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곽수연 기자]
매일 하루를 살아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정·학교·직장에서 불편한 사람 또는 상황, 피하고 싶은 현실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꿋꿋이 나아가기 위해선 희망도 필수다. 따라서 용기와 희망이 가득한 자는 포기하지 않고 목표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다. 그런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현재 불합리한 제도나 관행이 고쳐졌다.
그러나 대중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기까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사회적 운동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까지는 고단하고 힘든 투쟁의 연속이다. 용기와 희망으로 자기 암시를 해보지만 변화는 단기간 내 쉽게 오지 않고 현실은 냉혹하고 만만하지 않다. 때문에 사람들은 무력감에 빠지고, 나약해지고, 냉소적으로 변하며,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의구심을 가지며 흔들린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고 자신을 믿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사람들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 냉수마찰을 한 것처럼 정신을 확 차리게 된다.
최근 정신이 번쩍 드는 소식을 접했다. 바로 재조명된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다. 지난 2020년 9월 21일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실종됐던 해양수산부 산하 서해 어업관리단 공무원(서해 공무원)은 다음날 북한 군에 의해 피격된 후 시신이 불태워졌다. 자국민이 북한군에 의해 피격되고 시신이 소각된 사실을 국방부 장관이 3일이 지난 24일이 돼서야 언론에 첫 공개했다. 그리고 한 달이 다 돼가는 시점인 10월 22일 해양경찰청장은 "지금까지의 수사 사항을 살펴볼 때 망인은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했다.
군이 부실한 대응을 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품게 된 피살 공무원의 형 이래진 씨는 북한군 감청 녹음 파일을 포함한 동생의 사망 경위와 관련된 자료를 공개하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국방부와 해양경찰청은 국가기밀, 국가안보 사항이라며 관련 자료 공개를 거부해왔다.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시 해양경찰청과 국방부가 보여준 태도는 국민들의 공분을 사게 했다. 당시 국민들은 화가 난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피격당하기 전까지 군이 안일하게 대응했다는 의문. 두 번째는 피살 공무원에게 '월북자'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군의 안일한 대응을 은폐, 축소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국방부가 북한군의 피격 행위를 은폐 및 축소하려고 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는 공무원이 피살당했던 바로 당시에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북한과의 평화 분위기를 조성해 국제사회에 한반도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호소하려고 노력하던 참이었다. 이에 국방부, 해양경찰청, 청와대가 자국민 희생에도 북한의 눈치를 봤다는 여론에 무게가 실렸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9월 29일 피살 공무원 사건 관련 대북규탄 결의안에서 '시신을 불태웠다'는 문구를 빼자고 주장했다. 김영진 당시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실질적으로 북한이 어업 지도원을 총격 살해한 사건이 핵심 아니냐"며 "북한은 부유물을 불태웠다고 언급한 상황에서 그것(시신 불태웠다)을 부각하면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된다. 말폭탄을 주고받는 것보다는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유해를 수습해나가면서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관리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자국민이 살해됐는데 북한 눈치를 보느라 '시신 불태웠다'는 말을 빼자는 것이다.
아울러 민주당은 같은 시기에 '한반도 종전선언 촉구 결의안'과 '북한 개별관광 허용 촉구 결의안'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상정해 논란이 불거졌다. 강대식 국민의힘 의원은 이에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월북 의사가 있었든 단순 표류든 간에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라며 군에 책임이 있다고 질타했다. 강 의원 질책에 홍영표 민주당 의원은 "과거에도 보면 안보팔이를 통해서 정치적으로 득을 얻는 것들이 많아지면 나라가 불행해졌다"며 "그것이 오늘의 정치권이라는 것이 부끄럽다"고 대답했다.
민주당, 국방부, 청와대, 해경의 이런 식 반응에 유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은 나머지 이래진 씨는 유엔 북한 인권사무소에 진상조사를 해달라고 촉구 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토마스 오헤아 퀸타나 유엔 북한 인권 특별보고관은 문재인 정부에게 실종 공무원 총살사건 관련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청했다. 유엔이 우리 국민을 위해 정부 대신 진실규명에 나서는 것부터가 낯 뜨거운 상황이다.
이처럼 군, 정부, 청와대, 해경, 여당의 비협조적인 태도에도 이래진 씨는 용기 있게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저항,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올해 1월에 국방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해경을 상대로 제기했던 정부 공개 청구 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했다. 재판부는 청와대와 해경에게 공개를 거부한 국가안보실 자료 중 '북측의 실종자 해상 발견 경위'와 해경 자료 중에선 어업지도선 직원 진술조서, 해경이 작성한 초동수사 자료 등을 개인정보를 제외하고 공개하라고 주문했다. 이러한 1심 법원 판결에 청와대와 해양경찰청은 지난 12월 6일 항소를 했다.
이래진 씨는 지난 10일 기자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거대 조직의 억압과 협박에 어떻게 싸워야 할지 막막했다. 또한 군사기밀이라고 거부를 해서 어려운 싸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며 "정보의 부재력으로 자문을 받다 보니 잠도 못 자고 진실 규명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민주당과 대통령의 지지자들 댓글 공격에 참기 힘든 고통의 순간이 있었지만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심기일전했다"고 말했다.
끝까지 싸우게 한 계기에 대해, 이 씨는 "평화와 안보의 우선사항은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자국민이 북한에 의해 살해됐음에도 평화를 운운하는 행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바로 잡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외롭게 싸우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는 "군사기밀과 안보도 결국은 국민을 위한 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안보인지 누구를 위한 군사기밀인지 알고 싶다"고 반문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 씨는 "재판을 통해서 진실 여부를 가려서 이러한 일을 재발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며 "또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정부 관계자에게 책임을 묻고, 민주주의 국가의 위상을 되찾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평화는 진실규명이 우선돼야 한다"며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래진 씨는 정부의 발표를 맹목적으로 믿지 않고 의구심을 가지며 질문을 던졌고, 하나씩 정보를 자문하면서 동생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에 나섰다. '살아있는 권력'의 비협조적 태도, 여당 및 대통령 지지자들의 협박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1심 일부 승소'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다'라는 격언처럼, 이래진 씨의 외롭고 처절한 투쟁의 결과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승소했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이러한 이래진 씨의 정신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어느 분야를 봐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뉴스는 없다. 쏟아지는 정보 홍수에 정신만 더욱 혼란스럽다. 언제 종식될지 모르는 코로나19에 한국 경제는 기저효과 소멸로 내년부터 둔화되고 부의 양극화도 심화될 전망이다. 한 기관에 따르면 10년 내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0%대 진입하고 마이너스 성장을 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아울러 대선으로 내년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고 해도 서민들의 삶에 큰 변화가 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삶의 질이 개선되기보다는 현상유지 또는 악화될 공산이 더 크다.
현재 악한 정치인의 전성시대로 전 세계의 민주주의 체제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외신 보도도 나온다. 갈수록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 대다수의 사람을 지배하는 SF 영화 같은 상황이 전개될 날이 올 수도 있다. 따라서 이래진 씨처럼 용감하게 권력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이 씨처럼 온갖 압박과 협박 속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난관을 뚫고 나가는 정신은 2022년을 맞이하는 국민들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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