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정당 정보기관 '호응의 집단'으로 거듭나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이병도 주필)
한때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친박계의 전원 복당 복권을 결정했던 자유한국당이 정반대 사안으로 다시 휘청거리고 있다. 이번에는 탈당이다. 당 혁신위원회가 박 전 대통령의 자진 탈당을 권유했고, 친박계 핵심인 서청원·최경환 의원에 대해서도 탈당을 요구했다.
류석춘 당 혁신위원장은 그 이유로 “2016년 4월 총선 공천 실패로부터 2017년 5월 대선 패배에 이르기까지 국정운영 실패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당연한 조치다. 공적 시스템을 내팽개치고 민간인 최순실에게 놀아난 행위 자체만으로도 사유는 충분하다. 특히 당에 덧씌워진 박근혜 이미지를 지우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도 변함없는 한국당의 수구적인 행태가 반드시 소수의 친박세력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당의 체질이 그렇게 굳어진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친박계 청산은 보수의 미래를 논할 수 있는 출발선에 서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설사 몇 사람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걸 두고 혁신이니, 보수통합의 명분이 생겼느니 운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당은 지금 바닥까지 내려가 있다.
한국갤럽이 최근 발표한 한국당 지지도는 12%로 더불어민주당(50%)의 4분의 1 수준이다. 초선 의원들이 44명이나 있지만 그 흔한 쇄신 운동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는 한국당이 친박세력의 후신이자 ‘도로친박당’이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다.
박 전 대통령과 핵심 친박 인사의 탈당만으로 한국당에 등돌린 민심이 되돌아 올까?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지리멸렬한 상태로는, 문재인정부를 견제하기는커녕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고전할 가능성이 높다.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안보라는 기존 보수의 토대를 굳건히 다지면서 과감한 쇄신을 더해야 할 것이다. 낡은 이념과 노선에 대한 처절한 자성과 쇄신을 통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때만이 잃어버린 지지와 신뢰 회복도 가능하다.
한국당은 107석의 제1야당이다. 지난 7월 전당대회 후 "당을 혁신해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국민 신뢰를 받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혁신안 하나 내놓지 못했다. '구태 정당' 이미지도 바뀌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초반의 다소 무리한 인사와 정책을 쏟아내고 있음에도 보수야당다운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다. 지금 같은 수구 보수의 이미지와 행태를 벗지 못한다면 보수층에 희망을 주기 어렵다. 기존 수구 이미지로는 진보와의 승부 자체가 어렵다. 이 과정에서 만약 홍준표 대표가 조금이라도 사당화의 욕심을 부린다면 국민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될 것이다.
자유한국당 '일관성' 결여, 우익정치 굴절 반영
기본적으로 박 전 대통령은 모든 책임을 지고 먼저 스스로 당적을 정리했어야 옳았다. 공동 책임이 있는 친박계는 보수의 미래를 위해 희생과 헌신의 자세를 가져야 마땅하다. 사실상 ‘박근혜당’이었던 새누리당이 당명을 바꾸고 쇄신과 혁신을 다짐한 게 반년 전이다. 아직도 친박·비박으로 갈려 다투는 당 지배 구조와 인적 구성이라면 스스로 내걸었던 ‘미래 정당’은 도대체 언제나 가능할지 모를 일이다. '일관성의 결여'는 가뜩이나 어려운 환경의 '보수정당'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부를 뿐이다. 건전한 보수의 길. 한국당의 갈 길이 멀다.
그것은 한국 '보수정당' '우익정치'의 역사가 그만큼 굴절되어 왔음을 다시 일깨운다. 현대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을 정도다. 공작정치, 밀실정치, 여론조작의 관행이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보 주무기관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우선, 가깝게는 지난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정부의 국가정보원이 학생, 주부, 예비역 군인 등 3500여명의 ‘댓글부대’를 운영했던 사실이 확인됐다고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가 발표한 바 있다. 팀장급에는 매달 300만~700만원의 활동비가 지급됐다는 소식이다. 인건비만 매달 2억 5000만~3억원을 썼으며, 대선이 있었던 2012년에는 총 30억원을 지출했다고 한다. 정권 유지와 정권 재창출에 국정원이 이용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일에 국민 세금이 사용된 것이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트위터에 친 정부 성향 글을 퍼날라 선거 여론을 조작하고 민의를 왜곡하는 것이었다. 5년 전, 전직 국정원 직원의 제보로 시작된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의 전모가 드디어 밝혀진 것이다. 국정원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범죄를 저지르고, 권력기관이 모두 나서서 사건을 은폐하는 구시대적 작태가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케했다. 국정원의 적폐청산TF 조사로 국정원 정치 공작에 청와대 지시가 있었다는 점이 확인됐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과나 반성 한마디 없었다.
당시 국정원은 여론조작에만 나선 게 아니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정치인 사찰, 언론보도 통제, 보수단체 지원 등을 지시한 회의 녹취록도 공개됐다. 원 전 원장은 그해 ‘국정원 전 부서장 회의’에서 “심리전이라는 게 대북 심리전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에 대한 심리전”이라며 온라인 여론 조성 작업을 독려했음이 최근에 드러나기도 했다. 국가안보의 첨병인 국정원이 선거 여론까지 조작하려 했다면 독재시절 정보기관의 어두운 행태를 답습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사건의 경우 원 전 정보원장 단독으로 이런 엄청난 일이 저질러졌다고 볼 수 없는 사안이다. 원 전 정보원장 윗선, 즉 이명박 전 대통령 등 당시 최고 권력자가 정권 차원에서 자행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정부 시절 국정원이 개입해 국정을 문란케 했던 사건은 이 사건 말고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지적이다. 그 사건 직전 몇년만 보더라도 북방한계선(NLL)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18대 대선 국정원 댓글 사건, 이탈리아 해킹 프로그램(RCS)을 통한 민간인 사찰 의혹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채동욱 검찰총장 뒷조사, 추명호 6국장 비선 보고, 극우단체 지원, 세월호 참사 관련 의혹, 문화계 블랙리스트, 헌법재판소 사찰 등의 의혹도 국정원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사건들이었다. 따라서 법에 따라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관련자들을 색출, 처벌해야만 지겹게 되풀이되는 정보기관의 헌법 유린 행위를 막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음에도,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악습'은 이처럼 되풀이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엄정 처벌로 국기 바로서야
현재 법정에 선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검찰, 법무부의 고위층이 수사를 노골적으로 방해한 정황이 요소요소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박 전 대통령의 죄상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주권자가 위임한 신성한 권력을 비선에 넘겨 나라를 어지럽혔다. 삼성 등 재벌·대기업으로부터 592억원의 뇌물을 받거나 요구하는 등 대통령 권한을 사익 추구에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언론이 수없이 지적했음에도, 사실을 호도하고 은폐하는 행위로 일관했다.
결국 국회는 지난 해 12월 9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찬성 234명 반대 56명이라는 큰 표차로 통과시켰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3월10일 “피청구인(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며 재판관 8 대 0 전원일치 의견으로 그를 파면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번 재판이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고 역사 앞에 참회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것이다. 또한 오늘의 해당 재판부에는 단순한 사법적 책임감을 넘어 후대가 교훈으로 삼을 흠결 없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역사적 책임감이 요구된다.
전직 대통령이 재판정에 선 것은 1996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세 번째다. 전·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상당 기간이 지난 뒤 재판정에 섰지만, 탄핵·파면된 전 대통령이 법정에 선 것은 박 전대통령이 헌정(憲政) 사상 처음이다.
21년 만에 전직 대통령이 다시 법정에 선 것은 이유나 논리를 떠나 대한민국 공동체로서는 불행한 일이다. 지금도 일각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법정에 선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선처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그런 논의를 할 때가 아니다. 진실이 법정에서 최대한 엄정하게 가려지고, 합당하게 처벌, 국기를 다시 바로 서게 해야 한다.
정치권에서도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선 안될 것이다. 재판부가 오직 증거와 법리를 좇아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에게 자계(自戒)의 교훈이 되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도 이번 재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권력 남용 방지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더욱 다져야 할 것이다.
'블랙리스트' 역사와 인권유린
사정이 이러함에도, 오늘의 한국 보수 대표정당 자유한국당이 보여준 혼돈의 '행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국당은 한때 오늘의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계 탈당 노력"과는 정반대로 당 비상대책위 의결조차 거치지 않은채 친박계의 복권과 바른정당 탈당파 13명의 일괄 복당을 결정한 적이 있었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 등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돼 당원권이 정지된 이들까지 포함하면 그 대상자가 56명이나 됐다. “대선에는 지겟작대기도 필요하다”고 주장해 온 당시 홍준표 대통령 후보가 대사면을 추진했으나, 당 지도부가 이를 따르지 않자 의결 절차 없이 직권으로 복권ㆍ복당을 결정한 것이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된 권석창ㆍ이완영 의원, 알선수재ㆍ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한표 의원에 대해서도 당원권 정지를 해제했다. 한국당이 당명까지 바꾸며 혁신 쇼를 벌인 지 3개월도 안돼 적폐 세력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당시 대통령 선거를 사흘 앞둔 상황에서 어떻게든 보수를 결집하려는 몸부림이었다고 하지만, 원칙과 명분은 물론 기본적인 염치와 체면조차 내동댕이쳤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합리적 보수라면 법치주의를 부정하고 반대세력 응징 등 위헌적 막말을 일삼는 '보수'에 미련을 둬서는 안 된다. 그런 후보의 부상과 국정농단 세력의 부활은 정국의 앞날에 두고두고 후유증을 초래할 게 분명하다. 이들이 만약, 반성과 성찰 없이 강력한 보수 정당으로 자리잡게 되면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당시 사회 상황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국민을 분열시키고, 권력을 사유화한 부도덕한 정권을 심판하는 의미가 큰 시점이었음에도, 이런 행태를 보였다.
사실, '블랙리스트'의 역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 시절인 지난 2009년 말, 한 청와대 행정관이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에게 좌편향으로 분류된 사람의 인사기록을 전달한 적이 있었다. 인권단체에선 금기인 이른바 블랙리스트였다. 당시는 이 정권이 전 정부 사람이나 정부 비판적인 사람들을 솎아내기에 혈안이었던 시절이었으니, 그가 왜 그랬는지는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일개 행정관이 독립된 국가기구의 사무총장을 불러내 이런 행위를 한 걸 보면, 청와대의 탈선이 어느 정도였는지 유추할 수 있다.
개인의 이념 성향에 따른 블랙리스트 작성과 활용 자체만으로도 인권위가 적발해야 할 인권침해 행위였다. 그런 짓을 한 청와대 행정관이나, 이런 짓을 용납한 인권위 사무총장이나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명박 정권은 촛불시위 이후 공직사회와 시민사회를 다잡는 데 정권의 비선 사찰조직, 국정원과 검찰, 경찰 등 권력기구를 총동원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국정원은 아름다운 재단 등 시민사회단체를 사찰했고, 검찰은 피디수첩, 미네르바,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 등을 마구잡이로 기소했으며,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정치인, 민간인, 국회의원, 방송 등을 무차별 사찰했다. 5공 정권 이래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침해가 가장 광범위하게 이뤄진 때였다.
당시 국정원이 박원순 서울시장을 ‘종북좌파’로 공격하는 정치 공작을 벌인 사실도 확인됐다. 국정원 개혁위는 지난 2013년 5월 언론에 공개된 ‘서울시장의 左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방안’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 등 2건의 문건을 국정원이 작성했으며, 이와 관련한 심리전 활동도 수행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정치 및 정보기관 혼선과 박근혜 '역사 인식'
문제는 지도자의 '역사 인식'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이런 '공작정치' '블랙리스트' 폐습이 거듭 돌출된 것도 비뚤어진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 밝혀졌듯,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도 국가정보원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국정원이 개입한 단서를 잡고 수사해야 했다. 청와대와 문체부 직원들 조사에서 국정원의 블랙리스트가 진보단체 동향 보고 등을 참조해 작성됐다는 진술을 확보했다는 소식이다. 이병기 전 국정원장의 자택 압수수색도 그와 관련돼 이뤄졌다.
지난해 7월 국정원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문제와 관련해 국민연금 투자위원들의 성향을 분석, 안종범 당시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에게 보고한 정황도 특검에 포착됐다. 이 보고를 한 부서는 국정원내 국내 정보 수집 담당으로, 그 부서 책임자는 최씨 관련 정보를 우병우 전 민정수석과 안봉근 전 비서관에게 직보한 사실이 드러났던 인물이다. 해당부서 전체가 청와대 정치 공작의 손발 노릇을 한 셈이다.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공개된 ‘대법원장 사찰문건’도 국정원 작품일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권에서도 국정원의 사찰과 공작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었음이 한층 분명해졌다.
기본적으로 박 전대통령의 역사관을 보면, 대선 직전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과 5·16 쿠데타에 대해 ‘역사가 평가할 것’이란 전제하에 극히 호의적인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2007년 7월19일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 청문회에서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80개가 훨씬 넘는 나라들이 독립을 하거나 새로 탄생을 했다. 그 많은 나라들이 이른바 군사독재 정치를 겪었다. 그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개발에 성공을 한 나라”라고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더욱이, 며칠 뒤 방송토론에선, 5·16에 대한 찬반 논란을 고려-조선 왕권 교체기에 빗대기도 했다.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대해 포은 정몽주 선생과 세종대왕의 평가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두 분이 똑같은 얘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발언했다. 박정희는 이성계, 자신은 세종대왕, 그리고 박정희 시절의 희생자들은 정몽주로 비유한 셈이었다. 고려 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는 정몽주를 제거한 것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일파였고, 세종대왕은 이방원의 아들이었음을 비유, 5.16후 인권 및 정치세력 탄압을 미화했다.
하자면, 당시 박근혜 후보는 그렇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5·16과 유신이 그 시점의 한국에 반드시 필요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1989년 인터뷰에서도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 과연 5·16과 유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나?”라고 묻기도 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과장됐다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발표에 대해서도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불쾌감을 드러내기 까지 했다.
국정원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에도 끊임없이 정치적 논란에 휩싸여 왔다. 대선 댓글 공작,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민간인 해킹의혹 사건 등으로 국가 최고 정보기관으로서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 반면, 정작 북한 정보 수집에서는 숱한 허점을 노출했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지뢰 폭발 사건 등 북한의 도발을 사전에 탐지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본연의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엉뚱한 일에 관여하면서 잡음만 일으킨 형국이었다.
최대 피해자 YS·DJ…역사교훈 남겨
이른바 오늘날 논란중인 '블랙리스트'의 역사는 정보기관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인권탄압' 폐습의 심각성을 증언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YS) 이야말로 지난날 YS진영 전체가 중앙정보부 안기부의 사찰 탄압 주대상이었다. 지난 79년,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행사해 줄것”을 미국에 촉구까지했던 YS의 '뉴욕타임스'인터뷰 내용은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확인케한다. 현재 YS 주변에서 상기되는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군사정권 시절 YS에 대한 정치자금원 차단과 정보기관의 감시 실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최근 YS의 한 핵심 측근은 "박정희정권 시절 김종필씨가 공화당 의장을 할 때도 전화도청, 정치자금원 차단을 하는 등 여권 내부의 공작정치는 심했다"면서 "이런 과거의 관행들은 YS가 범여권으로 들어간 3당합당 이후에도 YS를 대상으로 지속됐으며, 그것은 경제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분들에 대한 당국의 세무사찰 등이 그 실질적 사례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도청 및 기관원 접근등의 형태로 정보기관의 감시가 계속되었다는 증언이었다.
때문에, 당시 상도동의 비서진들은 도청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갖고 있었으며, 모두들 도청이 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YS 핵심측근인 김덕룡 전 의원은 "기존 관행에 따른 정보수집활동이라면 처음부터 문제제기도 안했을 것" 이라며 "우리의 경우는 정보기관들이 일상적으로 보이는 활동을 통해 수집된 정보들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문제였다"고 '공작차원'에 대한 설명도 내놓았다. 또다른 한 측근 의원은 그 '공작정치' 이유에 대해 "당시 YS 견제를 위해 민정계인 박철언 전 장관측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것으로 YS는 확신하고 있었다"고 언급, 공작정치 논쟁이 당권경쟁, 나아가 '차기대권'를 염두에 두고 전개되었음을 강력 시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 역시 마찬가지였다. 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약 30년간 역대 군사정권하에서 온갖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그는 1973년 8월 엄혹한 독재 시절에 40대 기수론으로 박정희 정권에 맞서다가 납치당해 현해탄에 수장될 뻔했고,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등장한 전두환 정권에서는 사형선고, 투옥 6년, 망명 10년, 가택연금 55차례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군사독재정권 때부터 ‘좌파’ ‘빨갱이’ 등 색깔론에 시달려온 DJ는 5·16 쿠데타로 4월 혁명을 뒤엎은 박정희씨의 최대 정적으로서, 5·17 쿠데타와 광주참극의 주동자들인 전두환·노태우씨가 가장 탄압하고 견제한 정치지도자였던 것이다. 정통성 없는 5공 정권은 그의 이름 석자 자체를 금기(禁忌)시했지만, 그럴수록 ‘김대중’은 ‘김영삼’과 더불어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국민들에게 각인됐다.
그러므로 문민정권 출범후 ‘김영삼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난 시대의 부정과 비리가 파헤쳐지고, 박정희 정권 군부통치에 기반을 둔 수구세력 일부가 정리되는 것은 불가피한 '역사'였다. 군사정부 정보기관의 물리적 탄압을 심하게 받았던 대표 정치인으로는 YS의 최측근중 한사람인 최형우 전 내무장관이 있다. 그는 스스로 말했듯 “중앙정보부에 여러번 끌려 가서 물고문, 전기고문, 잠 안재우는 고문, 온갖 인간 이하의 고문을 받아본” 인사였다.
역대 상당수 정권들은 이렇게 고문정권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았다. 이승만 정권 때의 특무대와 사찰경찰, 헌병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군특수부대, 대공관계 경찰, 그리고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의 비슷한 기관들이 고문의 대명사였다. 진정한 민주화는 고문 없는 사회의 건설로 끝난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승만.박정희 공과(功過)…'박정희 업적' DJ도 인정
물론, 현대사에서 공과(功過)가 확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오늘날까지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시대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조국 근대화의 기치아래 경제성장을 이끈 지도자라는 것이 찬양론자들의 논거인 반면, 비판론자들은 그를 경제개발을 빌미로 한 '유신 독재자'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찬양론자들의 시각은 '경제성장 엔진의 재점화와 국민행복 증진'이라는 오늘의 시대적 과제가 바로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의 고속성장 추억 연장선상에 맞물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할것이다.
역사적 관점에 따라서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과 경제 치적 대통령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일이 중요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두 사람은 말년 독재권력자로서 비판 속에 물러나 정치인생을 불행하게 마감했고, 이들에 의한 피해 당사자들이 아직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는 위인들의 공과를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가르친다. 흠 없는 사람은 없다. 흠만 부각시켜 매도할 경우 우리는 단 한 사람의 존경할 인물도 찾지 못할 지도 모를 일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국가경제 성장주도 대통령 박정희 장군의 위상_. 역시 고려해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그들이 자유 대한민국에 끼친 절대적 공훈의 측면은 분명히 살아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경우, 절대권력 독재자로 4.19 혁명에 의해 퇴진하고 말았지만, 불과 20대 초반 독립협회 사건으로 일본 치하 감옥에서 7년을 지내고 도미,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가 된 그의 평생은 한국의 자주독립국 건설 의지와 독립운동 일변도였다. 이어, 그는 자유와 평등, 개방을 부르짖으며 공산주의와 투쟁했고, 6ㆍ25 한국전쟁을 오히려 한ㆍ미 동맹 체결로 연결시키는 외교적 역량을 과시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역사다.
한편,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마디로, 한민족의 보릿고개를 세계 13대 경제강국으로 만든 주역이다. 국내 친북 좌파들의 준동이 공산화 우려를 깊게 하자, 정치적 무리수를 남용한 측면도 있지만, 역시 그의 일관된 통치력은 국가경제력 강화와 국가안보에 큰 도움이 된 것은 틀림없다.
오죽하면, 지난 1999년 5월, 김대중 전 대통령조차 집권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본향인 대구에 내려가, 박 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고 추모사업을 지원하겠다고 밝혔겠는가. 김 전 대통령의 이같은 평가는 그가 '박정희 시대'에 가장 핍박받은 정치인이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역사적 공과와 관련, "6.25전쟁의 폐허속에 허덕이던 우리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국민 역량과 국가 에너지를 경제 건설에 집중시켰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바로 이것이 원동력이 되어 산업화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평가였다. DJ는 그렇게 박정희 '공(功)의 측면'을 기탄없이 인정했다.
따라서, 지금 비판받고 있는 박정희의 '10월 유신' 또한 당시 그의 굳은 '경제개발신념'과 당시의 '경제현실'을 좀 더 자세히 접목해 보면,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는 일각의 주장에도 설득력은 있어 보인다. 이들 분석에 따르면, '유신'은 급격한 국제 질서 재편 과정에서 추락 위협에 처한 나라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단행된 측면이 강하다는 논리다. 다시 말해, 당시 국제 정세는 월남 패망이 가시화되었고, 닉슨 독트린으로 한국의 안보가 구조적 불안으로 밀려들던 때였다. 또한, 미국과 중국은 화해를 모색하는 중이었고, 북한의 도발은 강도를 더해 갔다. 1968년에는 박 전 대통령 을 암살하기 위해 무장공비가 청와대 인근까지 진출하는 사건이 터졌다. 당연히 국가안보 논리가 깃발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는 논지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장 사건도 일어났다. 박정희.육영수 부부에 대한 저격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 외무부 기록문서는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목숨을 잃었던 한국현대사의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대략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다. 즉, 주범인 문세광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영향력을 뻗치고 있던 일본의 해외동포단체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의 지령을 받았다는" 분석이었으며, 다른 기관들에서는 "공산주의를 믿는 단순한 공산주의자"라는 진단도 나왔다. 경상남도가 본적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던 문세광은 오사카 재인한국인 거류민단에 가입했지만, 어려서부터 공산주의 서적에 심취했다는 사실은 日.韓 조사기관들의 공통된 추론으로 나왔다.
'박정권 유신정치' 논리 대립구조 계속 치열
5·16 군사정변 이후 경제개발이 나름의 성과를 냈지만, 유신 직전 국가 경제성장률이 다시 급속하게 악화된 상황이 박 대통령 특유의 새로운 정면돌파 전략을 부른 요인(要因)으로 압축된다는 것이 친박인사들 나름의 설득력있는 분석이다. 즉, 바로 그 당시는 석유 위기의 기운이 높아가고, 세계가 급격한 경기후퇴의 길로 들어서는 국제경제 흐름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때문에, 1969년 무려 13.8%를 기록한 한국 경제성장률은 1972년 5.8%로 뒷걸음질쳤다. 실로, 돌파구가 필요했다. 때문에, 그 해의 소위 8·3조치는 사실상 '유신'의 서막이었다는 얘기였다. '8.3조치'는 초법적인 사채 동결과 세제 개혁 조치로써, 대통령 긴급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됐다. 전체 기업의 45%가 부실 기업이라는 판단에 근거했다.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자원 총동원령도 내려졌다. 바로 이것이 유신의 본질이기도 했다는 지적들이다.
특히, 당시 한국 경제 견인차의 중심을 197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강압적인 자원 배분이 필요했고, 철권(鐵拳)이 요구된 것도 어쩔 수 없는 '경제현실'이었다. 따라서, 유신독재는 철강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전자 등 중화학공업을 추진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기도 했다는 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 측근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 국제적 관점에서도, 어느 나라치고 중화학공업을 순탄하게 육성한 곳은 없었다. 독일과 일본은 전쟁으로까지 치달아 갔다. 그것은 한마디로, 역사의 모순이요 복잡성이며 간지(奸智)이기도 했다.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한 경제 제 2도약 전략에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확실한 과(過)가 있음은 엄연한 역사다. 공작밀실정치.인권탄압이 일차적인 것이고,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영호남갈등 등 지역주의와 부정부패가 그 시기에 잉태되거나 확산된 것도 역사의 진실이다. 이 방향의 문제제기도 평가대상에서 결코 소홀히 되어선 안된다. 핵심의 고리는 역시 오랫동안 '박정희'의 공과를 두고 대립 항쟁해 온 두 가치, 즉 공과를 둘러싼 세력들이 아직도 현실정치에서 화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여전히 치열하기만 하다. 민주 자유 복지를 향햔 국민복지시대 선진미래가 꾸준히 열려만 간다면, 언젠가는 화해의 단서를 잡을 수도 있지 않을 지,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밀실정치 산실 '안가' 권력욕구…차세대 교육까지 왜곡
박정희.전두환 군부정권 아래 저질러진 공작정치의 실상은 실로, 그 후에도 많이 드러났다. 의문사진상규명위의 조사 결과, 80년대 초 대학생들을 강제 징집하여 특별 정훈교육과 프락치 공작활동을 벌였던 '녹화사업'은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권력 최고위층에서 입안, 녹화사업 대상자만도 무려 110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유신독재 때의 대표적인 의문사 가운데 하나인 고 최종길 서울대 교수의 경우, 당시 중앙정보부가 최 교수를 상대로 공작을 벌였기 때문으로 확인됐다. 과거 군부정권 아래 빚어진 온갖 인권유린과 공작정치를 생각하면, 이 두 사건마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공작정치에 가담했던 인물들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건재하고 있다. 나라의 정기를 바로잡고 후손들에게 정의로운 사회를 넘겨주기 위해 친일과 군부 독재의 범죄는 반드시 청산돼야 마땅하다.
지난 1993년 처음으로 공개된 이른바 '안가'의 모습은 군사정권의 '공작정치' '밀실정치'의 강도가 어느정도 였는지를 추정케 했다. 총 1만 평이 넘는 부지 규모도 규모려니와 12개 동의 건물은 그 내부장식이 실로 호사의 극치였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숨겨져 있던 군사정권의 얼굴이 새삼 확인된 셈이었다. 안가는 '안전가옥' 이라는 이름그대로 정권 안보를 모의하는 현장이었고, 밀실 음모정치의 산실로 권력 보위를 위한 갖가지 각본이 그곳에서 짜여졌다.
'10·26사건'을 계기로 안가의 모습은 국민의 의식 속에 그렇게 인상지워졌었다. 심지어 10·26사건 이후에도 중대시국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 안가는 '대책회의' 장소로 이용돼 왔다. 관계 당국자들이 일반 국민의 시각에서 완전히 차단된 안가의 밀실에서 회의를 갖고 내리는 결론은 거의 반민주적 강압대책뿐이었다. 박정희 정권시절 조성된 후 최소한 5공까지 십 수년동안 안가는 그토록 음험한 곳이었다. '안가'에서의 결정에 따라 지난 1979년 8월 박정희 유신정권은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을 강제연행하기 위해 1000여명의 경찰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야당 의원들이 폭행을 당하고, 여성노동자가 투신 사망하는 비극적 사건도 발생했다.
결국 유신정권은 곧이어 발생한 부마항쟁과 10·26 사건으로 붕괴했다. 정권이 언론을 탄압하고 노동계 전체를 적대시하면, 필연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진실을 재확인 시켰다.
뿐만 아니었다. 군사정권의 폐습은 그후 자라나는 학생들에 대한 '역사교육'의 왜곡으로까지 이어졌다. 한때 교육과학기술부는 1만여 초중고교를 대상으로 '기적의 역사'라는 제목의 영상물과 책자를 배포했다. 그 내용은 헌법이 수용한 역사적 판단조차 무시하는 등 거의 정치 선전물에 가까웠다. 철저하게 수구세력이 승리한 역사만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었다. 예컨대 이승만 시기만 보면, 해방공간의 혼란과 친일청산 실패, 남북분단과 6·25 비극, 발췌·사사오입 개헌과 이승만의 헌정질서 파괴, 정적 암살 등 공작정치와 3·15 부정선거, 그리고 4·19 혁명 등은 지워지고 없었다.
박정희 시절 역시 군부 쿠데타와 6·3 사태, 3선개헌과 유신헌법, 공작정치와 인권유린, 노동자 농민의 희생과 불균형 성장 정책 등에 대한 조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부마항쟁·광주항쟁· 6월항쟁 등 민주주의의 역사는 지워져 있었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자명했다. 독재세력과 그들에 빌붙어 영화를 누렸던 수구·냉전세력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항구화하며,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일관성 국민신뢰 확보 - 수구세력 일대 革新을
정보정치와 공작정치의 시발은 '5ㆍ16' 군사정변이후 중앙정보부가 창설되면서 비롯됐으며, 이로 인해 자유는 말살되고 인권과 정치적 탄압은 계속돼 왔다. 박정희 정권과 함께 시작됐던 중앙정보부는 언제나 정권 안보에 위험스런 요소를 제거 탄압하는데 앞장섰고, 이러한 무소불위의 권력은 일부 개선된 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6공하의 안기부 흑색선전으로까지 이어졌다.
국민들에게는 정치 사찰과 공작 고문을 먼저 연상케 하는 공포의 기관으로 군림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정보정치와 공작정치하면 국민들은 반사적으로 거부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실제, 지난 날 국정원은 제대로 된 정보기관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군사 독재시절,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정적을 제거하고 탄압하는 공작 정치의 산실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 지금의 국정원으로 기관명이 바뀌는 등 시대 변화에 따라 많이 달라졌다고 하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역대 대부분 정권은 권력을 비호하는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국정원을 활용했고, 국정원 역시 정권의 충직한 손발 노릇을 해왔음을 거듭 상기케된다.
지난 61년 박정희 정권 초기, 김종필씨에 의해 중앙정보부로 출발한 안기부는 처음부터 정치에 깊숙이 개입, 공화당 사전조직과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일으켜 말썽을 빚었다. 그후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앞장서 추진하고 유신공작의 최고사령부가 됐는가 하면, 온갖 정치공작을 도맡아 국가 안보가 아니라 정권 안보의 첨병으로 기능해 왔다.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야당의원들을 협박·매수해 하수인으로 부리는가 하면, 강권 통치에 저항하는 학생 재야인사 정치인들을 남산 지하실에 끌고가 온갖 고문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러한 인권 탄압은 이땅에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숨막히는 공포 정치를 불러왔다. 81년 명칭이 정보부에서 안기부로 바뀐 뒤에도 정치개입 악습은 계속, 권력자만 바뀌었을 뿐 군부독재를 떠받치는 통치기구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국가정보기관은 명실상부 변해야 한다. 정치 사찰 관련부서를 폐지하는 대신, 해외 경제정보 수립기능 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정립되어야 마땅하다. 베일에 싸인 초법적 기관이 아닌 국민적 호응을 받는 투명한 기관으로 탈바꿈해야만 하는 것이다. 국정원 혁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가 됐다. 오랜세월, 이런 정치 파행의 근원이 돼온 한국의 수구.보수정치도 이제는 진정 거듭나야만 한다. 건강하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로서는, 일관성있게 우리조국 대한민국의 진정한 번영과 국가안위에 대한 국민적 믿음을 확고히 구축하는 방향으로 일대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 불행의 역사는 반복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병도는…
1952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했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후 1981년 연합뉴스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 야당출입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저서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