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필담] 대통령‘님’, 맞는 표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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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필담] 대통령‘님’, 맞는 표현일까?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8.03.25 18: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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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국민보다 높은 권력은 없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한설희 기자)

이승만 전 대통령을 두고 회자되는 이야기 중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방귀를 뀌자 옆에 있던 이익흥 내무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며 아부한 뒤 출세 가도를 달렸다는 얘기다. 이 ‘블랙 유머’는 이 전 대통령 이후에도 박정희, 전두환의 이름으로 덧씌워져 국민들 사이에서 ‘아부의 정수(精髓)’이자 ‘절대 권력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 DJ는 국민과의 대화에서 ‘각하’ 대신에 ‘대통령님’이라고 불러달라고 선언했다.‘각하’라는 어감이 주는 군사정권의 상징성과 권위주의를 탈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뉴시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국민과의 대화에서 ‘각하’ 대신에 ‘대통령님’이라고 불러달라고 선언했다. ‘각하’라는 어감이 주는 군사정권의 상징성과 권위주의를 탈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DJ정권 이후 우리는 공식 석상에서 청와대 관계자들의 ‘각하’ 대신 ‘대통령님’이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대국민담화, 청와대 브리핑 등 공식 석상에서 ‘대통령님께서는’, ‘대통령님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가진 성질 중 ‘역사성’이 있다. 언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한다는 것이다. 실례(實例)로 ‘영감’이라는 단어는 과거 신분이 높은 남자 어른을 뜻했지만, 시간이 흘러 신분제가 사라지면서 그냥 ‘노인(老人)’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이처럼 ‘대통령님’이라는 호칭도 권위주의를 거부한다는 DJ의 선한 의도에서 벗어나 이젠 또 다른 극존칭으로 자리잡았다. 공식 석상에서 '여사님', '대통령님' 호칭을 쓰지 않는다고 무례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피해자들까지 생기고 있는 현실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대통령님’이라는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국민 앞에서 보고하는 공적인 자리에서 ‘대통령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옳은 태도일까.

혹자는 별 것도 아닌 문제에 예민한 태도를 취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층위다. 모든 국민이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에게 특별한 권위가 제공되는 것은, 그가 국민이 투표로 선출한 권력이라는 존중의 뜻이 담겨 있다.

대통령에게 ‘님’자가 붙고 그가 많은 의전을 누리는 것은 국민의 손으로 선택한 권력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존엄한 국민 앞에서는 ‘대통령’ 호칭으로 충분하다.

▲ 대통령에게 ‘님’자가 붙는 것은 국민의 손으로 선택한 권력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그러니 국민 앞에서는 ‘대통령’ 호칭으로 충분하다. 이제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님’ 말고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해달라고 요청한다면 어떨까.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와 관련해 심의석 전 한나라당 성북구갑 위원장은 2010년 본지 ‘내가 본 김영삼’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전하기도 했다. 이는 1986년 초, 심 전 위원장이 김영삼(YS) 당시 상임고문과 함께 민주산악회 산행에 참여할 때의 일이다. 민주산악회는 산 정상에 도착하면 신께 기도하는 식순을 진행한 바 있다.

“1986년 초라고 기억이 되는데 그날 산행에는 김영삼 장로도 정채권 목사도 모두 불참했다. 다른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면 항상 내 귀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인 우리 총재님’ 하면서 김영삼 총재를 너무 떠받든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를 의식하고 기도하면 그것은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기도지 하나님이 들으시라고 하는 기도는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총재 앞에 수식어도 붙이지 않고 총재 뒤에 ‘님’자도 붙이지 않고 기도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 앞에서 자기 남편을 지칭할 때는 ‘아비’라 한다. 시아버지가 남편보다 높기 때문에 남편을 낮춰 불러야 한다. 기자가 대통령을 지칭할 대는 ‘님’자를 붙이지 않는다. 기자 개인보다는 대통령이 높지만 보도를 보고 듣는 국민보다는 대통령이 낮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어떤 사람을 지칭하든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지 않아야 진정한 기도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역사성 외에도 사회성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언어는 사회의 약속이므로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호칭의 당사자인 DJ의 결정으로 ‘각하’ 대신 ‘대통령님’이라는 탈(脫)권위적 표현을 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젠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님’ 말고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해달라고 요청한다면 어떨까. 감히 국민 앞에서 존칭을 쓰지 않는 것. 이 작은 변화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며 내세운 탈권위 및 탈가부장주의 정신의 화룡정점(畵龍點睛)이 되기를 기대한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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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지킴이 2018-03-26 14:15:25
좋은 의견입니다.
1. 1대1 상황(내가 만났을 때): "문 대통령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2. 1대2 상황(내가 친구에게 대통령을 거론할 때): "친구야, 문재인 대통령이 해외순방 간다더라."
3. 1대 다수(국민 앞에서 발표, 기자회견 시): "문재인 대통령께서 대국민 발표를 하시겠습니다."
3번의 경우 아무래도 님자를 넣으면 좀 그렇죠. 국민 앞에서 하는 발표라 그냥 대통령께서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기사에 적극 공감합니다. 좋은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