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단일화史] 승패 바꾼 결과…안철수는 ‘변수’ 넘어 ‘상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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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단일화史] 승패 바꾼 결과…안철수는 ‘변수’ 넘어 ‘상수’ 될까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2.01.23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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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적 이념적 투표 행태, 메가톤급 이슈 아니면 표심 안바꿔
수백만 명 지지 흡수 후보단일화, 선거판도 바꿀 막강한 카드
안철수, 이재명과 윤석열 중 단일화 시 판세 바꿀 중요한 변수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역대 대선에서의 단일화 논의를 되짚어보며 이번 대선에서의 단일화 가능성을 가늠해 봤다. ⓒ시사오늘 김유종
역대 대선에서 후보 간 단일화가 성공했던 사례는 세 번 있었다. ⓒ시사오늘 김유종

대한민국 대선은 다이내믹하다. 날마다 치열한 공세가 오가고, 하루가 다르게 쟁점이 바뀐다. 하지만 표면적 역동성과는 별개로, 한 번 형성된 구도는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여전히 지역적·이념적 투표 행태가 남아 있는 우리나라 대선에서, 웬만한 이슈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바꿀 변수가 되지 못한다.

대선 때마다 ‘단일화’가 핵심 전략으로 부상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단일화는 특정 후보로 상징되는 수백만 명의 지지자를 흡수함으로써 선거 판도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막강한 카드기 때문이다. 대선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지금,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중심이 된 단일화 이야기가 나오는 건 예고된 수순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에서도 단일화가 이뤄질 수 있을까. 역사를 돌아보면, 단일화에는 두 가지 선행조건이 있었다. 앞서가는 후보의 ‘노력’과 뒤처지는 후보의 ‘의지’다. <시사오늘>은 역대 대선에서의 단일화 논의를 되짚어보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안 후보 또는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안 후보의 단일화 가능성을 가늠해 봤다.

 

제13대 대선 – 김영삼·김대중


아마도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단일화는 1987년 제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DJ가 진행했던 협상일 것이다. ⓒ연합뉴스
아마도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단일화는 1987년 제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DJ가 진행했던 협상일 것이다. ⓒ연합뉴스

아마도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단일화는 1987년 제13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진행했던 협상일 것이다. 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선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YS와 DJ의 단일화는 ‘4자 필승론’을 들고 나온 DJ에 의해 무산됐고, 결국 ‘진정한 군정 종식’을 5년 후로 미뤄야 하는 결과를 낳았던 까닭이다.

당시 노태우는 YS와 DJ가 끝내 단일화하지 못할 것이라고 봤고, YS와 DJ가 모두 출마한다면 야권 표가 분산됨으로써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실제로 두 사람은 9월 14일부터 29일까지 여러 차례 회동을 열어 협상을 진행했지만, 대선 후보 경선 승패와 직결되는 통일민주당 내 지분 구조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YS는 당내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DJ 측 요구를 수용하고 경선을 제안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YS의 ‘노력’과는 별개로, DJ의 ‘의지’가 크지 않았던 까닭이다. 당시 DJ는 노태우(대구·경북), 김영삼(부산·경남),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모두 출마해 각자 자기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DJ 본인이 당선될 수 있다는 이른바 ‘4자 필승론’에 심취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결과 단일화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노태우는 두 사람의 분열에 힘입어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내가 6.29선언을 예비하는 과정에서 직선제 수용과 함께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을 생각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중략)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이 ‘민주화’를 향한 필연적인 절차였듯이,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은 필연적으로 야권의 분열, 양 김 씨의 동시 출마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당시 야당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다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김대중 씨를 풀어준다고 했을 때 나는 이미 양 김씨의 동시 출마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고, 양 김 씨가 동시 출마하면 노태우 후보에게 승산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양 김 씨의 동시 출마→노태우 후보의 당선이라는 진행은 나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선택의 결과가 아니고, 상황의 산물이었고 나는 그러한 상황을 정확히 읽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양 김 씨 자신들이지 내가 아닌 것이다. (중략) 1987년 노태우 후보에게 당선증을 헌납한 사람들 역시 3김 씨였다는 사실은 1980년대 우리의 정치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652~653쪽.

 

제15대 대선 – 김대중·김종필


DJ는 JP와의 단일화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연합뉴스
DJ는 JP와의 단일화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연합뉴스

제13·14대 대선에서 연거푸 패배의 쓴잔을 들이킨 DJ는 제14대 대선에서 패한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1995년 7월 13일, DJ는 “1992년 12월 19일 정계은퇴 당시에는 정치를 다시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국정현실이 큰 혼란에 빠져 있고 제1야당의 정당기능이 마비된 상황을 그대로 바라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정치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복귀 후 9개월여 만에 열린 제15대 총선에서 DJ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새정치국민회의가 79석을 얻는 데 그치며 여당인 신한국당(139석)에 완패한 것.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18석밖에 얻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앞서 언급했듯, DJ는 ‘TK(대구·경북)는 노태우, PK(부산·경남)는 김영삼, 충청은 김종필, 호남과 수도권은 김대중’이라는 논리의 ‘4자 필승론’을 내세웠을 정도로 서울 표심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서울에서 참패했다는 것은 DJ의 대권 전략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바로 이때 DJ의 정책참모기구였던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의 이강래 상임고문이 ‘호남 고립 구도를 깨기 위해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연합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돌파구가 필요했던 DJ는 이를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JP와의 협상에 나섰고, 혼자 힘으로는 대권을 잡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던 JP 역시 이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대선을 겨우 한 달여 앞둔 1997년 10월 27일 극적으로 단일화에 합의했다. 알려진 대로, 호남과 충청의 결합이었던 DJP 연합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내는 데 성공한다. 서로의 힘이 필요했던 두 사람이 ‘노력’과 ‘의지’를 보인 결과였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27일 밤 자민련 김종필 총재 자택을 찾아 1년간 끌어오던 후보단일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총재는 이날 밤 후보를 양보해 준 JP에게 고마운 뜻을 피력했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힘을 모아 잘해보자. 여생을 국가를 위해 보람 있게 보내자”며 덕담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날 밤 합의는 선거 사상 유례없는 야권 통합 성격의 단일화라는 점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 같다. 앞으로 성공 여부를 떠나 선거 때마다 분열을 거듭해 온 야당의 습성을 극복한 것 자체로도 평가받을 만하다.
단일화 성사는 대선구도를 5자 구도에서 4자 구도로 압축했으며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대’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후략)
1997년 10월 29일자 <매일경제> DJP 후보단일화 완전 타결 ‘DJT연대’로 발전 모색

 

제16대 대선 – 노무현·정몽준


노무현과 정몽준 단일화는 각자의 필요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연합뉴스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는 각자의 필요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연합뉴스

제15대 대선에서의 단일화 성공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워야 했던 민주당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DJP 연합으로 지역적·이념적 확장을 담보할 수 있는 단일화가 얼마나 큰 파괴력을 낼 수 있는지가 증명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당 후보였음에도 ‘추격자’ 입장에 서야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DJ의 성공 사례를 받아들여 영남 출신의 ‘재벌 2세’ 정몽준 당시 국민신당21 후보와 단일화에 나섰다.

당시 노무현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제3회 지방선거와 8월 재보궐선거에서 잇따라 참패한 새천년민주당에서는 노무현의 대선 경쟁력에 의심을 품고 ‘후보 교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에 민주당 내 비(非) 노무현 세력들은 탈당 후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를 만들어 사실상 정몽준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노무현의 사퇴를 요구하는 모양새였다.

정몽준의 미래도 마냥 장밋빛은 아니었다. 2002 한일월드컵 대성공에 힘입어 일약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오른 상태이긴 했으나, 치밀한 준비 없이 월드컵 성과만으로 인기를 얻은 정몽준의 지지율은 그리 공고하지 못했다. 게다가 ‘대세론’을 이어가고 있는 이회창을 꺾기 위해서는 판도를 뒤엎을 수 있는 묘안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과 정몽준이 단일화에 성공하면 이회창을 이길 수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가 성사될 경우 두 후보 모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앞서는 것으로 여론조사 결과에서 나타났다.
문화일보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TN소프레스에 의뢰, 18일 전국의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95% 신뢰구간에 ±3.1%) 결과, 이회창-노무현 후보의 양자 대결시 42.2%대 46.2%, 이회창-정몽준 대결시 40%대 50%로 조사됐다. (중략)
단일화가 실패해 대선이 다자구도로 치러질 경우 이회창 후보가 41.1%로 압도적 우세를 보였고 정몽준 27.9%, 노무현 23.9%, 민주노동당 권영길(權永吉) 1.8%, 무소속 장세동(張世東) 1.6%, 하나로국민연합 이한동(李漢東) 후보 0.3% 등의 순이었다. (후략)
2002년 11월 19일자 <연합뉴스> ‘鄭 선호도·경쟁력 앞서’

단일화를 하면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 이것이 단일화를 향한 두 사람의 ‘노력’과 ‘의지’를 이끌어냈다. 여론조사 문항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파열음이 나기도 했지만, 단일화에 성공하면 승리 실패하면 패배라는 명확한 미래는 두 사람을 협상 테이블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노무현·정몽준은 선거 하루 전 정몽준이 지지 철회를 발표하기 전까지 한 배를 타고 대선을 향해 나아갔다.

 

제18대 대선 – 문재인·안철수


문재인과 안철수는 단일화에 성공했지만, 화학적 결합에 실패하면서 대선 승리를 얻지는 못했다. ⓒ연합뉴스
문재인과 안철수는 단일화에 성공했지만, 화학적 결합에 실패하면서 대선 승리를 얻지는 못했다. ⓒ연합뉴스

제18대 대선은 ‘절대강자’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야권 후보들이 도전하는 모양새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막강한 표 흡수력을 과시한 박근혜는 그 어떤 야권 후보의 추격도 허용하지 않는 괴력을 보여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문재인 후보가 야권 대표 선수로 나섰지만, 그조차도 박근혜의 지지율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바로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인물이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안철수는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박원순 변호사를 지지하면서 유력 차기 대권 후보로 떠오른 상태였다. 실제로 안철수는 다수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거론되고 있었다.

결국 안철수는 2012년 9월 19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정치에 입문한 뒤 안철수의 지지율은 빠르게 소진돼 갔다. 영남과 호남, 보수와 진보로 나뉜 대한민국 정치에서 지역 기반도, 이념을 기반으로 한 열성 지지층도, 정치 경험도 없었던 안철수가 지지율을 지켜내기는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MBN의 야권단일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최초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안철수 후보를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29일 MBN에 따르면, 여론조사기관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 26~28일 사흘간 유무선 전화면접법으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야권단일후보 선호도에서 문재인 42.2%, 안철수 39.2%로 조사됐다. 문 후보가 오차 범위 내이기는 하나 안 후보와의 야권단일후보 경쟁에서 앞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5~6일 실시한 조사에서는 안철수 43.5%, 문재인 42.1%였다. (후략)
2012년 10월 29일자 <뷰스앤뉴스> ‘[MBN 조사] 문재인, 야권선호도 안철수 첫 추월’

그렇다고 문재인의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국민들에게 진보 측 후보로 인식됐던 안철수는 문재인의 지지율을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3자 대결이 펼쳐질 경우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쪽은 박근혜였다. 결국 문재인과 안철수는 제16대 대선 때와 마찬가지로 ‘1위 후보’인 박근혜를 막기 위해 2, 3위 후보가 손을 잡는 단일화 협상에 돌입했다. 그리고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안철수는 11월 23일 지지자들에게 문재인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다.

다만 2, 3위 후보가 결합해 1위 후보를 뛰어넘었던 제15·16대 대선 때와 달리, 제18대 단일화는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내각제’를 고리로 손을 잡았던 DJP 연합,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 후보를 결정했던 노무현·정몽준과 다르게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는 협상 내내 삐걱거리다가 안철수가 후보 자리에서 물러나는 방식으로 단일화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순탄치 못했던 과정 탓에 양쪽이 ‘화학적 결합’을 하지 못했고, 이것이 결국 대선 패배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대선 후보 단일화가 남긴 것


이재명 혹은 윤석열과 안철수의 단일화는 이뤄질 수 있을까. ⓒ연합뉴스
이재명 혹은 윤석열과 안철수의 단일화는 이뤄질 수 있을까. ⓒ연합뉴스

역대 대선에서 후보 간 단일화가 성공했던 사례는 세 번 있었다. 김대중·김종필, 노무현·정몽준, 문재인·안철수였다. 그리고 단일화가 대선 승리까지 이어진 건 두 차례였다.

김대중·김종필과 노무현·정몽준, 문재인·안철수는 어떻게 단일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가장 먼저 단일화가 대선 승리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1987년의 DJ처럼 나름대로의 단독 집권 플랜이 존재하거나, 1992년의 YS, 2007년의 이명박처럼 압도적인 지지율을 얻고 있을 때, 2017년의 홍준표·안철수·유승민처럼 결합 효과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단일화에 대한 유인(誘因)이 없다.

단일화 효과에 대한 확신이 있더라도, 앞서가는 후보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1997년과 2002년의 이회창은 이념적으로 가까운 JP와 이인제, 정몽준과 손을 잡음으로써 승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대세론’을 형성하던 이회창은 3위 후보에게 고개를 숙일 뜻이 없었고, 이는 이념적으로는 다르지만 보다 절박했던 DJ, 노무현이 단일화에 성공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있었던 단일화가 모두 2위 후보를 중심으로 이뤄졌던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

그렇다면 이재명과 안철수 혹은 윤석열과 안철수는 단일화가 가능한 조합일까. 우선 단일화 효과에 대한 확신은 크다.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철수가 가진 15% 안팎의 지지율은 대선 승부를 결정짓는 ‘캐스팅 보트’가 될 수 있다. 단일화가 대선 승리와 직결돼야 한다는 첫 번째 조건은 충족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이재명·윤석열이 얼마만큼의 ‘노력’을 보여줄지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단일화에 성공한 세 차례 선거에서는 모두 확실한 ‘1강’이 있었으므로, 단독으로는 집권이 어려운 2위 후보가 3위 후보에게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낼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재명과 윤석열은 꼭 안철수의 도움이 없이도 집권이 가능한 환경이다. DJ나 노무현, 문재인처럼 단일화에 ‘올인’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은 단일화 가능성을 낮추는 요소다.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역사를 돌아보면, 단일화는 앞서가는 후보의 노력과 쫓아가는 후보의 의지가 합치될 때 가능했다”며 “단일화가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단일화가 돼야 대선 승리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결국 이재명 혹은 윤석열이 얼마만큼의 노력을 보여주는지, 또 안철수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단일화 과정에서 욕심을 버리고 ‘감동을 주는 단일화’를 할 수 있는지가 이번 대선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의미다. 과연 이번 대선에서도 후보 단일화는 선거 판도를 뒤흔들 핵심 변수가 될 수 있을까.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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