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싸라기눈이 흩날리던 2015년 11월 26일, 국회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의 거목, 문민(文民)의 시대를 연 지도자. 거창한 수식어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결식은 쓸쓸했다. 국회의사당 잔디마당에 놓인 의자는 절반이 넘게 비어있었다. 심지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건강상의 이유’로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의 국가 장례 영결식에 현직 대통령이 불참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영삼 서거 이후 한동안 뉴스에선 그의 업적과 발언들이 재조명됐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1979년 의원직 제명 직후), “내가 가려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을 전두환이 빼앗지는 못해”(1985년 가택연금 당시).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권력을 향해 서릿발 같은 호통을 날릴 수 있었던 그의 존재는 민주주의 시대가 언젠가 열릴 거라는 보증서와 같았다. 송호근 한림대학교 도헌학술원 원장은 당시 한 칼럼에서 “민주주의를 막연한 동경이자 환상처럼 느꼈던 암울한 시대에 김영삼은 그것을 희망의 유일한 현실로 변환시킨 박동기였다”며 그를 “민주화의 트램펄린”이라고 표현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그를 추모하는 메시지가 잇따랐다. 하지만 김영삼을 향한 추모는 흘러간 한국 현대사에 띄워 보내는 편지와 같았다. 현실에서 그의 뜻을 받들겠노라는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보수는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진보는 외면했다.
사실 김영삼은 국민들에게도 인기가 별로 없는 대통령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2014년 10월 한국갤럽은 전국(제주 제외) 만 13세 이상 국민 17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을 물었다. 1위는 노무현(32%), 2위는 박정희(28%), 3위는 김대중(16%). 김영삼은 박근혜(5%), 이명박(3%), 전두환(1.9%)에 이은 7위(1.6%)에 기록됐다. ‘민주화의 거목’이 ‘광주 학살의 주역’보다 인기가 없다는 건 일종의 블랙 코미디 같다. 그러나 실존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한국갤럽은 올해 4월 같은 조사를 진행했다. 3월 22일에서 4월 5일까지 1,777명에게 면접조사원 인터뷰를 진행했다. 톱3(top3)는 바뀌지 않았다. 노무현(31%), 박정희(24%), 김대중(15%). 그 사이 대통령을 지낸 문재인(9%)과 윤석열(2.9%)이 4, 5위를 차지했다. 이승만(2.7%), 박근혜(2.4%), 이명박(1.6%)이 뒤를 이었다. 김영삼은 9위를 차지했다. 그의 뒤엔 노태우(0.4%)가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인기 없는 이유는 한 단어로 설명이 가능하다. IMF 외환위기다. IMF를 기억하는 세대에게 김영삼은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국란이라는 외환위기를 막지 못한 원흉이다. 그다음 세대에게는 노무현과 박정희 사이 어딘가에 있는 그저 그런 대통령이다. 이룬 업적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대통령. 이제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대통령. 하지만 김영삼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을 뿐,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가 김영삼과 같은 스타일의 정치인을 갈망하고 있는 이유에서다.
IMF 외환위기로 덮인 문민정부의 빛나는 성과
김영삼만큼 많은 성과를 단기간에 달성한 대통령은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년. 5년은 국가적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 전방위에 걸친 개혁 과제들을 대대적으로 추진했고 완수했다. 군사독재가 완전히 물러난 뒤 등장한 첫 문민정부라는 정당성과 좌고우면하지 않는 그의 불도저 같은 성정이 결합된 결과다. 덕분에 그 시기 우리는 오늘날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은 취임 직후부터 단행됐다. 1993년 2월 27일, 그는 첫 번째 국무회의 자리에서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공개하며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의 서막을 열었다. 깜짝쇼라는 비판이 있었으나 사실 공직자 재산공개는 1964년 민정당(전두환의 민주정의당과 다른 민주당계 정당) 의원으로 미국을 순방하던 시절부터 구상하던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선 대통령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김영삼은 재선을 노리고 있던 현직 대통령 린든 존슨이 스스로 재산을 공개하는 모습을 보고 투명한 공직사회를 향한 국민적 열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3월 8일엔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을 깜작 해임하며 하나회 숙청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전두환의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는 그때까지도 군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외신들은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만 해도 “당분간 군대와 동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영삼은 문민 통제의 기반을 확실히 마련하지 않으면 군사쿠데타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4차에 걸쳐 하나회 출신 장성들을 모두 몰아냈다. 영관, 위관급 장교들에게도 인사상 큰 불이익이 주어졌다. 한때 대한민국을 주름잡던 하나회는 반년도 지나지 않아 씨가 말랐다. 그해 8월 12일엔 금융실명제가 도입됐다. 기득권의 거센 저항이 예상됐던 만큼 김영삼은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금융실명제를 빠르게 도입했다. 정부는 2년 뒤 부동산실명제도 도입함으로써 투명한 시장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개혁은 국가적 단위에서 개인의 일상까지 넓은 층위에서 진행되었다. 많은 이들이 문민정부의 개혁이라고 하면 조선총독부 철거 같은 걸 주로 떠올리지만, 쓰레기 종량제 도입같이 일상에서 일어난 변화도 작지 않았다. IT 강국의 마중물이 된 정보통신부도 이때 출범했다. 1993년 2분기와 3분기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률이 83%에 육박했다(한국갤럽). 지금까지 그 어떤 대통령도 이 기록을 넘지 못했다. 당시 MBC가 진행한 한 앙케트는 김영삼 대통령을 향한 국민들의 성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청소년 5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의 100대 스타’를 물은 그 조사에서 김영삼은 당대 최고 연예인 최진실과 스포츠 스타 허재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요즘으로 치면 청소년들에게 손흥민과 로제(블랙핑크)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인기가 많은 격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김영삼이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된 이유
굵직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IMF 외환위기의 충격은 컸다. 태국을 필두로 인도네시아, 홍콩,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전역에 금융위기가 불어닥쳤다. 한국도 그 높은 파고를 피할 수 없었다. 한보철강을 비롯해 기아그룹·한신공영 등 굵직한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를 일으켰다. 원·달러 환율이 두 배 넘게 뛰었다. 쌓아둔 외환은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우리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1997년 12월 3일 IMF 체제가 시작됐다. IMF는 우리에게 고강도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수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렸다. 그들의 가정은 무너졌다.
오늘날 4050세대는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지지기반이다. 이들은 사람이 나이 들수록 보수화된다는 ‘연령 효과’가 무색하게 보수 진영에 대한 반감이 큰 게 특징이다. 그 아랫세대보다 진보 진영을 지지하는 강도가 강하다. IMF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청년·청소년기에 외환위기 충격을 직접 맞닥뜨린 세대가 김영삼과 보수정당에 감정이 좋기 어렵다. 이들에게 김영삼과 신한국당(현 국민의힘)은 망국을 막지 못한 대역죄인이다.
김영삼의 낮은 인기가 비단 IMF 외환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진영을 초월한 개혁은 역설적으로 그를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는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면 진영의 유불리에 상관없이 과감하게 추진했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공직자 재산공개다.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박양실 보건사회부 장관, 허재영 건설부 장관, 김상철 서울시장 등 문민정부 인사들의 부정 축재 의혹이 불거졌다. 여럿이 옷을 벗었다.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대통령은 공직자 재산공개 도입 의지를 꺾지 않았다. 보수정당 핵심 파트너인 재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융실명제를 관철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제 뼈와 살을 깎는 개혁이었다.
대통령 직무 수행만 놓고 보면 사실 김영삼 반대편에 있는 건 박정희나 김대중이 아니라 문재인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선 기간 한국 사회의 묵은 폐단들을 개혁하겠다며 적폐청산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그 적폐청산이란 대개 상대편 인사들에 대한 수사였다. 검찰 특수부를 확대하고 그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국정농단 수사 검사 윤석열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검찰총장으로 초고속 승진시켰다. 그런데 검찰총장이 된 그가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일가의 각종 의혹을 수사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때 핵심적 역할을 맡았던 특수부 검사들은 적폐로 몰렸다.
이윽고 정부 여당은 검찰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국가적으로 반드시 추진되어야 하지만 반대가 심할 것 같은 일은 손도 대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모든 정부가 연금 개혁을 추진했지만, 유독 문재인 정부만큼은 연금 개혁의 ‘연’자도 꺼내지 않았다. 불편한 일들은 피한 결과 그는 임기 후반에도 높은 지지율을 누렸다. 뚜렷한 성과가 없는데 여전히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꼽힌다. 국민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욕을 먹더라도 하는 대통령과 지지율을 유지하기 위해 욕먹을 일은 하지 않는 대통령, 어느 쪽이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대통령인지는 자명하다.
YS와 닮은 MZ세대의 실용주의
요즘 2030세대가 즐겨 찾는 유튜브 채널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구조개혁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 수도권 집중, 높은 집값 등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단기적 미봉책이 아닌 사회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청년층에서 한국은행 총재가 회자되는 흥미로운 현상도 나타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해 5월 “교육·노동·연금 등에서 구조개혁이 안 되는 건 이해당사자 간 사회적 타협에서 진척이 없기 때문”이라며 “구조개혁 없이 재정·통화 등 단기정책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비판해 화제가 됐다.
이후 한국은행은 부동산값을 잡기 위한 명문대 지역 할당제, 농산물 가격 안정을 위한 수입 다변화 등의 정책을 제안했다. 논란이 된 정책도 있지만, 땜질 처방이 아닌 구조개혁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년들에겐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창용 총재는 빅뱅 리더 지드래곤의 이름을 본뜬 ‘창드래곤’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부패하고 무능한 보수, 정치적 올바름(PC주의)에 매몰돼 삶과 동떨어진 고담준론만 늘어놓는 진보는 세계적인 공통점이다. 얼마 전 끝난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 것 역시 그런 현상의 연장선에 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주목할 만한 건 라틴계 유권자들 상당수가 민주당 지지를 철회하고 공화당을 찍었다는 점이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꿨으나 비루하기만 한 현실은 스트롱맨을 향한 지지를 추동했다. 아시아와 유럽의 사정도 비슷하다. 사회 구조적 문제 해결은 내팽개친 채 정쟁만 답습하는 정치권에 대한 분노가 스트롱맨 내지는 극우 정당 돌풍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국민의 목소리, 시대적 사명을 외면한 기성 정치권의 책임이 가장 크다.
오늘날의 2030세대는 산업화, 민주화가 모두 달성된 이후에 나고 자랐다. IMF 외환위기에서도 한 발짝 떨어져 있다. 그만큼 특정 진영에 대한 반감이나 연대 의식이 적다. 보수나 진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보다, 눈앞의 구조적 문제들을 풀어나갈 용기 있는 정치인을 갈망한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그러나 과감한 용단을 요구하는 이들의 태도는 김영삼의 그것과 닮았다. 유튜브 등을 통해 소환되는 문민정부 시절의 화끈한 개혁에 열광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김영삼의 연설에는 유독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많다.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등에 업고 수십 년 독재와 싸운 그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국민의 무서운 힘을 보았다. 그래서 국민이 원하는 개혁이라면 손익을 따지지 않고 과감히 추진했다. 요즘 우리 정치는 반대다. 진영 간 대립이 심화하면서 국민의 요구는 뒷전으로 밀려버렸다. 이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염원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지루한 정쟁에 덮였다. 미래세대는 진영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국민을 위해 필요한 개혁이라면 과감히 결단할 줄 아는 정치인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다. YS가 떠난 지 9주기가 되는 이 시점에, 그의 시대가 언젠가 다시 도래할 거라고 믿고 있는 이유다.
이동수는…
198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진영논리를 넘어 일상을 바꾸는 정책을 만들자는 취지로 청년정치크루를 결성했다. 청년 세대의 목소리를 정치권에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를 갖기에 앞서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한국일보·조선일보·부산일보 등의 매체에서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캐스팅보트>, <진보도 싫고, 보수도 싫은데요>, <YS 세계를 보다>, <어른이 정치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