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성장 실패, 여력 없는 중소기업에 과도한 부담 지운 탓”
“이익공유제·중소기업 적합업종제·국가사업의 중소기업 직접발주 제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갈등의 시대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지역, 이념에서부터 세대, 성별, 재산에 이르기까지 온갖 기준으로 갈가리 찢어져 반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갈등의 기저에는 ‘양극화’가 자리한다. 한쪽은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며 눈부신 성장을 하는데, 다른 한쪽은 일자리 하나 구하기 어려운 지독한 불균형. 이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갈등의 시대를 끝낼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망국적 양극화’는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을까. 이 고민의 끝에는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이 있다. 정 이사장은 오래 전부터 양극화 해소를 ‘시대정신’으로 제시하며 구체적 비전으로 ‘동반성장’을 주장해온 인물이다. 이에 <시사오늘>은 1월 13일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을 찾아 ‘동반성장은 시대정신이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친 정 이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한민국, 경제 강국 됐지만 양극화 늪 빠져”
정 이사장은 먼저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맞은 것처럼 보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 이면은 곪아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외견상 현재 대한민국 경제는 매우 좋은 상황입니다. 공식적으로 선진국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고,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나라만 따지면 우리나라 1인당 소득이 세계 7위 안에 들어갑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으면서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50-30클럽(인구 5000만 명 이상, GDP 3만 달러 이상)에도 가입했습니다. 세계적으로 공인된 분류는 아니지만, 어쨌든 50-30클럽에 들어갔다는 건 우리나라가 얼마나 경제 강국인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최근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저성장 양극화가 심하기 때문입니다. 서울대 김세직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은 김영삼 정부 이전에는 7%, 김영삼 정부 때는 6%, 김대중 정부 때는 5%, 노무현 정부 때는 4%, 이명박 정부 때는 3%, 박근혜 정부 때는 2%로 5년마다 1%씩 하락하고 있습니다. 또 양극화가 심해서 소득 상위 1% 사람들이 전체 소득의 15%를, 상위 10%의 사람들이 전체 소득의 47%를 가져간다고 합니다. 4대 기업이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대가 바뀌었는데, 과거 우리가 성공했던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 정책이 1960년대부터 계속돼 온 ‘선성장 후분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4대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확대됐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격차도 너무 커져서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과거에 급성장하는 원동력이었던 인적자원과 도전정신, 공동체정신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양극화 극복하려면 중소기업 살려야”
저성장 양극화 원인을 선성장 후분배 정책, 인적자원과 도전정신, 공동체정신의 상실이라고 진단한 정 이사장은 곧바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기·중기·장기 방안을 거론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우선 단기적으로는 이익공유제와 중소기업 적합업종제, 국가사업의 중소기업 직접발주를 제안합니다. 국가 경제가 성장하려면 공급 측면에서는 투자가 활발히 이뤄져야 하고, 수요 측면에서 보면 소비가 많이 늘어나야 합니다. 소득주도성장은 이 중 수요 측면에 착안한 정책이었습니다. ‘소득이 부족하니까 사람들이 소비를 안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어려운 사람들에게 소득을 늘려줘야 한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어려운 사람들이 더 소비할 거고 소비가 활발해지면 경제도 성장할 거다’라는 논리였습니다. 취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최저임금을 높이면 인상분을 감당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소상공인들이 고용을 줄이고 일할 시간을 줄이니까 소득도 소비도 줄어듭니다. 이게 바로 소득주도성장이 실패한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중소기업·소상공인들은 왜 높아진 최저임금을 감당하지 못했을까요. 지난 10~20년간 기업 소득 증가율이 가계 소득 증가율의 세 배에 달했습니다. 또 대기업 수익률이 중소기업의 세 배였습니다. 성장 과실을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들이 가져가지 못했던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 임금을 많이 주라고 하니까 고용과 근로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같은 구조에서는 소득을 늘릴 방법이 많지 않아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투자에 착안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 경제를 보면, 대기업은 돈은 많지만 대상이 없어서 투자를 못하고 중소기업은 대상은 많은데 돈이 없어서 투자를 못하는 상황입니다. 만약 합법적으로 스무스(smooth)하게 대기업으로 흐를 돈, 이미 흐른 돈을 중소기업으로 흐르게 하면 투자가 늘어날 겁니다. 그 구체적 방법론이 바로 이익공유제와 중소기업 적합업종제, 국가사업의 중소기업 직접발주입니다. 이런 정책을 통해서 중소기업을 키우고, 투자를 활발하게 만들면 양극화 해소에도 도움이 됩니다. 대한민국 기업은 99% 이상이 중소기업이고, 고용도 84%가 중소기업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초과이익공유제란 대기업이 해마다 설정한 경영목표치를 넘어선 이익을 얻었을 경우, 대기업에 협력하는 중소기업의 기여도 등을 평가해 초과이익 일부를 나눠주는 것이다. 중소기업적합업종제는 특정 업종에 대기업의 진출을 제한하거나 금지해 중소기업의 사업영역을 보호해주는 제도다. 국가사업의 중소기업 직접발주는 말 그대로 국가사업은 중소기업에게 직접발주하자는 주장이다.
“중기적으로는 중소기업에 사람이 많이 가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근로자들을 잘 대우해줘야 합니다. 다만 소득주도성장처럼 임금을 급격히 올리면 부작용이 생기니, 임금 상승은 장기적으로 진행하되 국가가 나서서 사회보험료를 감면해준다거나 자녀 학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복리후생을 확대하는 쪽으로 가야할 겁니다. 또 구두주문이나 납품가 후려치기, 기술탈취 같은 불공정 거래행위를 규제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대기업이 부당하게 중소기업의 과실을 가져가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장기적인 성장은 사회 혁신과 교육 혁신에 달려 있습니다. 사회 혁신은 부정부패를 없애자는 겁니다. 부정부패가 만연하면 공동체정신이 사라집니다. 부정부패가 일소돼야 국민들이 진심으로 화해할 수 있고, 사회 발전을 위해 협력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육 혁신이 필요합니다. 예전처럼 남의 것을 배우고 전달하는 데서 벗어나 창의적 인재를 육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파이를 키우고, 커진 파이를 대기업뿐만 아니라 고객과 근로자, 협력업체가 합당하게 나눠가질 때 한국 자본주의도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