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공직자 제산등록제 실시,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YS) 하면 떠오르는 핵심 단어들이다. 그러나 YS 이름 앞에 ‘민주주의자’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는 드물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 투사’이자, 그 누구보다 정당민주주의를 중시했던 YS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시사오늘〉은 YS 서거 2주기를 맞아 잘 알려진 에피소드 둘과 숨겨진 일화 두가지를 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 ‘정당민주주의 수호자’로서의 YS 행보를 되짚어 봤다.
*본 기사는 2010년부터 〈시사오늘〉 ‘민주산악회 되짚기’ 등을 통해 만난 정객(政客)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증언에 나서준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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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을 위해 지원유세 못할 게 뭐 있나”
#3.
1987년 9월 29일, 남산 외교구락부. YS와 DJ는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봤다. 제1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YS와 DJ는 하나 뿐인 통일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를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이 자리는 통일민주당 분열 기로에서,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담판(談判)을 지을 기회였다.
“김영삼 총재, 나의 공민권 제한이 해제되면 나를 대통령 후보로 하고 본인은 나가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1987년 6·29 선언으로 공민권이 회복됐어요. 약속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김대중 고문, 제가 나가야 합니다. 김 고문이 후보가 되면 군부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요. 어렵게 이룩한 민주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제가 나가는 것이 순리에 맞다고 봅니다.”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둘러싼 두 사람의 의견 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2시간 동안 힘겨루기만 반복하던 양김(金) 씨는, 결국 국민 앞에서 단일화 협상 결렬(決裂)을 발표한다.
『6·29 선언 이후 치열한 대통령 후보 경쟁을 벌여온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은 29일 양김 씨 간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작업이 실패했음을 사실상 선언했다. 양김 씨는 이날 아침 외교구락부에서 2시간 가까이 단독회담을 가진 후 “후보 단일화 문제에 합의를 보지 못했다”고 밝히고 “합의를 보지 못한 데 대해 당원과 국민들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해 단일화 협상이 실패했음을 분명히 했다. (중략) 이날 양김 씨는 모두 상대방의 후보 양보를 요구했으며, 단일화를 위한 협상 시한조차 합의하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단일화 협상을 종결짓고 독자적인 출마의 길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1987년 9월 29일 〈경향신문〉 ‘양김 후보 단일화 실패’』
그러나 이 자리에서 민주당 김태룡 대변인은 이런 말도 남겼다.
“두 사람이 상호 상대방의 입장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더 숙고하고, 측근들과 상의해 필요하다면 다시 만나 단일화 문제를 논의키로 했다.”
실제로 이날 이후에도 두 사람은 후보 단일화를 위한 물밑 협상을 지속했다. 다만 통일민주당에 있던 미창당 지구당에 대한 임명권 분배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YS는 36개 미창당 지구당의 위원장을 18대18로 나누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DJ는 13대23을 요구했다. 이미 상도동계가 더 많은 창당지구당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YS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하지만 후보 단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결국 YS는 DJ 측 요구를 수용키로 하고, 1987년 10월 22일 DJ와 다시 한 번 외교구락부에서 마주 앉았다.
“제가 김 고문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미창당 지구당 위원장을 13대23으로 나누고, 경선을 해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합시다.”
“미안합니다, 김 총재. 선거 일정상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와서 경선을 치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김 고문이 10월 말까지는 단일화를 하기 좋은 시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미창당 지구당은 당장 내일이라도 결당할 수 있습니다. 김 고문이 총재를 맡아 전권을 갖고 공천 등 모든 것을 마음대로 재량껏 하시지요. 그렇게 경선을 합시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은 22일 아침 서울 외교 구락부에서 회동,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한 최종담판을 벌인 끝에 두 사람의 협의에 의한 후보 단일화가 더 이상 어려운 만큼 전당대회에서 경선으로 후보를 결정할 것인지의 여부를 26일까지 결론짓기로 했다. 전당대회를 통한 후보 경선은 김 총재가 전격 제의한 것으로, 김 고문이 26일까지 가부의 회답을 해주기로 했다. (중략) 김 총재는 “후보 경선을 할 경우 부작용이 따를 것이 예상되지만 국민과 전 당원의 여망인 후보 단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당대회에서 투표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밖에 없다”면서 “두 사람이 합의하여 36개 미창당 지구당을 빨리 결당, 전당대회를 열기로 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김 고문은 “전당대회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인정하나 미창당 지구당 문제는 지난 8, 9월에 이미 해결했어야 옳았었는데 김 총재가 거부했다”면서 “이제 때가 늦은 감이 있다. 양측이 경선할 때는 지금 같은 정보공작 정치 하에서 위험과 불미스런 사태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 고문은 “그러나 김 총재의 적극 제의를 일단 수용해서 주위의 동지들과 적극 검토한 다음 내주 월요일 이전에 회답해 주겠다”고 대답했다.
1987년 10월 22일 〈동아일보〉 ‘두 김 씨 경선 여부 26일까지 결론’』
YS의 양보에, 동교동 쪽에서도 경선에 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13대23으로 미창당 지구당 위원장을 임명할 경우 DJ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고, 후보 단일화를 원하는 국민의 열망에도 부합했기 때문이다. DJ의 오랜 동지였던 김상현은 성명을 발표해 양김 씨의 경선을 촉구했다.
『최근 일방적으로 민주당 입당을 선언했던 김상현 전 민추협 의장대리와 정동훈·전대열·권혁충 씨 등은 23일 성명을 발표, “김 총재가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36개 미창당 지구당 창당 후 전당대회를 통한 경선을 제의한 것은 이 시점에서 불가피하고도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환영했다.
1987년 10월 23일 〈경향신문〉 ‘김 총재 경선 제의 환영 김상현 씨 등 성명 발표’』
상도동계 내에서도 ‘김영삼은 석두(石頭)’라는 격한 반응이 나올 정도로 반대했던 DJ 제안 수용에 대해, YS는 2010년 〈시사오늘〉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군정종식이 된다면 누가 후보로 나서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신민당 경선에서도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었다.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된다면 그의 당선을 위해 지원유세 못 할 게 뭐 있었겠나.”
하지만 DJ는 끝내 YS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DJ는 이중재를 YS에게 보내 당내 경선에 의한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반대한다는 뜻을 전하는 한편, 한광옥을 통해 “25일 고려대 집회에서 국민이 김 총재의 양보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김 총재로서는 이 기회가 후보 단일화를 위해 양보의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라고 본다”고 밝혔다. 경선이 아닌 후보 양보를 원한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민주당의 분당이 확실한 단계에 이르렀다. 김대중 민주당 고문은 26일 오전 이중재 부총재를 김영삼 총재에게 보내 지난 22일 김 총재가 제의한 ‘당내 경선에 의한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으며, 김 고문의 동교동계는 김 고문의 후보 출마는 신당 공천으로 하며, 오는 11월 2, 3일경 신당 창당 발기인대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26일 밝혔다.
1987년 10월 26일 ‘민주당 끝내 분당’』
DJ가 이런 선택을 한 배경에는 ‘4자 필승론’이 있었다. 영남 출신인 노태우와 YS가 영남 표를 나눠 갖고, 김종필이 충청 표를 가져가면 자신이 호남 표와 수도권 표를 묶어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노태우의 당선이었고, 이 판단 착오로 YS와 DJ는 역사에 상처를 남기게 된다.
“아직도 아쉽다. 후보 단일화를 못한 책임에 통감한다.”
모든 것을 양보했던 YS는, 서거 직전까지도 그때를 아쉬워했다.
“YS와 DJ가 외교구락부에서 만나고 있을 때 민주산악회 경기도 광명 지부 창립대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 김동영, 최형우, 노병구, 김덕룡 등 YS를 제외한 상도동 핵심이 다 있었는데, YS가 DJ에게 한 제안이 알려지자 ‘김영삼은 석두’라는 탄식과 함께 소란이 일 정도였다. 그만큼 YS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DJ가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게 다 ‘4자 필승론’ 때문이었다. YS가 그토록 자신에게 불리한 제안을 DJ에게 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과 국민들에게 떳떳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불리 이전에 원칙이 있다”
#4.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정동호는 군(軍) 출신 아닙니까. 저 대신 정동호를 공천하다니요.”
제14대 총선 민주자유당(이하 민자당) 공천이 결정된 어느 날, YS 사무실로 찾아온 조홍래의 얼굴에는 노기(怒氣)가 돌았다. 경남 함안·의령 선거구에 군 장성 출신이자 현역 의원인 정동호가 공천됐다는 사실을 안 듯했다. 조홍래는 YS 측근이기도 했지만, 여론조사 상으로도 정동호에 앞서고 있었다. 화가 날만한 일이었다.
“기다려 보시오. 내가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겠소.”
YS는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노태우를 만나 경남 함안·의령 여론조사 결과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다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여기는 여론조사에서도 조홍래가 앞서는 선거구가 아닙니까.”
“여기는 나도 양보를 하기가 어렵소. 정동호를 공천합시다.”
YS가 두세 차례 더 공천 변경을 요청했지만, 노태우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퇴임 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노태우 입장에서도, 현역 의원 프리미엄이 있는 군 후배 정동호를 공천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정동호와 조홍래를 사이에 둔 노태우와 YS의 갈등은 정치권의 ‘핫 이슈’ 중 하나였다.
『민자당은 자신의 최대기반인 영남지역에서의 ‘싹쓸이’를 목표로 ‘영남석권’에 적합하지 못한 인물들을 걸러내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로 노태우 대통령의 청와대쪽과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사이에 이견이 있어 적지 않은 진통을 겪고 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퇴임 후’와도 직결되는 이번 공천을 통해 최대한으로 자기사람을 심으려하고 있고, 차기 대통령 후보 지명과 관련해 자파의원을 최대한 확보해야 하는 김 대표 역시 처지는 마찬가지다. 이와 맞물려 5공 세력을 어느 정도 수용하느냐는 것도 논점의 하나가 돼 있다.
1992년 1월 25일 〈한겨레신문〉 ‘14대 총선 공천 어떻게 돼가나’』
아무리 YS라도 현역 대통령의 의사를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공천권은 정동호에게로 돌아갔다. 이러자 당의 결정에 불복한 조홍래는 탈당 후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했다. 자연히 세간의 관심은 ‘YS가 누구 손을 들어줄 것이냐’로 쏠렸다. YS의 통일민주당 총재 시절 특별보좌역을 맡았던 조홍래는 YS와 함께 찍은 사진을 걸어놓고 선거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당선되면 다시 민자당으로 들어가 YS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YS는 이상하리만치 조홍래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YS와 조홍래의 인연을 아는 상도동 사람들이 조홍래 지원을 요청했으나, YS는 묵묵부답이었다.
“조홍래를 지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민자당으로 들어올 사람입니다. 나중에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서도 조홍래는 당선시켜서 데려와야 합니다.”
“….”
YS 지원이 없었지만, 조홍래는 당선에 가까워졌다. 경남에서의 YS 인기를 생각하면, YS 특별보좌역을 지낸 경력이 있는 조홍래가 정동호보다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선거 운동이 시작되자, YS는 범인(凡人)이 상상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다. 유성환에게 정동호 지원 유세를 부탁한 것이다.
“내가 민자당을 떠나지 않는 한 정동호 당선을 위해 뛰어야 한다. 그게 정당정치고 의회민주주의다. 함안으로 내려가 정동호 지원유세를 해 달라.”
유성환은 깜짝 놀랐다. 정당민주주의를 신봉(信奉)하는 YS인 만큼, 조홍래를 지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적이 될 공산이 큰 정동호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나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욱이 유성환은 조홍래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YS 말을 듣고 정동호 지원 유세를 위해 함안으로 내려가던 유성환은, 결국 발길을 돌린다.
“조홍래는 시간 날 때마다 바둑도 두고 하는 친구인데…. 아무리 YS 부탁이라고 해도 이것은 할 수가 없다. 나는 못 하겠다.”
유성환이 지원 유세를 거절하자, YS는 또 한 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YS는 부친 김홍조 옹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룰(Rule)에 따라 일단 결정됐으면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한다’는 소신이 그대로 나타난 행보였다.
허나 김홍조 옹 역시 정동호의 지원 유세에 소극적이었다. 평소 조홍래와 알고 지내던 터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국 YS는 경남 거제에 출마한 김봉조를 불러 정동호를 지원하라고 지시한다.
“봉조야, 함안에 내려가서 정동호 지원 좀 해라.”
김봉조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홍래는 YS 사람이고, 정동호는 노태우 사람이었다. 더욱이 YS는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자신의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당선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대표님, 조홍래가 당선되면 어차피 민자당에 입당할 것입니다. 차기 대선을 위해서도 정동호보다는 조홍래의 당선이 유리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YS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었다. 김봉조의 물음에, YS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정치를 몇 년 했는데 그걸 모르겠나. 하지만 유불리를 따지기 이전에 원칙이란 게 있다. 내가 민자당에 있는 한, 정동호 당선을 위해 뛰는 게 옳다.”
결국 김봉조는 함안으로 내려가 정동호 지원 유세를 펼쳤다. 김봉조의 지원 유세는 YS의 마음이 정동호에게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선거 결과는 정동호 3만4813표, 강정주 2485표, 조홍래 2만8348표. 여론조사에서 뒤지던 정동호는 YS의 지원으로 조홍래를 꺾고 제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YS에게, ‘민주주의’라는 원칙은 이토록 확고했다.
“김영삼 총재가 나를 부르더니 ‘니 마음은 알제. 하지만 내가 민자당을 떠나지 않는 한 정동호 당선을 위해 뛰어야 되는 기 맞제. 그게 정당정치고 의회민주주의지’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함안으로 내려가 정 장군(정동호)을 지원하라고 하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조홍래는 시간 날 때마다 바둑도 두고 하는 친구인데, 정동호를 지원유세 하라는데 할 수가 없었다. 함안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나 못하겠다’고 하고서는 발길을 돌렸다.”
[역사 돋보기] YS와 박근혜의 차이…‘정당민주주의’
한국 정치사에는 YS-조홍래 일화와 비슷한 일이 하나 더 있다. 박근혜와 ‘친박연대’ 사례다. 2008년, 당시 한나라당(現 자유한국당)에서는 이른바 ‘친박(친 박근혜) 공천 학살’이 벌어졌다. 당권을 잡은 친이(친 이명박)계가 김무성·서청원·한선교·홍사덕 등 친박계 의원들을 대거 낙천시키고 박근혜의 힘을 빼려 했던 것이다.
이러자 김무성·서청원·한선교·홍사덕 등은 한나라당의 잘못된 공천을 심판 받게 하자는 명분으로 한나라당을 탈당, ‘친박연대’라는 이름으로 총선에 출마한다. 여기까지는 YS-조홍래 사례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대처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YS가 “민자당에 몸담고 있는 한 민자당 후보를 지원해야 한다”며 정동호를 밀었던 반면, 박근혜는 “살아서 돌아오라”며 노골적으로 탈당 후보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서거 후 ‘재평가 바람’이 불고 있는 YS와 보수를 궤멸 직전까지 몰고 간 박근혜의 차이는 이런 ‘민주의식’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