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방글 기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을 일주일 앞둔 지난 3일, 국민대학교 본부관 학술회의장에서는 ‘정치에 있어서 리더십의 과제’를 주제로 북악정치포럼이 열렸다.
이날 연사로는 문태운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가 초대됐다.
문 명예교수는 정치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소통’을 꼽았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는 것에 정치의 목적이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칼 슈미트의 말을 인용했다.
“칼 슈미트는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고 정의했다. 우리가 만든 사회는 무엇이든지 발전하다보면 결국은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비정치적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일정 단계에 도달하면 그 성격이 바뀐다. 이것을 정치적 변화라고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누가 적인가. 적은 영원한 적인가. 적도 아군이 될 수 있고, 아군도 적군이 될 수 있다. 적군과 아군은 상대적 개념이지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결국, 적군과 아군을 밝혀내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 논리를 이용해 적군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정치의 목적이 있다.”
정당을 예로 들어보자. 이해관계로 뭉친 정당은 권력을 잡겠다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정당의 목표가 된다. 하지만 권력을 획득했다고 상황이 종료되지는 않는다. 재집권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 거다. 야당의 경우는 기회가 되는 대로 권력을 빼앗아 와야 한다.
문 교수는 이를 “적군과 아군의 논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정치”라고 분석했다.
“지도자가 추종자가 될 수 있고, 추종자도 지도자가 될 수 있다. 통합을 이뤘다가도 또 다른 갈등이 생기는 게 현실이다. 적군과 아군의 논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셈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를 한 편으로 가져오는 것은 이론적으론 가능하지만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51:49의 결과가 나왔지만 51이 독점하게 되는 거다.”
이 과정에서 리더십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사회적 합의는 끊임없는 토론과 절차를 통해 결론으로 도출된다.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노력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모두가 문명화됐다. 대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를 거쳐 심의민주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적 의식이나 구조가 많이 바뀐거다. 달리 말하면 ‘보통 사람의 시대’가 됐다. 때문에 지도자의 자질보다는 기능이 중요시된다. 최근에는 지도자 뿐 아니라 추종자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시대가 됐다.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추종자에게도 힘이 생겼다. 리더는 지도자와 추종자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지를 고민해야 한다. 추종자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고, 지체하고 있다면 속도를 조절해야 할지, 뒤쳐진 사람에게 격려를 해야할지 결정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일방적 지시보다는 서로간의 관계를 감정이나 정서를 통해 일치 시켜야 하는 시대다.”
문 교수는 “정치학은 권력을 다루지만, 영향력을 쟁취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 이 영향력을 쟁취하는 것이 정치라는 의미다.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리더의 자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케이크를 나누는 방법’을 예로 들었다.
“여럿이 모여 치즈 케이크를 나눠 먹기로 했다. 이 때 칼을 쥔 사람을 지도자로 보자. 그리고 지도자가 자기의 몫을 가장 늦게 가져간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칼을 쥔 사람이 어떻게 분배 했을 때, 자신에게 가장 유리할까? 틀림없이 균등하게 자를 것이다. 앞의 분배에서 한 조각이라도 크게 자르면 먼저 집어간 사람의 몫이 커지고, 자신의 것은 작아지기 때문이다. 분배하는 사람이 가장 늦게 가져가기로 한다면, 아름다운 사회가 될 거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헌법 제11조
최근 국회 앞에서는 평등법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이 이어지고 있다. 헌법에 명시돼 있는 평등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사회적 약자와도 평등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우리 사회는 두 가지 합의를 도출한 바 있다. 하나는 권리나 의무에 있어서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경쟁의 결과이든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야기됐을 경우, 이를 인정하되 그 몫을 최소 수혜자에게 먼저 돌아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에게 가장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하자는 말과 같다.”
문 교수는 먼저, 평등법 농성과 관련해서도 이론적 답변밖에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사과했다.
“국가는 누구의 편인가. 정부나 국가의 기능이 가진 사람의 편에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스스로 답변할 문제다. 마르크스는 국가가 강자의 편이라고 했지만, 오늘날 복지국가에서는 약자를 위한 정책을 더 많이 펴고 있다고 본다. 국가가 가족사회와 같다면, 가장 아픈 손가락에게 가장 많은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슬픈 거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일이 현재 보다 더 많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국력과 글로벌 스탠다드 등 따라야 하는 규제가 엄연히 존재한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국력으로 그것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절대적 명제다. 때문에 이것을 추진해 나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어떤 정부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우선적인 국가의 과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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