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공직자 제산등록제 실시,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YS) 하면 떠오르는 핵심 단어들이다. 그러나 YS 이름 앞에 ‘민주주의자’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는 드물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 투사’이자, 그 누구보다 정당민주주의를 중시했던 YS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시사오늘〉은 YS 서거 2주기를 맞아 잘 알려진 일화와 알려지지 않은 일화 네 가지를 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 ‘정당민주주의 수호자’로서의 YS 행보를 되짚어 봤다.
*본 기사는 2010년부터 〈시사오늘〉 ‘민주산악회 되짚기’ 등을 통해 만난 정객(政客)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증언에 나서준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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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승리는 나의 승리입니다”
#1.
1969년 11월 8일.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신한민주당(이하 신민당) 3선 의원이었던 YS는 남산 외교구락부로 들어섰다. 40대 중반 젊은 정치인의 얼굴에는 기대와 떨림이 교차했다. 이 자리를 찾은 기자들은 모두 YS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이윽고, 그는 준비한 종이뭉치를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우리는 위장된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다. 빈사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다.”
한 번 입을 뗀 YS는 거침이 없었다.
“우리는 공포정치에 떨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어둠을 저주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어둠을 뚫고 광명을 찾아 횃불을 밝혀야겠다. 온갖 부조리와 역리를 거부하고 민족의 총화로 새 시대를 밝히는 구원(久遠)의 횃불을 밝혀야겠다. 나는 지금부터 어려움 속에서도 불굴의 투지로 싸워 온 당원동지들에게 솔직하게 지지를 호소하며, 당내 지명절차를 밟아 박정희 씨에 대한 도전자로서 평화적 혁명의 기수가 된다면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싸우겠다.”
현장에 모인 기자들 입에서 알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신민당에 불어 닥칠 태풍을, 그리고 ‘젊은 야당 지도자’가 겪을 풍파를 예견하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이후 신민당 원로들은 YS를 겨냥해 날선 비판을 내뱉기 시작했다. 전통적 보수야당이었던 신민당은 엄격한 위계질서로 움직이는 정당이었다. 국회의원 선수(選數)보다 연공서열이 우선이었다. 차기 당권 주자 역시 유진산·정일형·이재형 등 고령의 계파 수장들이었다. 심지어 유진산은 YS를 향해 원색적 비난까지 퍼부었다.
“구상유취(口尙乳臭), 아직 입에서 젖비린내 나는 것들이 무슨 대통령인가.”
신민당 원로들의 반발에 역부족을 느낀 YS는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과 함께 야당의 ‘차기 리더’로 손꼽히던 DJ가 ‘40대 기수론’에 힘을 보탠다면, 상황을 뒤바꿀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아직 당이 40대 기수론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은 데다, 자신의 목표는 1975년 대선이라는 이유로 YS의 청(請)을 거절했던 DJ는 며칠 후 마음을 바꿔 40대 기수론의 전면에 등장한다. 정치적 동지였던 김상현의 설득 덕분이었다.
“이번 40대 기수론에 동참하지 않으면 앞으로 지도자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합니다. 선언에 동참해야 합니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됐는데 어떻게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선언이 곧 준비입니다. 40대 기수론에 참여해야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YS 예상대로, YS·DJ에 이철승까지 뭉친 40대 기수론의 파괴력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노선이 불명확한 유진산 대신 이들에게 ‘박정희 대항마’ 자리를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러자 당수(黨首)였던 유진산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YS·DJ·이철승 중 한 사람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비주류였던 DJ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YS와 이철승은 그랜드호텔에서 유진산을 만나 ‘두 사람 가운데 누구를 지명하든지 무조건 당수의 추천에 승복하겠다’고 서약했다.
‘운명(運命)의 날’을 하루 앞둔 1970년 9월 28일 오후, 유진산은 장고(長考) 끝에 최종 입장을 밝혔다. 유진산의 선택은 YS였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하루 앞둔 28일 오후, 유진산 당수는 중앙상위에서 71년 선거에 내세울 동당(同黨)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 씨를 추천, 거당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따라 29일 지명대회에서의 후보 경쟁 양상은 40대 후보 중의 한 사람인 김대중 씨가 독자적으로 출마를 계속 고집하는 한 그와 김영삼 씨와의 표 대결로 압축되나, 별다른 정세 변동이 없는 한 김영삼 씨의 지명 획득이 확실시되고 있다. (중략) 이날 유 당수의 추천에서 탈락된 이철승 씨는 그가 이미 유 당수에게 서면으로 서약한 대로 추천된 김영삼 씨를 지지할 것을 명백히 했다.
1970년 9월 28일 〈동아일보〉 ‘신민후보에 김영삼 씨 추천’』
승부는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보였다. 대의원 40%를 확보하고 있던 범(汎)유진산계와 제2계파였던 이재형계가 YS를 지지하는 양태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철승도 ‘무조건 당수의 추천에 승복하겠다’는 서약에 묶여 있었다. 이변(異變)의 여지가 없었다.
1970년 9월 29일. 국민적 관심 속에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전당대회가 열렸다. 대선 출마를 처음 선언했던 남산 외교구락부에서와는 달리, YS 얼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이미 후보 수락연설문까지 준비한 상태였다. 범유진산계와 이재형계, 이철승계가 약속대로 투표만 해준다면, 박정희 정권에 맞설 ‘40대 기수’는 YS로 확정될 터였다.
“1차 투표 결과, 총 투표자 885표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백지 78표, 기타 4표입니다. 김영삼 후보가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가 되지 않아 결선 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순간 YS의 표정이 굳어졌다.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약속이 깨졌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결선 투표까지 남은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저 이철승계 대의원들을 만나 “약속을 지키라”고 종용(慫慂)하는 것이 YS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반면 DJ는 달랐다. 전날 밤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지를 읍소(泣訴)했지만, ‘잘 해야 결선 투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DJ는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이철승과 발 빠르게 접촉, ‘다음 총재 선출 때 이철승을 지지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줬다. 이철승이 마음을 돌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보상이었다.
“2차 투표 결과, 총 투표자 884표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기타 16표로 김대중 후보가 대선 후보로 선출됐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역전극이었다. 20대 때부터 정치를 시작,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YS조차도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YS 진영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믿을 수 없는 숫자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의원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YS의 패배는 이재형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과 이철승의 배신이 합쳐진 것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가 봐도 이상한 결과였다.
그러나 YS는 곧바로 정신을 부여잡고, 단상으로 올라가 당원들을 향해 외쳤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김대중 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나의 승리입니다. 나는 김대중 씨를 위해 거제도에서 무주구천동까지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지 갈 것입니다.”
멋진 승부, 멋진 승복이었다.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YS는 DJ 당선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누볐다. ‘민주주의는 경선을 통한 정정당당한 경쟁과 그에 따르는 승복으로 구현된다’는 YS의 믿음이 낳은 장면이었다.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는 24일 낮 2시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후보 지명 후 처음으로 대도시 시국 강연회를 가졌다. (중략) 유세에는 유진산 대표, 김영삼·이철승 씨 등이 찬조연사로 참가했다.
1970년 10월 24일 〈경향신문〉 ‘김 후보 대전 강연 유 대표·김영삼·이철승 씨 찬조’』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31일 오후 2시 인천 공설운동장에서 11월1일 오후 2시에는 광주 공설운동장에서 각각 대도시 유세를 갖는다. 이번 유세에도 유 당수·김영삼·이철승 씨 등이 연사로 나설 예정.
1970년 10월 30일 〈동아일보〉 ‘김대중 후보 내일 인천 유설’』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보기 어려운 경선 승복에 대해 YS는 〈시사오늘〉과 한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선거에서 지면 억울한 마음은 다 있다. 그래도 경선을 치러서 후보를 정하고, 일단 정해졌으면 따르는 게 정당정치고 의회민주주의 아니겠나.”
“경선이 끝나고 우리는 얼어서 몸도 움직이지 않는데, YS가 단상으로 올라가더니 ‘여러분, 오늘 이 전당대회는 우리의 승리입니다. 박정희를 이기기 위해서 여러분의 그 함성으로 DJ를 지지한 겁니다. 김대중의 승리는 이 김영삼의 승리요, 바로 여러분의 승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거다. 우리는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YS는 박정희를 이기기 위한 자기의 정치 소신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선거가 곧 민주주의, 민주주의가 곧 선거다”
#2.
“전두환 정권에서 선거에 참여해 봐야 들러리 야당밖에 안 됩니다. 잘해야 제3당인 길을 왜 가려고 하십니까. 가지 마십시다.”
1985년 2·12 총선을 앞둔 어느 날,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 내부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신당(新黨)을 만들어 총선에 참여해야 한다는 쪽과, 총선 참여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만 인정해주는 꼴이 될 것이라는 쪽이 팽팽히 맞섰다. 팽팽하다고는 하지만, 기실 패배가 불 보듯 뻔한 총선 참여는 독(毒)이 될 것이라는 말에 힘이 실렸다.
“중선거구제 하에서 전두환 정권과 선거를 치러 봐야 승산(勝算)이 없습니다. 괜히 선거에 참여했다가 군부 독재에 정당성만 부여해주는 꼴이 됩니다. 총선을 보이콧해야 합니다.”
‘총선 보이콧’ 주장에는 분명 일리가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채택했던 중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것으로, 집권여당에 유리한 제도였다. 군부 독재와 중선거구제가 결합된 나라에서 민주화(民主化) 세력이 선거로 집권여당을 심판할 수 없다는 예상은 ‘상식(常識)’에 가까웠다.
DJ 생각도 비슷했다. DJ는 신당 창당에 찬성하던 김상현에게 김홍일을 보내 반대 의사를 전했다.
“DJ는 신당 창당에 반대하십니다. 민추협이 재야로 남아 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신당에 참여하면 절교를 선언하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DJ뿐만 아니었다. 장기표, 문익환, 박형규 등 재야 세력들도 총선 참여가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는 말에 공감했다. 독재 정권이 치르는 선거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논리였다.
그러나 YS의 뜻은 달랐다. 그는 ‘선거가 곧 민주주의요, 민주주의가 곧 선거’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조용히 양측 주장을 듣고 있던 YS는 심사숙고(深思熟考) 끝에 입을 뗐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선거를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전 국민이 참여하는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민의를 받아서 정권을 심판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란 결국 선거를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투쟁을 하기 위해서라도 선거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러한 YS의 의지는 1984년 12월 11일, 신당 창당 선언을 통해 공식화됐다.
『상임운영위와 운영위원 전체회의에서 진로결정을 수임 받았던 민추협의 김영삼 공동의장과 김상현 공동의장 권한대행은 11일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국민운동기구로서 민추협 조직을 계속 유지·확대·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범국민적 민주화 추진의 일환으로 선거투쟁을 전개키로 했다”고 밝히고 “우리의 선거투쟁은 민정당에 대한 반대 투쟁을 그 핵심으로 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1984년 12월 11일 〈동아일보〉 ‘창당준비위 곧 구성 재야단체 신당참여 결정’』
‘민주주의’라는 대의(大義)를 따른 YS였지만, ‘명분만 얻고 실리는 잃는’ 정치는 YS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승부처’를 짚어낼 줄 아는 본능적 감각이 있었다. YS는 ‘정치 1번지’로 불리는 서울 종로·중구를 2·12 총선의 전략적 요충지로 보고, 이민우에게 서울 종로·중구 출마를 요청했다.
“정치 1번지 종로를 차지하면 신민당이 야당 바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종로에 출마해 주십시오.”
“고희(古稀)를 넘긴 나를 사지(死地)로 보내려는 것입니까.”
“종로에서 지면 우리 당의 존립(存立)도 위태로워집니다. 당력(黨力)을 총동원해 지원하겠습니다.”
이민우를 설득해 종로·중구 출마 약속을 받아낸 신민당은 총선까지 2주도 남지 않은 1985년 1월 30일, 본격적인 합동 유세에 돌입했다. 신민당이 내세운 핵심 공약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신민당 초대 총재로 추대된 이민우는 2월 2일 “현행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하기 위해 헌법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광주 사태의 진상을 조사하고 그 책임을 묻기 위한 국정 조사권을 발동토록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민우의 이 발언은 ‘신민당 돌풍’에 힘을 실었다. 국민들은 민주화를 약속한 신민당에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2월 6일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에서 열린 종로·중구 합동연설회에는 10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몰렸다.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고목나무에 올라가 연설을 경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경희궁터, 옛 서울고교 자리에서 열린 마지막 합동연설회는 기록적인 7만 여 청중이 운집한 ‘정치의 봄’이었다. 개막 1시간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인파는 운동장과 스탠드를 가득 메웠고, 일부 청중은 스탠드를 둘러싼 고목나무에까지 올라가 주렁주렁 매달리다시피 했다. (중략) 청중들은 마지막 연설회의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고, ‘시원한 그 한마디’에 아낌없이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1985년 2월 7일 〈동아일보〉 ‘구름떼 청중 막판의 열변’』
열기는 투표로 이어졌다. 2·12 총선에서 국민들은 84.6%라는 기록적인 투표율로 ‘정치 암흑기(暗黑期)’와의 작별을 축하했다. 결과도 신민당의 압승이었다. 신민당은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으로 총 67석을 손에 넣으며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제1야당으로 도약했다.
『제12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87명, 신한민주당 50명, 민한당 26명, 국민당 15명, 신사당 1명, 신민주당 1명, 무소속 4명이 각각 당선됐다. 이에 따라 민정당은 지역구 최다의석정당이 배분받게 될 전국구 61석을 합쳐 148석으로 의원정수 276명의 절반인 138석을 넘어 일단 원내안정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3차 해금자 중심으로 선거일 불과 20여일 전에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예상을 뒤엎고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등 대도시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통해 민한당을 제치고 민정당에 이어 일약 원내 제2당으로 진출, 정계의 태풍의 눈으로 주목을 끌게 됐다.
1985년 2월 13일 동아일보 ‘신민 대도시 압승 제1야당’』
‘태풍의 눈’이라는 언론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총선 압승에 자신감을 얻은 신민당은 제12대 국회 개원 후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아울러 국회 밖에서는 YS와 DJ가 힘을 합쳐 ‘민주제 개헌 1000만 명 서명 운동’을 전개했다.
거산(巨山)과 후광(後廣)의 만남에, 국민들의 눈길도 대통령 직선제로 쏠렸다. YS와 DJ는 물론, 재야세력과 학생들도 개헌을 위한 총력전(總力戰)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4·13 호헌조치는 국민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결국 1987년 6월 29일, 대한민국 역사에 ‘민주화’라는 세 글자가 아로새겨진다. 선거를 통해 바람을 일으키고, 국회 내에서 정치 투쟁에 나서겠다던 YS의 ‘민주주의적 항거’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YS는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선거를 통해 이뤄지는 거라고 했다. 전 국민이 참여하는 건데 우리가 그것을 외면해선 안 된다, 민의를 받아서 정권을 심판해야 된다고 설득했다. 그 결과 YS의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켰고, 민한당을 사실상 해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이 개헌투쟁의 동력으로 이어졌고 대통령 직선제를 가져온 것이다. 만약 이 때 선거를 보이콧했다면 민정당과 민한당이 여당, 제1야당을 나눠먹으면서 형식상이든 어쨌든 양당제가 됐을 것이고 간선제도 유지됐을 거라고 본다.”
(계속)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