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당 소멸하면 安 설 곳 없을 것 우려해…”
“편 가르는 것 아니고, 유승민도 역할도 있을 것”
“DJ 동교동계 막내이자 김한길계, 배신 않겠다”
“어게인 13대 총선…제3지대 길 반드시 열린다”
내년 총선, 안양동안을 준비…“신성고등학교 출신”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안양의 신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호남 출신이면서 안양을 제2의 고향으로 둔 바른미래당 임재훈 사무총장의 자부심은 컸다. 내년 총선도 안양동안구을에 나갈 예정이다. 국회 교육위원회 간사답게 안양의 교육계 현안 해결에 팔 걷어붙일 계획이란다.
비례대표 초선이지만, 크고 작은 선거 58회가 말해주듯 정치 경력만 25년째다. 사실상의 동교동계 막내로 DJ(김대중) 밑에서 정치를 배웠다. 나머지 정치 역정은 뼛속 깊은 ‘김한길계’임을 자임한다. ‘친 손학규 당권파’로 ‘제3의 길은 있다’는 쪽에 정치적 명운을 걸고 있다.
DJ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공채 1기 멤버로 정치에 입문한 그는 노무현 16대 대통령인수위 행정관을 지냈다. 민주당 부대변인, 박원순 서울시장 캠프 정책특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특보단장 등을 거쳤다. 바른미래당에서는 오세정 서울대총장의 의원직 사퇴로 지난해 비례대표를 승계받았다. 김관영 원내대표 비서실장, 사법개혁특위 위원 등을 역임, 현재는 사무총장, 교육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다.
임 총장은 정계개편의 승부사 ‘김한길계’답게 전략에 능한 모습이다. 참신한데 노련하고, 솔직한데 빈틈은 없다. 붙임성이 좋아, 누구와도 쉽게 어울릴 것 같은 스킨십에 능한 정치인인 듯했다. 외모도 <미스터 빈>의 영국의 코미디언을 닮아 친숙하고 정감 간다. 제일 행복해 할때는 그때였다. 입양한 탈북민 자녀 결혼시킬 때, 그리고 효녀 효자라고 자랑할 때. 또 힘줘 말할 때는 이때였다. “정치 안 하면 안 했지, 김한길 전 대표 배신 않는다.” 플러스알파로 인상적인 것은 그거였다. 전화번호 300개 외기, 25개의 수첩 야사, 오는 문자 잊지 않고 꼬박꼬박 답하기 등이다.
임 사무총장과 만난 것은 지난 11일 여의도 의원회관. 도중에 귀가 번쩍 뜨인 발언이 있었다. ‘안철수 전 대표’의 연착륙 등 바른미래당의 미래에 관한 것들. 하지만 그 얘기는 모두 인터뷰 저 말미에 있다.
DJ 동교동계의 사실상 막내로 불려
“이희호 여사…다른 영부인과 달랐다”
이날은 故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전날 별세해 사회장이 엄수되며 일제히 각계의 애도가 잇따른 날이었다. 임 의원도 문상을 마치고 의원실로 막 돌아온 길이었다. 김 전 대통령 부부와,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과 인연이 깊은 그였다. 표정 위로 남다른 쓸쓸함이 어렸다.
- 김대중 대통령의 동교동계 계보를 잇는 사실상의 막내 정치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이희호 여사의 소천이 안타깝고 슬플 것 같다.
“공식적으로 정치에 입문한 것은 새정치국민회 창당 때인 1995년 10월 2일이다. 창당 공채 1기로 첫 출근했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대통령 내외분을 뵙게 된 것은 그보다 한참 몇 해 전이었다. 이렇게 문상을 다녀와 반추해보니, 옛날 생각도 많이 나고, 돌아가신 김대중 선생님도 많이 생각났다. 이제는 이희호 여사까지 떠나셨다. 두 분 모두 떠나셨구나, 생각 들며 마음이 많이 아팠다.”
- 이희호 여사는 어떤 분으로 기억되나.
“이희호 여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영부인이 아니었다. 김대중 선생님의 영원한 정치적 동반자였다. 험한 야당 생활 할때도, 집권 후에도, 임기 끝나고 자연인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정치적 뜻을 함께하며 동고동락했다. 김 선생님이 할 수 없는 부분을 여사님께서 채워주고 조력해줬다. 그것이 다른 영부인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또 그분은 오랫동안 교회 장로님이셨다. 신앙인으로서, 또 민주화 운동가로서 인간애와 자애로움도 남다르셨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어머님처럼 누님 같은 따스함으로 대하던 분이셨다.”
임 사무총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선생님'이라 불렀는데, 꽤 인상적이었다.
“DJ, 민주 진영의 유일한 지도자라 여겨”
“동교동계, 누란지위 당 살리라며 격려”
- 영국 유학 중 김홍업 전 의원을 통해 추천받아 DJ와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 선생님이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82년도인가, 미국으로 망명을 하신 적이 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내외분을 잘 뒷바라지해준 분들이 많이 있다. 그 중 한 분이 나와 잘 알고 있는 분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분하고 김 선생님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하고도 형제 같은 관계였다. 마침 영국에서 유학중이던 내가 워낙에 김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는 걸 아는지라, ‘이런 훌륭한 청년이 있다’ ‘김대중 선생님을 너무 좋아한다’ ‘성실하다’며 나를 추천해줬다. 그 뒤 김홍업 전 의원이 나를 보고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자연스레 김대중 선생님도 뵙게 되고 이희호 여사님도 뵙게 됐다. 처음엔 비공식적으로 아태재단에서부터 일을 했다. 새정치국민회의가 만들어지고 정치적으로 당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대통령을 모시게 됐다.”
- DJ 밑에서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김대중 선생님이야말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민주 진영의 유일한 지도자였다. 당신의 인생역정을 보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위해 끝까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분이셨다. 이분한테 승부를 걸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
- 이번 장례식 때 김홍업 전 의원과도 만나고, 동교동계 인사들과도 많이 만났겠다.
“김홍업 전 의원은 정말 정이 많다. 눈물이 많다. 김대중 선생님도 과격하고 강경한 분이라는 대중적 인식이 있지 않나. 하지만 실제로 접하면 눈물이 많은 분이듯 이분도 그렇다. 알려진 것과 달리 굉장히 따스한 분이다. 사람을 한번 신뢰하면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분이다. 오늘 거의 동교동계라고 불리는 분들은 거의 다 뵀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들이다. 이번에도 많은 선배님들이 격려해주시고 보듬어주셨다. 임재훈의 특유의 돌파력으로 누란지위(累卵之危)에 있는 당을 잘 살려보라는 취지로 많은 격려를 해주셨다.”
“비례대표 승계, 탈북민 딸 때문에 더욱 기뻤다
탈북민 정착 돕는 것이 작은 통일 이루는 것”
생각해보면 드라마틱 하다. 임 의원은 지난 2016년 20대 총선 당시 국민의당 비례대표 14번이었다. 13번까지 됐으니, 간발의 차로 떨어진 거였다. 그런데 지난해 9월 서울대 총장을 희망한 오세정 전 의원의 의원직 사퇴로 비례대표직을 승계하게 된다. 정치 입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25년 만에 금배지를 단 셈이었다. 절망과 희망을 오간 측면에서 인생의 묘미를 느꼈을 것도 같았다.
- 2016년 아슬아슬하게 비례대표직에서 떨어졌다가 2년 뒤 비례대표 직을 승계 받게 됐다. 사람 일 진짜 모르는구나 싶을 것 같다.
“3년 전 2016년 4월 16일, 새벽 5시까지는 당선이 됐던 것 같다. 그 시각만 해도 정의당 윤소하 의원은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날을 새며 공중파 3사와 YTN 등을 오갔다. 정당 득표율 저울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불현 듯 깨어나 보니 아침 8시였다. 최종 개표 결과를 확인했다. 윤 의원이 붙고 나는 떨어져 있더라. 아쉬운 표차였다. 6000여 표만 우리당으로 정당득표율을 견인해왔으면 내가 되는 거였다. 내가 부족해서 안 된 것도 있지만 그 상황이 너무 아쉬운 거다. 당선된 분에 대해 축하하는 마음도 있지만 내가 안 된 상황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며칠간 바깥으로 못 나가겠더라. 그래도 일주일 뒤에는 원기를 회복했다. 다시금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오세정 당시 비례대표 의원께서 서울대 총장 출마를 하면서 의원직을 그만둔 거다. 기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 혹시 어떤 꿈이라도 꿨나.
“그런 적은 없는 데 이런 적은 있다. 작년 9월 15일은 우리 집안에 상견례가 있던 날이었다. 내가 삼남매를 뒀다. 우리 큰 딸이 서른두 살, 둘째 아들이 서른 살, 막내아들이 스물네 살이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막내는 배 아파서 났고, 첫째와 둘째는 입양을 했다. 사선을 넘어온 탈북민 아이들이다. 둘이 친남매 지간으로 얼마나 반듯한지 모른다. 그날은 결혼을 앞둔 딸과 우리 가족, 사위 쪽과 만나는 자리였다. 사위도 탈북민 출신의 건장한 청년이다.
막내아들은 군 제대 후 미국에서 약대를 다니는 중이어서 참석을 못했다. 함께 식사를 하는 데 가슴이 벅찼다. 어렵사리 한국에 와 잘 정착해 안정적인 직장 갖고, 견실한 사회인이 됐다. 어엿한 가정을 꾸리는 모습까지, 너무도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상견례를 마치고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 우리 딸 결혼식 날짜가 11월 24일이었는데, 아빠가 국회의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국회의원이 돼 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면 어떨까. 자랑하려는 것도, 내세우려는 것도 아니었다. 아빠로서 딸을 생각하며 절로 그런 마음이 간절히 드는 거였다. 그런데 상견례가 있던 날로부터 6일 후인가. 오세정 의원이 전격 사퇴를 한 거였다. 그때가 9월 21일 금요일이었다.”
- 귀띔을 받거나 한 것은 전혀 없었나.
“전혀 몰랐다. 사퇴하기 2시간 전에 알았다. 승계를 받는다는 기쁨도 기쁨이었지만, 우리 딸한테 맘 적으로 약속했던 것들이 실천이 돼가고 있구나, 지켜져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겠더라.”
- 사실 보통 일은 아닌 듯하다. 어떤 계기로 한 가족이 된 건가.
“2012년이었던 것 같다.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아이들이 있다고 명단만 받았다. 딱한 상황에 처했다는 동정보다는 자꾸만 애들 이름을 떠올려보게 되고 마음이 갔다. 6개월 정도를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운명적인 인연이랄까. 우리 집사람과 내가 어느 모임에 갔다가, 우리 딸을 만나게 된 거다. 서로가 얼굴도 모르는데, ‘얘가 얘구나. 내 딸이다’ 집사람도 나도, 자동반사적으로 알아차렸다. 신기한 게 우리 딸도 그랬다더라. ‘저 두 분이 내 아빠 엄마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정말 보자마자 가족이 된 거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이들이 얼마나 착하고 엄마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한지 모른다. 간혹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오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오히려 나는 이 친구들 때문에 더 행복해졌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맙다.”
- 자녀들 때문이라도 남한 내 탈북민 정착 문제에 관심이 많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 탈북민이 2018년 기준 3만 2476명이다. 올해까지 하면 3만 5000명 정도 될 거다. 그중 정착을 잘해 성공한 직업군을 갖는 경우는 200명도 안 된다. 정착을 못한 채 방황하는 분들도 많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다문화 가정보다 더 차별받고 소외되고 있다. 나는 탈북민이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잘 자리 잡는 것이 곧 작은 통일을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발전시켜야할 남북 관계의 상당한 마중물이 돼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탈북민 공동체를 잘 보듬어줄 의무가 있다고 본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선입견 없이 똑같이 대하면 된다. 나머지 출발선을 보장해주는 일은 국가가 해주면 된다.”
“나는 김한길 사람, 대단한 전략가
서늘한 바람 불면 복귀할 것 기대
역대 선거 보면, 3지대 승산 있었다”
지난 5월 20일 손학규 대표는 당 사무총장직에는 임 의원을, 정책위의장에는 채이배 의원을, 수석대변인에는 최도자 의원을 각각 임명했다. 모두 당권파이며, 친 손학규 인사들로 꼽히고 있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임 사무총장의 발언이다. 그는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균형감 있는 당무집행을 하겠다고 약속한 한편, 자신은 “뼛속 깊이 김한길 전 대표의 측근”임을 강조한 바 있다.
- ‘김한길 계’임을 누차 언급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뼛속 깊이 김한길계다. 사실 오늘(11일)도 뵀다.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처음 뵌 건 95년이었다. 우리에게는 계보 정치가 있었는데, 김대중이란 큰 태산이 있었다면, 그 밑에는 작은 수장들이 있었다. 그중 한분이 김한길 (전)대표였다. 새정치국민회의 때부터 국민의당, 현 바른미래당까지 분당과 창당 과정 속에서 행보를 같이했다. 때때로 길을 달리한 적도 있다. 노무현 정부의 열린우리당 때가 그랬다. 대부분의 동교동계는 민주당에 잔류했고, 나도 남았다. 다시 김 전 대표를 뵙게 된 게 2007년도 말에서 2008년도 초였다. 그분은 18대 총선에 불출마하면서 4년 동안의 공백기를 가졌다. 이후 19대 총선에서 당선된 것을 계기로 곧바로 전당대회에 출마했다. 그때부터 나도 합류했고, 캠프를 총괄하게 됐다.”
- 김 전 대표는 어떤 수장인가.
“리더의 덕목은 신뢰다. 김 (전)대표는 한번 사람을 믿으면 무한정 믿는다. 전폭적 신뢰를 가한다. 인간관계란 게 그렇더라. 나한테 신뢰를 주는 분께 무한충성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는 정치 안 하면 안 했지, 내가 모셨던 분들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분들 마음 아프게 할 생각 없다. 김 (전)대표께도 그랬다. “대표님 나 정치 안 하면 안 했지, 대표님 마음 아프게 하거나 변심할 생각 없습니다.’내 마음을 김 (전)대표도 알 것이다. 우리는 눈빛으로 안다.”
- 남들이 탈당할 때 DJ 민주당에 잔류하기도 했고, 반대로 김 전 대표와 함께 탈당해 창당과 분당 합당을 거치기도 했다. 스스로 볼 때 정치노선은 어떻게 되나.
“중도개혁이다.”
- 중도 정당, 참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굳이 표현하자면 중간지대가 열려야 한다. 제3지대, 제3의 길이 열려야 한다. 거대 양당(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의 적대적 공생관계는 피폐해지는 길이다. 국민의 선택의 폭이 넓어져야 한다. 진보와 보수 가르마 할 게 아니라, 국민의 또 다른 니즈(욕구)를 반영해야 한다.”
- 여전히 승산이 있다고 보는 건가.
“물론이다. 중도개혁 지대인 제3의길, 중간지대, 중원의 길이 반드시 총선에서 열린다고 생각한다. 이는 역대 선거를 상기해 봐도 짐작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과거 11, 12대 때는 국회의원 선거가 중선거제였다. 그때는 당연히 다당제였다. 민정당, 민한당, 민권당, 국민당이 있었다. 소선거구제로 변한 것은 1988년도 13대 총선부터다. 이때는 민정당,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공화당 4당 체제였다. 실질적으로 14대 선거부터는 양당제로 회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지난번 선거까지 보면, 꼭 제3지대의 당이 전국적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교섭단체 이상의 의석을 확보한 경우도 많았다. 14대 총선 때는 정주영 당시 통일국민당이, 15대는 JP(김종필)가 이끄는 자민련이 그랬다. 가장 최근에는 20대 총선에서 ‘안철수 김한길 천정배’등의 국민의당이 38석이라는 놀라운 약진을 기록했다. 이렇듯 제3당은 리더만 바뀔 뿐 그 세력은 면면이 이어져 왔다. 지금 당장 보면 암울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선거지만, 제3의 길은 있다. 민주당과 한국당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메워줄 중간지대가 반드시 열릴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 그 같은 자신감의 이유는.
“정당에 들어온 뒤로 총 58회의 크고 작은 선거에 임했다. 대선, 총선, 지방선거, 재보선 등 최근 4‧3 창원성산보궐 선거까지 합하면 모두 58회 경험이다. 승패로 보면 마흔 번 정도를 졌다. 대부분 졌다. 그러나 진 것도 교훈이다. 경험을 통해 얻은 선거 통계, 그 체감으로 옛날 선거를 복기하면 제3지대는 반드시 있다는 생각이다.”
- 58번의 선거 경험, 만만치 않은 경력이다. 근 몇 년 내 선거 중 여야 통틀어 가장 좋았던 전략과 정치인을 꼽는다면.
“내가 ‘김한길 마니아’라서가 아니다. 그분이야말로 사실은 대단한 전략가이다.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후 당을 창당하고 해체하며, 유의미하게 선거를 이끌어온 분이 김 (전)대표다. 속된 말로 고기를 먹어본 분이다. 꽃등심 맛을 안다. 어떻게 하면 당을 잘 재편해 선거를 앞두고 친화적인 당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지, 선거에 승부를 걸 수 있는 전략이 뭔지를 잘 아는 분이다.”
- 처음 바른미래당 혁신위원장 카드로 김한길 전 대표 복귀도 거론됐다가, 좀 더 아껴두는 카드가 될 거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던데.
“언제고 역할이 분명히 있을 거다. 반드시 있을 거다. 지금은 우리 당이 난감한 상황이지만, 제3지대가 열리게 되면 능동적으로 개척할 분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이 나는 김 (전)대표라고 생각한다. 20대 총선 불출마 이후 2년 전 발병된 폐암으로 어려운 고비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건강이 거의 회복됐다.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건강 회복과 체력 회복은 또 다르다. 체력적 부분은 회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 이런 일로 정치 현장에서 약간 후퇴해 있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과 대화도 하고, 준비 중에 계시다.”
- 복귀 시기는 언제쯤일 것으로 보나.
“시기는 모르겠다. 그러나 여름까진 아닌 것 같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 그럼 손 대표랑 바통 터치가 되는 건가, 비상대책위원장 등이 돼서 나타나는 건가?
“그런 의미는 아니다. 손 대표의 역할이 있고 김 (전)대표의 역할이 있다. 유승민 (전)대표의 역할이 있고 안철수 (전)대표의 역할이 있다고 본다. 그때 되면 당과 당원들이 김한길 대표의 역할을 찾아서 부르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럴 경우에 김 (전)대표가 응해야 한다고 본다.”
“손학규 대표, 안철수 자리매김 되길 원해
제3당 소멸하면 안철수 설 곳 없다고 봐…
편 가르자는 것은 아니고, 유승민도 중요”
바른미래당의 내홍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4‧3 창원성산 재보선 이후 손학규 대표의 퇴진을 놓고 유승민 바른정당계+안철수 국민의당계 vs 손학규 당권파+국민의당 호남계 간 파열음은 거셌다. 지난 패스트 트랙 과정에서 사보임 문제 등 절차에 있어 매끄럽지 못했다, 구태를 보였다는 일갈도 만만치 않게 들려왔다. 국회법 위반 여부 공방을 비롯해 ‘손학규 김관영’ 등 지도부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컸다.
현재 보면 양측은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잠시 최고위를 거부해왔던 하태경 이준석 권은희 김수민 최고위원 등은 전열을 가다듬고 복귀해 당내 노선 투쟁에 적극 나서고 있는 중이다. 당권파는 오신환 원내대표 이후 기울어진 판세를 뒤집고자 지명직 당직자 인선 등 당권파 몸집 부풀리기에 주력해왔다. 양쪽 모두 버티고 있는 와중으로 손 대표 퇴진을 둘러싸고 연동형 비례대표제 갈등, 사보임(사보임) 갈등 등에 이어 앞으로도 혁신위 구성 등을 놓고 치열한 노선 투쟁을 앞두고 있다.
- 당 분란을 두고 손 대표의 책임론 논란은 여전하다. 손 대표가 뭘 잘못했냐며 옹호하는 쪽도 많고, 욕심이 지나치다, 책임 정치의 자세가 아니다 등 비난하는 시각도 많다.
“나는 손학규 대표의 철학, 세 가지에 대해서는 동의를 많이 한다. 김한길 (전)대표도 동의를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어떤 세 가지의 철학을 말하나.
“이분은 중도개혁주의자다. 중간지대가 열려야 한다는 정치적 소신, 철학이 분명하다. 두 번째도 같은 맥락인데, 제3지대에 대해 강한 애착과 비전을 갖고 있다. 세 번째는 약간 결이 다른 얘기일 수 있다. 다름 아닌 안철수 전 대표의 연착륙에 대해 강한 애정과 의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손 대표는 안 전 대표가 연착륙해 우리 정치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손 대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정답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이를 하지 않고서는 적대적 양당의 공생관계에 의해 제3당이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한 것 같다. 또 그래야만 안 전 대표가 다시 국민적 부름에 힘입어 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 유승민 전 대표에 대해서는?
“편 가르자는 게 아니라, 유승민 전 대표도 중요한 구성원이다. 우리 당의 소중하고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자산이다. 유 전 대표를 제외하자는 게 아니라, 중간지대에서 같이 경쟁하자는 거다. 그러려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답이라고 판단을 한 거다. 사실 손 대표는 제1야당 대표를 두 번이나 한 분이다. 안 할 것 없이 다 한 분인데, 무슨 욕심이 있겠나. 욕심이 없는 걸 알기 때문에 나 역시 손 대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족하지만 도와드리려는 거다.”
“손 대표 추석 지지율은 상승 추이를 봐야
주대환 혁신위원장 후보? 3지대 가치 뚜렷한 분
한두 달 내 혁신위 안, 보따리 쌀 사람 생길 것”
- 손 대표는 추석 때까지 지지율 10%가 못 되면 물러난다고 했다.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 당은 4‧3 재보선 이후 두 달 가까이 오도록 거의 매일 싸웠다. 어느 기자분이 자조 섞인 말씀을 하시더라. 한 달 전 바른미래당 기사나 오늘 기사나 똑같다는 거다. 날짜만 다를 뿐, 제목만 바꾸면 된다는 얘기였다. 그만큼 대표 입장으로서는 일을 하고 싶은데, 일을 못하고 만 시간들이었다. 지지율 10%라는 것도 그렇다. 상징적으로 10%로인 것이지, 8~9월이든 계속 상승추세에 있다면 또 달리 봐야 한다. 사실상 9.9%인데 물러나겠나. 그건 아니라고 본다. 현재는 내부 갈등과 대립으로 4~6%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당 체제 정비가 잘 마무리 돼 탄력 받아 일을 하고, 비전을 제시한다면, 박스권 안의 지지율에서 벗어나 오를 수 있는 계기를 맞을 것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상승추세냐, 아니냐이다.”
- 당 혁신위원장에 주대환 자유와 공화 공동의장으로 굳어져가는 것 같다. 손 대표의 싱크탱크인 동아시아미래재단 이사라는 점에서 너무 한 거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손 대표와 인연이 있는 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 의장의 성품이라든가, 정치적 식견, 비전과 노선, 철학을 봐야 한다고 본다. 그분은 제3의 길에 대해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다. 우리 당에 꼭 필요한 분이다.”
- 윤리위원장은 어떻게 되나?
“공정성과 투명성과 객관성을 담보해낼 수 있는 인물이 될 것으로 본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지 않겠나.”
- 당내에서 보면, 옥신각신해도 바른정당계랑 총선까지 끝까지 같이 가게 될 거라는 전망도 있고, 혁신위 과정 등을 통해 정리하고 갈 거라는 얘기도 들리던데.
“예측을 하긴 어렵다. 혁신위에서 과제를 설정하고, 우리가 잘 수행하면, 당의 총의가 모아질 것이다. 거기에 동의하는 분들은 끝까지 함께 할 것이고, 만약에 못 하겠다 하면, 개인적 노선을 달리할 것으로 본다. 혁신위가 출발하고 한 두달 내로 당의 진로가 사실상 결정될 거로 판단된다. 남아있는 분, 나갈 분 제3의 길을 갈 분, 제4의 길을 갈 분, 자기의 원래 친정으로 갈 분 등 다 정해질 거로 본다. 또한, 혁신위 과정에서 치열하게 논쟁하고 대화하고 토론해서 얻어지는 결론에 대해서는 우리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따라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당, 한국당 공천 갈등 불 보듯 뻔해
우리 당 갈등은 구상유취 수준, 기회 올 것
50%연동형비례가 현실적, 석패율제 승산 있어”
- 내년 총선까지의 바른미래당 전략과 로드맵에 있어 중요한 관건으로 보는 것은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우리가 뭉쳐만 있으면 된다. 우리 당의 갈등과 대립은 공천 경쟁이 아니다. 노선 대립, 정체성일 수 있다. 이런 부분들이 혁신위 과정을 거쳐 용광로에 들어가 하나의 옥동자처럼 탄생되면 모든 갈등은 해결될 거라고 본다. 물론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은 어쩔 수 없다. 본인들이 보따리를 싸거나 알아서 할 일이다.
두 번째는 민주당과 한국당에서 벌어질 문제다. 내가 민주당에서 22년간 있었다.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정당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트라우마는 뭐냐. 바로 공천 갈등이다. 우리야 공천 갈등 일어날 일이 없을 거다. 그에 비하면 지금 싸우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구상유취(口尙乳臭)에 불과하다. 반면 거대 양당은 연말이나 내년 초 공천 갈등이 점입가경이 될 것이다. 바로 그때가 우리 당에게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세 번째는 제3지대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 된다. 이것만 견고하게 가져가면 국민들은 적대적 공생관계 대신 우리를 택하게 될 것이다.”
- 연동형 비례대표제, 석패율제 등 선거제가 반드시 돼야겠다.
“연동형비례대표제 100%면 더욱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50% 준연동형제가 최선이라고 본다.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 의석수를 늘리지 않아야 되는 건 국민적 대전제이기 때문이다. 국민들께서 의석수 한 석을 늘리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이 굉장히 강하다. 석패율제 경우 정운천 의원이 의총에서 제안했는데, 그 주장도 틀리지 않는다. 석패율제가 어느 정도 도입 되면, 아마 서울경기인천 권역별로 묶을 거다.
그리되면, 경기권역에서 상당한 선전을 하게 될 가능성도 높다. 지역구에서 낙선하더라도 2등일 경우 기회가 있는 거다. 다만 이런 건 있다. 신인보다는 현역 정치인이 유리하다. 그런 점에서 제대로 된 민의 반영, 기성 정치인과 신진 정치인의 괴리감 극복 등 추후 법사위 등을 통해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 선거제가 통과 될 것으로 보는 건가.
“그렇다.”
“민평당과의 합당 생각 안 해
빅텐트는 바른미래당 중심으로”
- 민주평화당과 제3지대에서 합당하는 시나리오도 있는 것 같던데.
“나는 합당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물론 우리 당에서는 합당을 생각하는 분도, 결사반대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나는 합당은 선결 과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 부분은 시각을 달리하고 있다. 바른미래당 중심의 빅텐트를 위해서도 민평당과 의 합당은 온당한 방법이 아니다.”
- 민평당의 박지원 의원은 자주 러브콜을 보내는 듯한데.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
“나는 안양 신성고등학교 출신
지역 문제 관건은 교육이 답”
임 의원은 전북 익산에서 나고, 안양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안양의 명문 신성고등학교 졸업생으로 연세대 행정대학원 정치학 석사를 졸업했다. 내년 총선 지역구 출마도 안양동안구을을 준비 중에 있다. 특히 해당 지역은 현역 지역구의원인 다선의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을 상대로 임 의원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정의당 추혜선 비례대표 의원 등의 각축전이 예상되는 곳이다.
- 21대 총선에서 안양동안구 출마를 준비 중에 있다. 나름의 필살기는 뭔가.
“나는 연고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안양의 연고자라는 점은 자랑스럽다. 태어나기는 전북 익산에서 나고, 호남에서 자랐지만 고등학교는 안양에서 나왔다. 신성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내게는 애틋한 곳이고, 제2의 고향이다. 지역민들도 만나면 좋아해주신다. ‘임재훈은 우리 지역 사람이네’ ‘저 친구가 안양 신성고등학교 졸업했네’라며 한 분 한 분 정겹고 따스하다. 그 동질감과 유대감이 선거 구도 면에서 큰 강점이 되고 있다. 자신이 있다. 자신감이 붙고 있다. 지역민이 밀어주는 마음이 느껴진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 지역 발전을 위해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안양은 신도시 지역이라 주거 환경이나 교통 등은 괜찮다. 관건은 교육 문제다. 교육이라는 것이 학교 시설 증축 등도 중요하지만, 학교 안전에 관한 것, 그리고 유무형 폭력 근절 등의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본다. 마침 내가 국회 상임위 교육위원회 바른미래당 간사다. 관련 입법화를 서두르고 교육 현안을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 할 일이 많겠더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맘껏 학교에 보내고, 공부할 수 있는 안양 지역의 교육 환경을 만들고 싶다.”
무엇보다 "가정에서 맘껏 학교를 보낼 수 있는 교육을 만들겠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일련의 의정 활동을 통해 그는 현 교육계의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주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용진 유치원 3법’이 국회 표류를 거듭할 무렵에는 중재안을 제시, 패스트 트랙에 올리며 해결사로서의 실력을 입증했다. 얼마 전엔 인성교육 진흥법안 준비를 비롯해 건강한 학교 급식 및 미세먼지로부터의 안전보건 논의, 교육현장 근로자 산업안전보건법 적용 방안 간담회 등을 모색한 바 있다.
“정직한 정치, 소외된 계층 위한 정치”
“25개 수첩 안에 정치인생 다 담겨”
- 정치를 하는 이유가 뭔가.
“소외된 계층을 위해서다. 요즘 입법적으로 애정을 쏟는 게 있다. 직업현장과 생활현장 속에서 제대로 대우를 못 받는 분들의 권익을 찾아주는 일이다. 그리고 탈북민, 다문화 사회를 위해서도 내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그리고 정직하게 하고 싶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아는 건 안다고 하고,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다고 하고,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하고. 그렇게 정치하고 싶다. 되지도 않는 것 한다면서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다.”
걸어 다니는 인명사전, 왜…?
"훗날 정치 야사, 책으로 낼 것"
임 사무총장은 자천타천 ‘걸어 다니는 인명사전’으로 불리고 있다. 웬만한 정치인들의 약력은 물론, 머릿속으로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만 300개가량 된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메일 주소까지 다 외웠다고 한다. “머리가 굉장히 좋은 것 같다”고 하자, 메모 습관 덕분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책상에서 가져와 보여준 것이 수첩이었다. 임 의원은 뭔가 재미난 마술쇼를 보이듯 자신의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만한 작은 크기의 검정색 수첩을 펼쳐 보였다. 겉면엔 ‘임재훈’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안을 보면 얇은 페이지 장장마다 깨알 같은 글씨들이 살아온 흔적들을 반영하듯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 어떤 수첩인가.
“95년 정치에 입문한 이후부터 이런 수첩을 매년 한 권씩 작성해왔다. 어느덧 스물다섯 권이 됐다. 옛날에 김대중 선생님이 옥중에서 <옥중서신>을 쓰신 적이 있었다. 돋보기로 봐야 할 정도로 엽서 등에다 깨알같이 쓰셨다. 내 수첩도 마찬가지다. 그날의 일정이나, 누구를 만났는지 등이 적혀 있다. 이것을 한번 작성하면 그냥 암기가 된다. 설사 모른다 할지라도 십 년 전 수첩을 보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살아 움직인다. 내가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닌데, 메모 습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먼 훗날 정치현장을 마무리하게 되면 이걸 책으로 내려고 한다. 이 수첩 안에는 일반 신문이나 <시사오늘>같은 주간 매체에 보기 어려운 뒷담화, 일화, 야사가 담겨 있다. 얼마나 재밌겠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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