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박시형 기자)
류춘근 우일농산영농조합법인 대표의 혀 끝에 날이 섰다.
"미쳤다고 그런 계약서를 썼겠습니까?"
지난 2010년 7월, 우일영농과 '종가집 김치'·'청정원'으로 유명한 '대상그룹'의 계열사인 아그로닉스는 깐마늘 1㎏당 5000원대의 가격으로 총 400t을 매매하기로 구두계약했다. 류 대표는 아그로닉스의 제안을 이미 몇 차례 거절했지만 대기업과의 꾸준한 거래에 기대를 걸고 납품하기로 했다.
당시 마늘 가격은 작황이 좋지 않아 들썩거리던 시기다.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발표한 시세표에 따르면 2010년 7월 깐마늘 중품 도매가격은 1㎏당 6400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마늘값 폭등해도 농민은 손실 보고…
'계약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에 류 대표는 아그로닉스 측과 이면 거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올해 마늘 가격이 이렇게 뛸 줄 몰랐으니 계약서대로 납품해 주면 다음 해 예산 편성에서 부족분을 채워 주겠다는 것. 그는 이 내용이 정식 계약서가 아닌 실무자의 수첩에 기록됐다고 말했다.
류 대표는 실무자가 다른 업체들의 입찰단가까지 알려주며 자신이 납품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전했다. 입찰 단가는 낮게 써 낼수록 선정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정보다. 그는 "내가 어떻게 다른 업체의 단가를 알겠냐"며 사측의 다른 제안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계약이 성사된 이후에도 마늘가격은 연일 고공 행진했다. aT는 저장업체를 통해 농산물을 유통시키던 관례를 깨고 직접 시장에 개입했지만 가격 안정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계약가격으로 인한 잠재적 손실이 커지자 류 대표의 마음도 급해졌다. 아그로닉스는 그의 말을 수용하고 가격을 분기마다 2~300원씩 인상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듬해 1월 김장철이 끝난 후 사측의 발주는 뚝 끊어졌다.
류 대표가 주장하는 손실액은 납품한 물량에서 3억 원, 납품하지 못한 물량을 처분하면서 4억5000만 원, 처분하지 못한 물량 2억5000만 원 등 도합 10억 원가량이다.
류 대표는 "아그로닉스가 손실 보전해 줄 테니 기다리라고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기다림은 2011년 마늘 수확기가 될 때까지 계속됐다. 아그로닉스는 7월과 8월이 돼서야 시세와 비슷한 1㎏당 4500원씩 12.7t, 8.2t을 매입했다. 하지만 류 대표는 "회사가 이미 계약한 업체가 있다면서도 100원~200원 싸게 납품하면 받아주겠다고 했다"며 거래 의도를 의심했다.
아그로닉스, ˝일방적 계약 파기 아니다˝
아그로닉스의 말은 류 대표의 주장과 정반대였다. 아그로닉스는 2010년 12월 류 대표를 비롯한 공급업체 세 곳과 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했다고 주장했다. 사측은 "당시 계약을 계속 강요했다면 오히려 불공정 거래였을 것"이라며 계약 해지는 상호 공생을 위한 방안이었다고 해명했다. 7월과 8월의 거래를 짚으며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는데 추가 거래가 어떻게 이뤄지겠냐는 것이다.
아그로닉스는 류 대표가 주장하는 10억 원의 손해도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법인거래에서는 세금계산서를 발행하는데 손해난 계산서를 제출한다면 피해금액이 명확해진다. 류 대표는 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그로닉스는 "진행 중인 민사소송에서 손해액을 1억1000만 원으로 축소시킨 걸 보면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라며 류 대표의 '이면 거래' 주장을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아그로닉스는 오히려 류 대표가 마늘 물량을 맞추지 못해 시장에서 직접 구입하는 바람에 7000여만 원의 피해를 봤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계약해지 당시에는 아무 말 없다가 2년이 지난 2013년 1월에서야 문제 삼는 저의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광주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사건을 아그로닉스 측의 무혐의로 처분했다. 공정위는 그 이유에 대해 △대체 거래선이 있었던 점 △아그로닉스의 거래거절로 인한 경쟁 제한성을 인정하기 힘든 점 △aT의 가격통계가 계약가보다 높아 시장상황이 불리하지 않았던 점 △아그로닉스가 미거래 물량에 대해 높은 시장가격으로 스폿(SPOT) 구매한 점 △다른 공급업체의 경우 발주 중단에 대해 양해가 있었고 계약 물량을 시장에서 처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한 점 등 어려운 말을 늘어놨다.
공정위 관계자는 "해당 사건이 분쟁조정위원회에서도 장시간 논의가 이뤄졌지만 불공정 거래에 대한 객관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공정위로 돌려보냈다"며 "재조사에서도 무혐의 결과가 내려졌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류 대표에게 손해배상 등과 관련한 문제는 민사 절차를 통해 원만하게 해결하라는 친절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 남용, 공정위 조사 제대로 했나?
정작 농산물 유통을 관리하는 aT의 말은 달랐다. 마늘은 비상장 품목으로 경매를 할 수 없어 정해진 시세가 없다. 때문에 도매시장 거래 가격을 마늘가격의 근거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aT 관계자는 "마늘은 다른 농산품과 달리 한철만 생산되는 품목이라 도매시장 대부분이 필요한 만큼만 저장업체에 발주하기 때문에 거래 가격에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인즉, 마늘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직접 판매하지 않는 이상 처분이 힘들다는 의미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도매시장에서는 물건을 공급하는 업체들이 이미 자리 잡아 일회성 거래는 진입이 힘들거나 매우 낮은 가격에 성사된다. 공정위의 ‘시장상황이 불리하지 않았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
또 '대체 거래선'이 있었다는 부분 역시 납득하기 힘들다. 류 대표는 풀무원, 한화 등의 대기업들과 거래했던 점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들 업체가 류 대표의 사정에 맞춰 계약한 물량보다 더 받아가길 기대하는 건 무리다.
아그로닉스가 시장에서 SPOT 구매해 입은 피해에 대해 류 대표는 "회사가 요구하는 물량대로 공급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그로닉스는 매월 33~35t씩 구두로 주문을 했다. 계약서에 명시된 이메일이나 팩스 발주는 한번도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측의 필요로 SPOT 구매한 손해를 업체에 떠넘기는 꼴이다. 지난해 한창 논란이 됐던 갑을관계와 똑같은 모습이다.
류 대표는 아그로닉스가 타 업체에는 손실을 보전 해줬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계약 해지한 12월 이후 마늘값이 하락하는데도 아그로닉스는 훨씬 높은 가격으로 기존 업체에 주문했다.
현재 류 대표의 우일영농은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법에 민사소송을 제기해 둔 상태다. 그는 이번 소송에 실무자와 나눴던 손실 보전에 대한 대화 녹취록을 증거로 제출할 예정이다. 아그로닉스는 공정위에서 무혐의 처분까지 난 마당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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