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이 지난 17일 밤 향년 7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홍 전 부의장은 지난 2018년 9월부터 폐렴 등 입원치료를 해오다 숙환으로 작고했다. <시사오늘> DB를 활용, 역사 속으로 기억될 정치인 홍사덕 전 부의장의 정치입문부터 은퇴까지 그때 그 순간을 되짚어본다.
1. 정치입문과 신민당 돌풍에 뛰어들기까지
1943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난 홍 전 부의장은 영주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범대 부설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외교학과를 입학했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 정치인이다. 정치 입문 계기는 DR(김덕룡)의 추천을 받으면서다.
일화에 대해 <시사오늘>DB를 옮겨본다.
“홍사덕의 정치 시작은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1대 국회를 통해서다. 홍사덕의 정치입문 과정을 도왔던 인물은 김덕룡과 김정남. 당시 야당(민한당)의 공천을 관장했던 인물은 신상우. 민한당은 당시 여당이던 ‘민정당 2중대’소리를 들었지만 신상우는 야성을 강화하기 위해 당시 재야투사로 알려진 6·3 세대 김정남에게 공천자 천거를 부탁했다. 김정남이 다시 김덕룡에게 “좋은 사람이 없냐"고 부탁하자 김덕룡은 서울대 문리대 동기인 홍사덕과 김도현을 추천했다.”
- <시사오늘> 2015년 3월 5일자 ’정치풍운아 홍사덕, '역사속으로'…리퍼트 피습에 사의‘ 중,
관련 링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025이하 <시사오늘> DB 중-
81년 11대 총선에서 고향인 경북영주에 출마해 당선된다. 하지만 민한당이 관제야당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직선제 쟁취의 도화선이 돼줬던 신민당에 합류한다. 신민당은 반독재투쟁을 위한 정치제도권의 요람과도 같았다. YS는 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민주산악회를 조직했다. 가택연금과 정치적 탄압을 받는 중에도 산행을 명목으로 민주화운동 조직을 넓혀나갔다. 정권의 규제로 그마저도 어렵게 되자 80년 광주 5‧18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또 23일의 사투 끝에 정치활동 피규제자 해금 조치 등을 얻어내기에 이른다. 정치인들이 다시 모일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고, 민추협 결성부터 신민당 창당은 그 결과물이었다.
민한당에서도 선명 야당에 뛰어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홍 전 부의장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김현규 서석재 박관용 등과 함께 84년 12월 민한당을 탈당한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행보에 안기부는 정치적 탄압을 가해왔고 홍 전 부의장은 피신할 수 있었어도 결기있게 피신하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민한당 현역의원들이 집당 탈당하자 이를 감지하지 못했던 안기부는 발칵 뒤집혔다. 1984년 12월 20일. 탈당주역 김현규가 안기부에 연행됐고 이 같은 사실을 모른 채 집으로 귀가하던 홍사덕은 “김현규가 안기부에 연행됐으니 피신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홍사덕은 피신하지 않았다. 김현규 때문이었다. 김현규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집에서 내복을 껴입는 등 단단히 준비를 한 그는 안기부에 끌려가 3일간 철야조사를 받았다.“ - <시사오늘> DB 중-
2. 이민우 구상 기획자 풍문… 왜?
신민당 돌풍은 거셌고, 홍 전 부의장도 재선에 성공했다. 86년에는 신민당 대변인을 지냈다. 촌철살인 논평으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이민우 총재 측근이다. ‘이민우 구상’의 아이디어를 낸 인물로 지목되기도 한다. 당시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민정당은 의원내각제를 고리로 정권 연장을 꾀하고 있어 경색됐을 때다. 여당과의 협상 과정에서 이민우 총재는 7개항의 민주화 조치를 조건부로 내각제를 용인하는 타협안을 구상했다. 이는 직선제 쟁취를 촉구해온 YS와 DJ(김대중)의 반발로 이어졌다. 신민당이 쪼개지는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야당 대표 정치인이었던 유진산 전 총재의 아들 유한열 전 의원은 “홍사덕 장난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보스 정치 시대를 지양해온 것과 연관이 있다는 분석이다.
“유한열 전 의원은 “다 홍사덕 장난이었다”고 회고했고,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YS 최측근인 A씨도 지난해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평소 홍사덕이 제왕적 정치인인 YS와 DJ가 문제라고 얘기하고 다녔고, 나는 그것을 YS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이민우 파동이 일어나자 YS는 ‘홍사덕 장난이군’이라고 했던 적이 기억난다”고 전했다." -<시사오늘>DB 중-
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홍 전 부의장은 박찬종‧이철‧조순형 등과 함께 단일화를 촉구하며 제3지대의 무소속으로 남는다. 하지만 DJ가 YS와의 약속을 파기하면서 대선은 4자 대결로 치러졌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다. 이 때문에 홍 전 부의장 역시 노 정권으로부터 사찰 대상이 되기도 한다. 13대 총선에서는 무소속으로 강남을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90년 YS가 삼당합당을 하자, 이에 반대한 노무현‧박찬종‧이부영‧이기택‧유인태‧김정길 등과 함께 작은 민주당(꼬마민주당으로도 불림)에 합류했다. 14대 3월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강남을에 재도전해 당선됐다. 14대 대선에서는 DJ 후보 캠프 대변인을 맡았다. 이어 15대 대선을 앞두고는 정계 은퇴한 DJ가 돌아와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96년 무소속으로 남아 강남을 재선에 당선되는 저력을 보인다. 정치력 뿐 아니라 저서 <지금, 잠이 옵니까>를 집필 할 당시 5일 만에 원고지용지 1100매를 다 썼다는 일화 또한 비상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들 수 있을 듯하다.
3. YS‧DJ 민주계열에서 친박 좌장으로
양김의 보스정치를 넘어서야한다는 정치철학으로 거리를 둬올 때도 많았지만 YS와 DJ는 그를 기용할 만큼 정치력이 좋았다는 평가다. 앞서 지난 14대 대선 때 DJ가 대변인으로 가까이 뒀다면 97년 집권 5년차의 YS는 정무장관으로 발탁해 내각에 기용한 것이다. DJ정부 당시 장기표 선생과 함께 보스정치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모임도 열었다. 그렇지만 얼마 안 돼 2000년 1월 27일 한나라당에 입당해 역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그해 4월 13일 치러진 16대 총선에서 박근혜 당시 부총재와 한나라당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은 것을 계기로 친박(박근혜) 좌장으로 성장했다. 비례대표로 출마해 당선됐고, 전반기 국회부의장에 올랐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가결되면서 5월 치러진 17대 총선은 한나라당에 대한 역풍이 강하게 불었다. 원내총무로 탄핵에 적극 나섰던 홍 전 부의장은 경기고양시 일산갑에 출마했지만 열린우리당 소속의 한명숙 후보에 석패하고 만다. 이후 출마하려던 경기 광주 재보궐 지역이 다른 인물로 전략공천 되자 탈당해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다 떨어지고 2007년 이명박계의 반대로 복당이 불허되는 등 고비가 잇따랐다.
2008년 4월 18대 총선 때는 전화위복을 맞는다. '친박연대'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아 당시 선거의 여왕으로 불린 ‘박근혜 효과’와 시너지를 내며 영남권에서 22석을 당선시켰다. 홍 전 부의장도 대구서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를 계기로 한나라당에 복당했고, 도합 6선의 화려한 중진 정치인이었지만 정계 은퇴를 앞두고서 보면 운이 따라준 편은 아니었다. 2012년 4월 19대 총선 당시 서울 종로에 출마했지만 민주통합당 정세균 후보에 패했다. 정치자금법 위반 논란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2012년 대선 기간에는 민주계열 당시를 부정하는 듯 박정희 유신 정권을 미화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되면서는 민화협 상임의장을 맡았지만 리퍼트 주한미대사 피습 사건으로 사의를 표하고 물러났다. 박근혜 탄핵 국면을 지나 장미 대선을 거치면서 정치적 은퇴의 길을 밟았다.
일부 비판도 받았지만 강단 있는 개혁주의적 모습과 정치력을 갖춘 정치인으로 명성과 성공, 부침을 겪은 또 한 명의 정치풍운아이자 현실 감각을 갖춘 따스한 정치인으로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미래통합당 정진석 의원은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회부의장 홍사덕 의원은 본회의장 의장석에서 의원들을 소개할 때 늘 ‘ㅇㅇ지역의 자랑스런 대변자 ㅇㅇㅇ의원 나와주십시요’라고 말했다. 첨에는 어색하게 들렸지만 점차 정겹고 친근하게 느껴졌다”며 “댄디하고 잘생긴,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겸비했던 멋진 정치인 홍사덕선배의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기도한다”고 애도했다. 같은 당 서병수 의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2002년도 제가 처음 국회의원이 됐을 때부터 제게 따뜻하게 정을 나누어 주셨고 정치선배로서 지도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정치인으로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사명감, 성실함과 진정성을 저에게 가르쳐주셨던 분”이라며 존경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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