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일부 관중은 스탠드를 둘러싼 잎 떨어진 고목 위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청중 수는 무려 10만.
운동장 주위에는 미리 자리를 잡은 커피 행상들이 ‘민주 커피 마시고 공명선거 하세요’라며 커피를 팔았다. 순두부·김밥·라면·해삼·번데기 등 온갖 잡상인들이 몰려들어 시골 장터를 방불케 했다.
이날은 다른 유세 때보다 더 많은 팸플릿이 뿌려졌고, 마지막 유세여선지 청중들 간의 설전도 후보들 못지않았다.
운동장 안에는 4개 중대 450여 명의 경찰이 배치됐고, 밖에는 7개 중대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신민당) 이민우 후보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연설을 했다. 이 후보의 목소리 톤이 한 옥타브 올라갈 적마다 청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쏟아냈다.
‘송충이는 갈잎을 먹으면 죽어. 솔잎을 먹어야지. 국민을 탄압하는 나라를 놓고 누가 민주주의 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총선의 열기를 신민당 폭풍으로 바꾼 장본인인 이민우 후보의 연설은 청중의 함성과 박수에 거의 매몰될 지경이었다.
‘여러분, 군부가 정권에서 물러나면 학생들이 대학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안 가겠습니까?’
‘여러분, 이 나라 정치사상 학생들이 정당에 찾아간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러한 질문 식의 연설도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기 충분했다.
이민우 후보의 연설이 끝나자 약 2만의 인파가 그를 에워싸고 ‘이민우’, ‘이민우’를 외쳤다. 그리고 이 후보와 함께 시민들은 썰물처럼 개발원의 운동장을 빠져 나왔다.
밖에서 대비 중이던 천여 명의 방패부대는 2만여 인파에 쓸려가 버렸다. 이 거대한 시민 행렬은 가슴과 가슴속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바라고, 소망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구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민의’ 함성이자 민중의 정치에 대한 갈망의 메아리였다.”
- 신하철 <그래도 새벽은 온다> 중-
5. 군정 종식과 한계
다시 돌아와,
- 민추협의 최대 목표, 역사적 의의는 뭘까요.
“군정 종식이지요. 근데 난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고 봐요. 내가 생각한 최대 목표는 민주화를 넘어서 새로운 개혁을 하겠다는데 있었어요. 근데 개혁이 안 된 겁니다. 군정은 종식됐지만, 그 이상은 안 됐다 이거야. 근본적으로는 YS와 DJ 두 양대산맥이 이후에도 한데 뭉쳐야 했어요. 누가 먼저 되든 말이오. 근데 87대선에서 갈라지는 바람에 이념도 갈라졌지 않소.”
아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 왜 갈라진 걸까요.
“개인사적인 철학의 문제보다 마음이 분리돼 있던 거예요. 젊어서부터 갈렸잖아요. 서로가 경쟁심에서 말이오. 영달의 발전을 우선하면 안 되는 거예요.”
- YS와 DJ가 화해했다고 보나요. DJ 장례식 때도 YS가 제일 먼저 찾아가고 했잖아요.
“죽었으니 화해한 거지 그게 무슨 화해요. 정신이 화해돼야지.”
- 87 단일화는 실패했지만, 시간이 흘러 늦게나마 민추협이 재건된 것은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향후 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보완돼야 한다고 보는지요.
“진영이 재편돼야 해요.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야 해요. 민추협 때 고생한 사람들 중 참여 않고 있는 이들도 결합하고 말이오. 영구적으로 발전하려면 거대한 시각에서의 담론이 필요해요. 희생과 자금도 있어야 하고 말이지요.”
<민추협이 발전하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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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추협 이사장인 김덕룡에 대해서도 보탰다. “그런 이가 나서야 통합이 되는 거예요. 김덕룡이가 제일 나아요. 그 사람은 내가 믿습니다. 존경할만한 사람이에요.”
6. 문민정부와 15대 총선
화제를 돌렸다.
신하철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경기 안양을에 출마해 당선됐다. 뜻을 관철하려면 원내 투쟁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 도전한 끝에 얻은 결실이었다.
- 의원께서는 쉬운 선거에서는 지고, 가장 어렵다고 일컫던 데서는 이겼단 말이죠. 13대 선거는 소선거구였잖아요.
“용케 됐지요. (웃음)”
- 15대 총선 때는 왜 출마하지 않은 건가요.
“그때는 공천을 못 받았어요.”
- 왜 못 받은 건가요. YS 문민정부 때였잖아요. 원내부총무 시절에는 YS가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도록 일조한 분이었는데 말이죠.
“나는 정치의 희생물이라고 봐요. 다른 말은 않겠소만 모종의 사건(수의계약 수수 혐의 건)에 억울하게 휘말렸고 재판받아 무죄가 됐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신문에 내 이름이 났으니 공천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할 말 다 했지 뭐. 그 신문사에 가서 뭐라 할 수도 없고….”
씁쓸한 듯,
“나는 말이오. 문민정부 되면서 정작 YS를 단 한 번도 못 만났어요.”
- 왜요?
“주변에서 막은 거지.”
인의 장막을 꼬집고 있었다.
“그런 면들 때문에 YS계가 현재 지리멸렬한 거요. 정치란 게 말이오. 다음에 뭐가 올 것인지를 내다봐야지.”
7. 혁신 운동의 꼬리표
필자는 문득 87년이 생각이 났다.
- 87년 대선 때였는데요, 학생 때였습니다. 안양 유세장에 쫓아가 본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김영삼-신하철’을 외쳤지요. 근데 옆의 사람이 그러는 겁니다. ‘신하철은 우리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진보당 출신이라 이거지. 함께 민주화 투쟁을 했으면 포용해야 할 거 아니요. 그런데 막기나 하고….”
- 자주통일 국시 주창자인, 돌아가신 대구 故유성환 의원도 YS가 대통령 된 다음 못 만났다고 들었어요.
“YS 주류 계파들 보면, 거의 보수들이 아니오. 중간에서 혁신 운동했던 사람들을 못 만나게 한 거요. 생각해보면 말이오. 나처럼 혁신 운동하다 보수계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도 쉬운 게 아니에요. 꼬리표가 붙으면, 다들 밟으려 하거든. 그러면 쓰나. YS 정부의 성공을 바랐다면 다양한 인재들을 끌어다 써야죠. 서까래 쌓듯 그래야, 구조적으로 튼튼해지는 거예요.”
- 이후 YS는 언제 만났나요?
“서석재(상도동계·총무처 장관 역임) 씨가 죽고 나서야 만났지. YS가 대통령에 내려오고 나서야 볼 수 있었어요. 서석재 장례식에서였어요. 그전에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겠소. 나도 정치 재개하고, YS를 위해 많은 역할을 했을 텐데….”
눈빛에 아쉬움이 흘렀다.
- 서운한 감정은 없었나요.
“YS는 인간적으로 상당히 좋은 사람이에요. 종종 나를 불러 아침에 같이 밥도 먹고 말이오. 당신께서는 내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며 상당히 좋아했어요. 손명순 여사가 그 먼 데(경기도 집)까지 찾아와 선거운동해 달라 한 적도 있고 말이요. 군부 출신들도 상도동과 접촉하려면 ‘신하철이를 만나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야 YS와 소통이 된다며…. 문민정부 때 못 만나서 그렇지 내 의사가 반영이 많이 되던 때도 있었어요.”
8. 아, 민주화 동지들
인터뷰 후반부로 넘어왔다.
- 지금은 스스로 노선을 어떻게 규정하나요.
“노동운동하다 돌아선 김문수 씨처럼 나도 우파가 됐어요.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바뀌었어요. 이제는 좌파 아니고 완전히 우파입니다. 내 딸도 그렇고, 우리 집식구 모두 우파가 됐지.”
- 왜 그렇게 됐나요. 결정적 계기는요.
“이 정부에 염증을 느꼈어요. 처음엔 기대해볼까 했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거든. 기본적인 국가의 기간산업까지 망가뜨리려는 생각은 잘못된 거라 말이오. 일각서는 공산주의다, 어쩐다 하는데 나는 그것도 아니라고 봐요. 북한에서 내보내던 대남방송이 있었어요. <국민의 소리>라고. 그런 거 들으며 얻은 지식 갖고 하는 게 아닌가 싶지.”
- 역으로 보수 쪽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광화문 집회는 아마 저러다 끝나고 말 거요. 대여 투쟁이라는 것이 큰 정당서 대거 참여하지 않으면 어려워요. 6월 항쟁 때도 그랬어요. 학원가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맨 날 학생들이 데모했잖아요. 실제 대대적인 행동은 민추협이나 통일민주당에서 이끈 거였어요. 지금은 왜 안 되냐. 국민의힘 정치인부터가 돈 있는 집 자식들이에요. 나서질 못해요. 그러니까 안 되는 거요.”
인터뷰를 마치며.
신하철은 중간중간 민주화 동지들 몇몇에 대해 되풀이해 말했다. “이 기회에 소개됐으면 좋겠어요.” 그가 기억할지 모르지만, 과거 <시사오늘> 인터뷰에서도 똑같은 이름들이 전해진 바 있다. 많은 이들이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에, 조명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잊지 않고 꺼내놓는 듯했다.
“김정태 교수라고, 수원에서 청년 동지회를 이끌었어요. 치안본부에서 간첩으로 몰리기도 하고 고초를 많이 겪었지요.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뒤에는 태국으로 건너갔어요. 아들이 조그만 사업을 한다던데… 지금까지 만나지를 못했어. 서의석이라고, 안양에서 데모하다 투옥돼 매 맞은 후유증이 문제가 돼 숨졌어요. 이근우라고, 그 친구도 죽었어요. 민주화운동하다 시의원 나왔는데 좌익이라고 안 됐어. 최주영이는 민추협 국장을 지냈어요. 지금은 <문경신문> 주필을 하고 있어요.”
쓸쓸한 말도 이어졌다.
“저변의 숨은 주역 중에는 민주화운동하다 다치고 죽어도 보상하나 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해요. 살아남아도 취직 못 한 경우도 많고…. 자영업으로 근근이 먹고 살아가고 말이죠. 그래도 보상 바라고 한 게 아니니까…. 나도 민주화운동할 때 집안일은 전폐하다시피 했어요. 다들 죽을 각오로 한 거예요. 죽어도 좋다. 그 생각으로.”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좌우명 : 꿈은 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