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찍어내기’가 소환한 ‘YS 제명 사건’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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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찍어내기’가 소환한 ‘YS 제명 사건’이란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0.12.06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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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의원직 제명 후 일어난 부마항쟁…박정희 정권 종말 불러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YH무역 여공들을 보호하고 있는 YS의 모습. ⓒ뉴시스
YH무역 여공들과 인사하고 있는 YS의 모습. ⓒ뉴시스

“1979년 박정희 정권의 몰락은 고집스러운 정치권력이 야당 총재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하면서 촉발됐다. 문재인 정권은 눈엣가시인 윤석열 검찰총장을 찍어내려 혈안이 돼 있다. ‘윤석열 찍어내기’의 후폭풍은 ‘김영삼 찍어내기’ 후폭풍의 데자뷔가 될 수 있음을 현 정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중진회의 연석회의. 충남 공주시부여군청양군을 지역구로 하는 5선 정진석 의원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둘러싼 현 정국을 1979년 김영삼(YS) 당시 신민당 총재의 상황에 비유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YS의 총재직을 박탈하고 의원직에서 제명한 것이 정권 몰락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윤석열 찍어내기’도 비슷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겁니다.

같은 날, YS의 차남인 김현철 동국대 석좌교수 역시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과거 18년 유신 철권통치가 김영삼 총재를 우격다짐으로 국회에서 제명했다가 끝장난 것 기억하나”라며 “만약 당신이 윤 총장을 해임한다면 당신 뜻과는 달리 상상할 수 없이 불행하고 비참한 미래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각오하라”고 비판했습니다. 정 의원의 말과 비슷한 맥락인데요. 그렇다면 1979년 YS의 의원직 제명은 어떤 사건이었기에 현 정국과 비교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걸까요.

1979년 YS 제명은 YH무역 사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알려진 대로, 박정희 정권에게 YS는 ‘눈엣가시’였습니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정권 하에서, 시쳇말로 ‘쫄지 않고’ 강경 투쟁을 벌였던 사람이 바로 YS였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YH무역 사건이었습니다.

YH무역은 1966년 창업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1970년 기준 수출 순위 15위에 오를 만큼 급성장한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가발 산업이 후퇴하며 경영 상태가 나빠지자, YH무역은 공장이전·위장휴업 등 불법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대거 해고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경영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YH무역은 1979년 경영상의 어려움과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 등을 이유로 일방적인 폐업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러자 회사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인 YH무역 노동자들은 YS가 총재로 있던 신민당에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기로 했습니다.

마포구에 있는 신민당사 터에는 이 자리의 역사적 의미를 말해주는 작은 삼각형 동판이 설치돼 있다. ⓒ시사오늘
마포구에 있는 신민당사 터에는 이 자리의 역사적 의미를 말해주는 작은 삼각형 동판이 설치돼 있다. ⓒ시사오늘

이에 YS는 당사를 집회 장소로 내주고, 당직자들을 동원해 경찰 접근을 차단했습니다. 또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노동청에 연락을 취해 사건 해결을 위한 협상 테이블 마련에도 나섰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1000여 명의 경찰 병력을 동원, YH무역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해버립니다. 앞을 막아서는 신민당원들과 노동자들은 경찰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했고, 이 과정에서 김경숙 씨가 사망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러자 YS는 김경숙 씨 사인 규명, 책임자 문책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YS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끊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다음은 당시 <조선일보>가 입수해 번역한 <뉴욕타임스> 기사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국 정부에 대한 그의 거리낌 없는 반대로 인해 체포 직전에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한국 야당의 지도자는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야당 지도자 김영삼 씨는 그의 집에서 가진 회견에서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의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중략)

구속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김 씨는 계속 입을 다물지 않고 있다. 그는 지난 6월 말 카터 대통령의 방한에 대해 언급, “카터는 방한으로 해서 박 대통령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카터는 박 대통령의 위신을 고양시켜 줌으로써 박 대통령에게 반대 세력을 말살시키는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나는 지금도 카터의 방한을 생각하면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했다. (중략)

정부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김 씨를 구속하자니 그것은 김 씨를 대중의 영웅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의미에서 자괴적이다. 그러나 구속을 하면 정부에 대한 그의 계속적인 공개적 공박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후략)

1979년 9월 20일자 <조선일보> ‘김 총재 NYT 회견 내용’

박정희 정권은 분노했습니다. 가뜩이나 ‘꼴 보기 싫던’ YS가 YH무역 노동자들을 보호하며 정부와 각을 세운 데 이어 외신에 대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끊으라”고 요구하고 나섰으니까요. 결국 박정희 정권은 YS를 의원직에서 제명시키기로 마음먹습니다. 징계 사유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주권을 모독해 국회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4일.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는 국회에서 YS의 의원직 박탈을 단독 의결합니다.

하지만 YS 의원 제명은 PK(부산·경남) 지역 국회의원들과 국민들의 민심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이에 10월 15일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부터는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주도한 가운데 대대적인 반정부시위가 전개됐습니다. 18일과 19일에는 마산과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습니다. 이른바 ‘부마항쟁’이 일어난 겁니다.

놀란 정부가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20일 정오 마산·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는 등 강경 진압에 나서면서 시위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둡니다. YS에 대한 무리한 ‘찍어내기’가 정권의 종말로 이어진 셈입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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