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낭만과 고뇌의 현장
문화 예술 중심지로 탈바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워 가끔씩 찾곤 하는 몇 군데 장소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대학로와 마로니에 공원이다. 근래 개인 일정상 자주 방문하게 되는데, 대학 시절을 보낸 신촌 다음으로 친근하고 애정이 각별하다.
젊은 날의 향수
지방에서 상경해 삼촌댁 수유리에서 여고가 있던 종로 5가로 등하교하던 난,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대학로를 3년 내내 지나다녔다. 지금 마로니에 공원 전신인 동숭동 서울 문리대 캠퍼스를 매일 차창밖으로 바라보고 다닌 것이다.
다만 그 당시엔 대입을 목전에 두고 입시에 매진하던 시절이라 여고 인근 외엔 관심을 둘 여유조차 없어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나중에서야 서울 문리대의 역사와 명성을 알게 됐다.
그 후 마로니에 공원이 조성되며 친구들의 아지트가 신촌에서 대학로로 바뀌었을 정도로 인기였다. 또한 한 때 동숭동에서 살기도 해, 낙산아래 마로니에 공원 뒷 길은 특히 익숙하다. 그런데, 옛 기억을 더듬어 수십 년 만에 찾아 가보니 예전 모습은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고즈넉한 풍광을 연출한 정원 예쁜 주택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상업성 건물과 가게로 가득 차 아쉽다.
그 당시 가가호호 대문에 문패가 걸려 있었는데, 국어 교과서에서 본 익숙한 인물의 함자가 보였다. 귀갓길에 지나다니던 집, 바로 서울대 교수였고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 댁이었다. 한 번은 그 댁 우편물이 우리가 살던 집으로 오배송되어, 우편물을 전하며 이희승 선생을 직접 뵌 적도 있다. 하얀 깔끔한 상의의 근엄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대학로의 역사
내가 추억하는 소소하고 잔잔한 에피소드가 있던 곳, 개인적인 연고를 넘어 대학로는 그 역사가 깊다. 이 지역이 대학과 연관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26년 일제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현재의 대학로 양편에 세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해방과 더불어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바뀌고 경성대학은 다시 1946년에 신설된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되었다.
그러면서 대학로 주변에는 서울대 본부와 법과대학, 문리과대학, 의과대학, 미술대학 등의 단과대학이 자리 잡았다. 대학과의 인연은 일제강점기부터였지만 대학로 명칭이 공식화한 것은 한참 뒤인 1966년이다. 대학이 있는 거리라는 점에서 이화동 4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까지를 대학로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할 때까지 대학로는 서울대의 중심 캠퍼스이자 대학생 활동의 중심지였다. 한편으로 젊음과 낭만의 거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추구하던 학생운동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과거 대학로에도 봄이 오는가 하는 어두운 시절이 있었다. 1960년의 4·19혁명,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및 1974년의 유신철폐운동을 비롯한 학생운동이 일어난 시기에는 대학로가 시위와 농성의 주된 장소였던 것이다.
서울대가 이전한 후에도 대학로는 가끔 여러 대학 학생들이 참여하는 연합 학생운동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거리의 기본적 성격은 크게 바뀌었다.
서울문리대에서 마로니에 공원으로
서울대가 떠난 후 주택공사가 문리대 부지에 마로니에 공원을 조성한 것을 계기로 대학로는 탈바꿈했다. 문화예술 관련 기관과 공연시설이 과거 대학 건물과 부지에 들어서고 실내외 공연시설에서 연극·영화·음악·뮤지컬 등의 다양한 공연 활동이 이루어짐에 따라 종합적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모하게 되었다.
현재 공원 남쪽에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예술가의 집'(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대 본관 건물의 원형을 유일하게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지금은 예술가들의 창작과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대 본관이었다. 그리고 광복 이후부터 1972년까지 27년간 서울대 본관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옛 서울대 문리대 터에 아르코미술관이 세워졌고 나머지 부지에는 문화예술 관련 기관과 단체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여기에는 건축가 김수근의 아이디어가 큰 역할을 했다.
자칫 이곳이 예술공간이 아닌 아파트가 들어설 뻔했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아찔한 일 아닌가. 그 배경을 들여다보면, 문리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이 확정되자 대한주택공사가 땅 주인이 됐다. 주택공사는 1973년 이 부지에 아파트 건립 계획을 세웠다. 1931년 지은 대학본부(현 예술가의 집)를 아파트 관리사무소, 중앙도서관은 슈퍼마켓으로 쓰겠다는 방침까지.
그러나 김재순 전 국회의장, 건축가 김수근 등 지식인들이 이 같은 주택공사 계획에 반대하여, 그들의 선견지명이 오늘 날 마로니에 공원을 만들었다. 반대 여론이 커지자 1975년 당시 건설부는 결국 아파트 건립계획을 접었다. 대신 주택공사는 문리대와 사범대 부지를 일부 일반에게 택지로 팔고 그 자리를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건축가 김수근 역작들, 대학로의 주축이 되다
그러자 샘터사를 창업한 김재순 전 국회의장과 건축가 김수근이 일부, 이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서울대 대학본부(현 예술가의 집) 및 부지를 매입했다. 문리대 부지가 문화예술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김수근은 공원 주변에 붉은 벽돌로 미술관과 공연장 건립을 제안하며 설계를 맡았다.
이에 따라 1979년 샘터사옥과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 이어 1981년 문예회관(아르코 예술극장)이 김수근의 손을 거쳐 차례로 들어서게 됐다. 바야흐로 마로니에 공원을 끼고 빨간 벽돌로 지어진 두 곳은 바로 대학로의 랜드마크가 됐다. 덕분에 동숭동은 문화예술 거리로 변모하면서 후일 대표적인 젊음의 거리로 발전한다.
1979년 완공된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인 옛 샘터 사옥(공공그라운드), 대형 창문이 인상적인 건물이다. 적벽돌과 담쟁이로 처리돼 따스함과 포근함을 주는 김수근의 걸작이다. 최근까지 샘터사 건물로 쓰이던 곳으로 그곳에는 ‘난다랑’이란 찻집이 있었다. 우리가 주 만남의 장소로 애용하던 곳인데, 어느 날 가보니 아쉽게도 난다랑 자리에 스타벅스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샘터 사옥을 기점으로 아르코미술관, 아르코 예술극장, 국제협력단 건물, 서울대병원 연구동 등이 김수근의 작품이다. 그러니 대학로의 주요 건축물은 그에 의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대부분 서울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마로니에 공원에 어둠이 내리고
야경을 보기 위해 해떨어지길 기다렸다. 마로니에 공원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고 또 다른 분위기의 예술적인 작품이 탄생한다. 한 낮 태양의 열정이 퇴장하고 휴식기에 든 대학로는 내일의 충전을 위해 숨을 고른다.
텅 빈 공연장, 이곳에서 수시로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마로니에 공원에 어둠이 깔리니 북적거리던 활기 대신 정적이 흐르며 차분해지고 사색에 잠기게 만든다. 주변 야경을 둘러보며 고요 속 정중동의 세계로 빠진다.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 할 어떤 것이 있노라고
마지막으로 다룰 이슈는 학생들의 아지트였던 학림다방. 문리대의 옛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연륜을 자랑하는 나무계단과 함께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1956년에 문을 연 대학로의 백미로, 젊은 학창 시절을 대학로에서 보낸 50대에서부터 70대에 이르는 손님들이 많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이곳에 와 커피 향과 함께 오랜 역사와 명성, 선배 세대들의 추억을 마시게 된다. 거기다 울림 좋은 음악까지, 여전히 핫 플레이스로 손색이 없다.
일찌감치 서울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학림다방은 서울 문리대의 축제인 학림제가 이 다방의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을 만큼 상징성이 크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보란 듯이 남아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그러니 학림은 그 자체로 역사의 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원히 계속되길….
대학로는 진화 중인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예나 지금이나 순수한 젊음의 열정이 가득 넘쳐나는 곳이다. 1990년대를 지나오며 낭만의 거리, 예술의 거리, 연인의 거리라는 확실한 이름표와 함께 대표적인 젊음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여기에 초기 대학로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에서 100여 년이 지난 현재, 대학로 양방향으로 혜화동까지 방사선처럼 골목골목 소극장이 포진해 있다. 뮤지컬과 연극 소극장 등 공연장들이 가득해 서울문리대가 있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연극촌이 됐다. 크고 작은 공연장이 모두 160여 개 몰려 있다고 하니, 명실공히 한국 공연의 메카가 된 셈이다.
건축가 김수근의 붉은색 벽돌 건물들뿐만 아니라 바탕골소극장, 성좌소극장, 연우소극장 등이 골목골목에 들어서면서 대학로는 명실상부한 서울 도심의 대표적인 문화의 거리로 자리매김했다.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연중무휴로 이루어지는 서울 대표적인 문화 특구로 지금까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대학로는 계속 진화 중일까. 대학로와 마로니에 공원은 겉으로 축적된 성과외에 과거 동숭동 서울 문리대 시절을 담보로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그 시절의 흔적을 찾아서 향하는 발걸음이 많아서 일거다. 이에 양적으로 팽창만 할 게 아니라 보다 내실 있는 콘텐츠로 채워져야 되지 않을까. 앞으로 유서 깊은 이곳을 잘 보존하고 성장시켜 미래유산으로 손색없길 기대해본다.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