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추협 없이 6월 민주항쟁도, 직선제도 없는 까닭’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주요 민주화 인사들은 정치규제 대상이 됐다. 의원직에서 제명당한 YS(김영삼)는 가택연금을, DJ(김대중)는 내란 음모 혐의로 구속됐다. 암흑의 세월이었다. 이를 깨운 건 YS였다. 1980년 신군부에 저항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자 YS는 1983년 23일 간의 목숨 건 단식 투쟁을 거행했다. 이를 계기로 흩어져 있던 민주세력이 규합됐고, 1984년 5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될 수 있었다.
민추협은 이후 선명 투쟁 노선의 신민당을 창당, 12대 선거 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87년 6월 민주항쟁이 성공하기까지 민추협은 직선제 쟁취라는 선명 구호를 앞세워 천만인 서명운동 등 범대중 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는 서슬퍼렇던 독재 정권 치하에 숨죽여 무기력했던 정치권, 재야, 학생, 시민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6월 민주항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관련해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현대사 민주화 발전의 변곡점이 6월 민주항쟁이라면 이 저항체를 만든 발판이 돼준 게 YS가 이끈 신민당 승리이자 더 거슬러 민추협이었다”고 한 바 있다.
<시사오늘>은 ‘6월 항쟁 되짚기'와 ‘민추협 되짚기’를 통해 현대사의 흩어진 조각들을 맞춰나가고 있다. 특히 6월 민주항쟁에 있어 그동안 잘 다루지 않았던 민추협의 재평가에 주목하는 중이다. 6월 민주항쟁 34주년을 맞아 민추협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그간 인터뷰했던 정치 원로 몇몇의 이야기를 하나로 모아 전해본다.
1.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모태 ‘민추협’
“6월 민주항쟁과 군정 종식, 민추협 재조명돼야”
김덕룡 現민추협 공동 이사장
YS(김영삼)와 그의 동지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과 함께 군정 종식에 앞장섰던 김덕룡(81) 민추협 공동이사장은 민추협이야말로 6월 항쟁의 산실이 돼줬다고 평한 바 있다. 그는 지난해 겨울 <시사오늘>과의 YS 서거 5주기 대담에서 6월 항쟁을 거쳐 87 직선제 쟁취를 이루기까지 민추협 공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활발히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4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시절 굴욕적 한일 회담에 저항한 6·3 사태 주역인 그는 상도동계에 입문 후 ‘민주산악회와 민추협’, ‘2·12 선거혁명’, ‘6월 항쟁과 직선제 쟁취’ 과정을 떠올리며 역사적 의의를 전했다.
“6월 민주항쟁이 성공하기까지 민추협 출범의 의미도 중요합니다. YS와 DJ로 대표되는 야권이 하나가 됐다는 게 제일 큰 의미겠지만 민추협이 생기면서 민주화 운동의 투쟁 방식이 크게 변화됐어요.
첫째는 산발적 투쟁을 조직적 투쟁으로 바꾼 계기가 됐어요. 전에는 재야나 일부 야권 인사들의 개개인 투쟁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일어난 것에 그쳤거든요. 조직력 있게 응집한 것이 민추협이라고 생각해요. 둘째는 야권의 온건 투쟁 노선을 강경 투쟁 노선으로 바꿔놨어요. 어용 야당들이 있던 때인데 군정종식, 군부세력 타도 같은 강경 투쟁으로 변화시켰죠. 셋째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을 재야에서 정치권으로 옮겨놨다는 거예요. 이게 민추협 출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의미라고 생각해요.”
2. 6월 항쟁의 결실 직선제 쟁취와 민추협
“민추협 아니었던들 6·29선언도 없었다”
김태룡 당시 정통야당 대변인
김태룡(88) 전 국회의원은 민추협 당시 상임운영위원이었다. 6월 항쟁이 성공하기까지 민추협을 거쳐 신민당, 통일민주당에서 대변인을 맡아 강한 대여 투쟁의 논평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 3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민추협이 6·29 항복 선언을 이끌었다”며 “민추협이 아니었던들 6·29 선언도, 오늘날의 민주화도 없어요. 역할이 대단히 컸다”고 한 바 있다. 또 관련 비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6월 항쟁이 벌어졌는데, 20일이 지나가도 전두환이가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는 거예요. 6월 25일, 26일 전국 대대적 시위가 일어나게 돼 있었어요. 그리되면 제2의 부마사태, 계엄이 선포될 우려가 있었어요. 이걸 막기 위해서 우리가 한 게 뭐냐. 영수회담 제안이었어요. 전두환이도 급하니까 딱 받더라고. 자기도 몸이 단 거지. 부마사태가 난 뒤 열흘 만에 박정희가 죽었잖아요. 위협을 느끼니까 수락한 거야. (청와대와의 회담 날짜는 1987년 6월 25일) 제가 으름장을 놨어요. 계엄을 확대하고, 철권정치를 강화해 정권을 연장한다면 어마어마한 비극이 올 거라고 했지. 탱크로 진압한다면, 결국 그 탱크가 머리를 돌려 청와대로 향할 것이다, 전두환은 물론 참모들 모두 불행하게 될거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6·29 선언이에요.”
3. 6월 항쟁의 동력, 12대 선거와 민추협
“거대한 민의 함성, 선거 혁명으로 이어져”
신하철 당시 민추협 사회국장
신하철(88) 전 국회의원은 민추협에서 사회국장을 맡았다. 그는 역할에 대해 지난 3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주로 학생들, 구속된 사람들 찾아가서 면회하고 영치금 넣어주는 일이었다”며 “자금이 필요한 일이다. 사비로도 많이 충당했다. 그때 돈 300만 원을 갖고 노동자와 학생들 도와가며 조직화에 나섰다”고 한 바 있다. 신 전 의원은 6월 항쟁의 실질적 동력이 돼줬던 민추협을 기폭제로 만들어진 신민당과 12대 선거 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둔 바 있다.
“(1985년 2월 6일 정치 1번지 이민우 신민당 후보의 종로·중구 유세장 현장에 대한 신 전 의원의 기록 관련) 청중 수는 무려 10만 명. 옛 서울고교 운동장 주위에는 미리 자리를 잡은 커피 행상들이 ‘민주 커피 마시고 공명선거 하세요’라며 커피를 팔았다. 순두부·김밥·라면·해삼·번데기 등 온갖 잡상인들이 몰려들어 시골 장터를 방불케 했다. ‘송충이는 갈잎을 먹으면 죽어. 솔잎을 먹어야지. 국민을 탄압하는 나라를 놓고 누가 민주주의 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여러분, 군부가 정권에서 물러나면 학생들이 대학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안 가겠습니까?’
이민우 후보의 목소리 톤이 한 옥타브 올라갈 적마다 청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쏟아냈다. 연설이 끝나자 2만여 인파의 물결이 행렬이 이어졌다. 가슴과 가슴속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바라고, 소망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구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민의’ 함성이자 민중의 정치에 대한 갈망의 메아리였다.(이후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켜 제1야당이 됐다)”- 신하철 <그래도 새벽은 온다> 중-
4. 6월 항쟁 성공의 뿌리 ‘민추협’
“시위 학생들 보호한 민추협, 6월 항쟁 마중물 돼줘”
한광옥 당시 민추협 대변인
한광옥(80)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그당시 민추협 대변인이었다. 한 전 대표는 지난 2월 <시사오늘>인터뷰에서 “전두환 신군부 초 처음 국회에서 광주 진상 조사 촉구를 기습적으로 발표한 주인공”임을 전한 바 있다. 6월 민주항쟁이 성공하기까지 민주화의 마중물이 돼준 것이 민추협이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그는 감옥에 있었다. 왜 그런지, 인터뷰에서도 전한 바 있지만 지난 1일 페이스북에서도 6월 민주항쟁 34주년을 앞두고 당시 상황을 기록해뒀다. 민추협 대변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
“저는 6월 민주 항쟁 당시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대변인을 맡던 중, 이른바 건국대 사태와 관련한 성명서 발표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성명서를 통해 “어떠한 이유로도 학생들을 용공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건국대 사태는 군사독재 정권이 1986년 10월 28일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이 건국대에서 개최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 학생투쟁 연합(애학투) 결성식’을 짓밟은 사건입니다. 학생들은 경찰의 완전 봉쇄 때문에 농성에 들어갔고 경찰은 10월 31일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던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들어갔습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해 소이탄을 쏘기도 했습니다. 결국, 1525명을 연행하고 1287명을 구속했던 사건입니다. 10.28 건대 항쟁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6월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 6·10항쟁의 이념적 뿌리이며 대중적 민주화 운동의 시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5. 6월 항쟁의 도화선 민추협과 YS
“5·18 알리고, 6월 항쟁 성공까지 YS 기여 커”
김무성 現민추협 공동회장
김무성(71) 전 새누리당 대표는 1980년대 전두환의 5·18 광주 진압에 비분강개해 정치권에 뛰어들어 YS 상도동계로 시작해 지금에 이른 제도권 내 대표적 민주화 인사다. 김 전 대표는 지난해 3월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YS 단식을 계기로 결성된 민추협이야말로 1987년 6‧10 항쟁과 6‧29 선언, 직선제 쟁취의 실질적 도화선이 돼줬다”며 “직선제 쟁취도 민추협이 처음 시작한 것이고, YS 공이 컸다”고 한 바 있다. 민추협 활동 당시 관련해서는 YS와 얽힌 시위 현장 일화를 전했다.
“경찰과 대치할 때는 YS가 항상 앞장섰어요. 그럼 저쪽(경찰)에서는 사과탄(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과 모양의 최루탄)을 터뜨려. 파편이 튀면 눈이 다 실명되니까요 그때 참 경찰한테 많이 맞았어요. 닭장차에 끌려가 맞고, 경찰서에 잡혀갔다, 저항하다 맞고. 최루탄도 결국 독극물인데. 우리 다 암 걸려 죽는다고 생각했어요. 매일 그걸 쏘는 거야. 공중을 향해 쏴야 되는데 바로 쏴버려. 맞으면 아파요. 민추협은 그렇게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었어요. 상대는 총칼을 든 군인들이고 우리는 맨손이고, 감히 당해낼 수가 있겠나. 얻어터지는 거지. 굴하지 않고 목숨 걸고 투쟁한 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였어. 온몸을 던지겠다는 숭고한 생각이었습니다. 진짜 칠흑 같은 캄캄한 밤 같은 상황이었어. YS가 대통령 된다는 생각도 못했고, 그냥 옳은 일이니까 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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