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정치] 청의 몰락과 文정부 對中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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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정치] 청의 몰락과 文정부 對中 외교
  • 윤명철 기자
  • 승인 2020.02.02 2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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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조선이 청의 조공국으로 겪은 치욕의 역사를 되새겨 봐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문재인 정부는 조선이 청의 조공국으로 겪은 치욕의 역사를 되새겨 봐야 한다. 사진제공=뉴시스
문재인 정부는 조선이 청의 조공국으로 겪은 치욕의 역사를 되새겨 봐야 한다. 사진제공=뉴시스

19세기는 청나라에게 있어서는 악몽이 시작된 시기였다. 차와 비단, 도자기 등 청나라의 명품은 유럽의 은을 싹쓸이했다. 청의 무역 독점에 불만을 품은 영국은 아편을 밀수출해 청과의 무역 역조를 역전시켰다.

하지만 청은 영국의 국력을 과소평가했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제1~2차 아편전쟁이 터졌다. 청의 허약한 국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서구 열강은 청을 잠자는 사자라고 두려워했지만 실상은 병든 돼지였다. 청은 중화사상을 버리지 않고 서구 과학기술만 수용하겠다는 오만한 자세를 버리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청과 달랐다.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 개항을 한 치욕을 잊지 않고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서구를 배우고자 탈아입구를 국시로 삼아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을 유럽과 미국으로 파견해 일본의 미래를 설계했다.

일본의 오랜 숙원은 대륙 진출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켰던 임진-정유 전쟁도 그 일환이었다. 비록 이순신 장군과 의병 그리고 조명연합군에 의해 그 꿈은 실패로 귀결됐지만 일본은 절대로 이 꿈을 잊은 적이 없었다.

특히 청이 서양의 침략과 태평천국의 난 등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조공국 관리에 소홀한 틈을 놓치지 않고 서서히 청의 목을 조여갔다. 당시 청의 3대 조공국은 조선, 베트남, 류큐였다. 일본의 사쓰마 번은 이미 1609년에 류큐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조공국으로 삼았다. 하지만 청은 이를 알지 못했다. 자신의 턱 밑에 비수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오만과 방심으로 일관했다.

일본의 다음 목표는 타이완이 됐다. 1871년 류큐인 배가 난파를 당해 타이완에 표류했는데 타이완인들은 이를 침략으로 규정해 류큐인 전원을 살해한 사건이 터졌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삼아 타이완 응징을 천명했고, 청은 일본의 행위를 내정간섭이라며 반격에 나섰다.

일본은 청과의 지루한 협상을 전쟁으로 해결코자 했다. 1874년 일본은 타이완을 침공했다. 중화사상에 빠진 청은 일본과의 결전을 원했으나 힘이 없었다. 타이완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이제 조선과 베트남이 남았다. 당시 조선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골육상쟁으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등 치열한 내분은 조선을 일본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만들었다.

청도 조선을 자신의 조공국으로 남길 원했지만 청일전쟁 패배로 그 꿈은 꿈으로 끝났다. 후일 베트남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청은 멸망했고, 새로이 탄생한 중화민국도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21세기가 되자 중국은 미국에 버금가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중국의 도전을 제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았다. 중국도 패권국 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발버둥치고 있다. 일단 옛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한다. 미국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베트남과 한국은 미국 영향권에 있다. 류큐는 이미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어, 제2의 중일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한 회복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중국으로선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 옛 영광 회복의 호기를 맞이했다. 문재인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치중하고 있다. 사드 보복과 우한 패렴 관련 교민 수송기 지연 논란 등 중국의 홀대에도 이렇다 할 항의를 했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한 실정이다.

외교는 균형의 정치다. 한쪽에 치우친 저자세 외교는 국가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자충수다. 조선이 청의 조공국으로 겪은 치욕의 역사를 되새겨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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