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당파, 야당 분열 막기 위해 DJ 신당 반대”
“통추, 독자후보 낼 역량 충분치 않은 것 인정”
“노무현,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 김원기라 말해”
“박정희 정권 후 지역주의 고질적 병폐 심화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같은 꿈을 꿨으나 동상이몽으로 흩어지고만 스타군단들이 있다.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는 야당 주류인 동교동계와 이기택계에 맞선 그룹이 주축으로 모여 만든 정치조직이다. 훗날 노무현이라는 통추 출신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국민들에게 제대로 호소할 수 있는 정치를 해보자는 뜻에서 당대 가장 시급한 화두였던 지역주의 청산을 내걸고 국민통합에 나섰다. 하지만 1년여 만에 김대중(DJ) 지지파와 반DJ파로 갈라져 해체되고 만다. 주류 정치를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로 건너가 보려 했던 ‘똘기 어린’ 실험 정신은 여전히 주목할 만하다. 크든 작든 한국 정치지형에 변화를 가져온 통추. 그들이 꿈꿨던 정치 개혁은 지금도 유효할까. 다시 만나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편집자 주>
1995년 7월 14일 김원기 노무현 이철 제정구 등 민주당 중도파들은 ‘구당과 개혁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김대중(DJ) 아태재단 이사장을 향해 신당을 창당하면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구당파 모임은 훗날 통추를 이룬다.
지난달 13일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난 김원기 전 통추 상임대표(이하 김원기).
그는 구당파 시절 민주당 부총재였다.
DJ와 이기택
- 구당파 모임에서 DJ 신당을 반대한 명분은 뭡니까.
“1995년 6월 제1회 동시지방선거에서 총 15명의 시도지사 중 집권 민자당은 5곳밖에 얻지 못했어요. 기초단체장은 민주당이 84석으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했어요. 비로소 지역주의 극복의 씨앗이 퍼트려졌고, 이대로 가면 민주당 중심의 대선 승리가 가능할 것으로 보였어요. 그런데 DJ가 신당 창당 방식의 정계복귀를 들고 나온 겁니다. 지역주의 대결로 돌아갈 위험이 컸어요. 야당 세력이 분열될 것이기에 DJ 앞에서 구당 모임을 결성해 반대한 거예요. 분당을 막고자 통합노력을 한 것이죠.”
하지만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원기는 민주당 부총재 당시 DJ 참모 그룹에 속했다. 동교동계 다수와 달리 국민회의에 가지 않고 기존 당에 남았다.
- 따라가지 않은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나는 민주당 안에서도 대통령 후보로 DJ를 지지했어요. 결국 DJ 가는 길로 갈 도리밖에 없다고는 봤지요. 그러나 분당하는 것은 내 방법하고 달랐어요. 당을 하나 또 만드는 것보단 있는 정당을 통해 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 생각했어요.”
- DJ가 민주당 안으로 들어와서 이기택 대표를 상대로 당권을 뺏을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굳이 당을 새로 만든 이유는 뭘까요.
“DJ를 지지하는 사람들끼리 여러 토론을 했어요. 나는 ‘DJ가 당 대선후보를 하겠다고 하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고 주장했어요. 이기택도 어쩔 도리가 없을 거다, 그의 직계도 DJ한테 갈 것이라고 한 겁니다. 그게 가장 수월하고 옳은 방법이라고 말했어요. DJ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당을 새로 만들었지요.”
- 그러게 왜 그랬냐는 것이죠.
“나중에 내가 DJ한테 그 문제 갖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수월한 방법이 있는데 왜 야권을 갈라지게 만들었습니까.’ 이런 소리 함부로 할 얘긴 아닌데….”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DJ가 그래요. ‘그 사람(이기택)이 내가 당에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나를 밀어줄 것처럼 하지만 말뿐이다. 절대로 밀어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를 내고 어떤 문제를 일으키면 일으켰지 순순히 밀어줄 사람이 아니다’고 하는 겁니다.”
- DJ가 은퇴를 번복하고 정계 복귀를 선언했을 때는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은퇴와 복귀 자체가 핵심이 아니고 민주화 시대에는 가장 잘할 수 있는 지도자가 도전해 책임 있는 권력을 담당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 DJ 가신 그룹과 인터뷰하다 보면 제왕적 면을 단점으로 꼽더라고요. 비서진도 모르게 ‘넌 요것만 해’ 이런 식으로 했다고 말입니다.
“그런 것까지는 잘 몰라요. DJ라고 하는 정치인은 내가 본 지도자 중 가장 훌륭한 분입니다.”
정계 입문 때로
- 10대 총선을 계기로 정계 진출했습니다. 제일 궁금한 것은 그때는 다 계보 정치였는데 누구를 통해 입문한 겁니까. 한광옥 전 대표나 이기택 전 대표 경우 예전 인터뷰할 때 신도환 계보 통해 정계 진출했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누구 계보라기보다 정치에 대한 꿈이라고 할까, <동아일보> 기자로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유력 정치인들이 나를 많이 밀어줬지요.”
- 신민당 공천은 어떻게 받은 건지요.
“내가 기자 생활하던 당시 <동아일보>는 자타공인 1위 언론이었어요. 이른바 야당지로서 정권 비판 보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서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을 집권당 국회의원이나 청와대 수석으로 많이 뽑아갔어요. 야당에서는 <동아일보> 출신이 없었지요. 이런 분위기에서 내가 출마하겠다고 하자 사주 측과 기자와 직원들이 ‘신민당에 <동아일보> 기자를 하나 보내자’ 해서 내가 추천을 받게 된 겁니다.”
- 그럼 공천은 쉽게 받은 거네요?
“쉽게 받은 것은 아니죠. 우리 지역은 공천되면 당선된다고 봐야 되니까 전부들 자기 계보를 내세우려 했으니까요.”
10대 총선은 1978년 12월 치러졌다. 김원기는 전북 김제-정읍에 출마했다. 정읍은 그의 고향이다. 중대선거구로 한 지역구에 2명씩 뽑을 때였다. 정읍에선 민주공화당 후보와 동반 당선됐다. 이철승은 이광호, YS는 은종숙을 지원했다.
-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섰을 때는 정치규제에 묶였던 건지요?
“나같이 1년도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초선 출신은 상대적으로 정치규제가 느슨했어요.”
신군부로 인해 입법부마저 무력화되면서 정통야당이던 신민당은 해체되고 만다. 그 자리를 대신한 정당이 관제야당 성격이 짙은 민한당이었다. 정치규제에서 풀려나거나 묶이지 않았던 대다수 야당 정치인들은 민한당으로 모여들었다. 김원기도 민한당 소속이 된다.
- 11대 때는 신상우 의원이 거의 주도했다고 하던데 공천은 어떻게 받은 겁니까.
“그때도 틈새를 내가 뚫고 들어간 것이죠.”
- 당시 의정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광주 학살이나 삼청교육대, 안기부를 앞세운 신군부의 폭압 정치로 11대 국회 때는 제도권에서도 한계가 많았을 때예요. 국회에서는 나 보러 ‘지둘러’라고 했어요. 야당 대변인, 정책위의장을 하면서 안기부나 당 지도부가 부당한 간섭을 하면 그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좀 지둘러 봐라’고 나름대로 생각해 말했어요. 앵무새 노릇을 하지 않고자 한 거예요.”
- 12대 총선 때는 신민당에 안 가고 그냥 민한당 후보로 출마를 했잖습니까. 정대철 조윤형 의원과 인터뷰해 보면 본인들은 신민당에 가고 싶었는데 DJ가 민한당으로 출마하라 했다고 하더라고요. 마찬가지 이유인지요.
“우리 지역에서는 DJ가 미는 후보가 제일 유력하거든요.”
- 근데 떨어졌잖아요. DJ가 밀었는데도 낙선을 했네요. 미국에 있어서 힘이 거기까지는 못 미친 걸까요.
“그때는 DJ가 영향력 행사는 안 했죠. 직접 나서서 한 것이 아니니까요.”
김원기는 신민당 돌풍에 밀려 낙선했다.
DJ는 미국 망명 후 귀국한 뒤 민한당이 아닌 신민당으로 입당했다. 제1당이 된 신민당은 민한당을 흡수했다. 김원기는 “신민당이 제1야당이 되자 몇 달 안 있어 민한당이 자연히 통합해 단일대오로 나아가게 됐다”고 부연했다.
통추 출범 의의
화제를 돌렸다. 13대 국회 시절 평민당 원내총무로 지도력을 인정받지 않았느냐고 추켜세웠다.
“13대 국회는 1개 집권당(민정당)과 3개 야당(평민당 통일민주당 공화당)이 모두 정치 주역이었어요.”
돌이켜 회상하며 말을 이어갔다.
“집권당은 야당의 협조를 얻지 않으면 법안을 하나도 통과시키지 못하는 소수였고 3개 야당은 한 당만 빠져도 과반 의석이 되지 않았어요. 4개 정당의 지역기반과 이념은 각자 달랐지만 모두의 공통과제는 어떻게 5공을 청산하고 새롭게 민주화 시대를 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국정감사, 청문회 제도, 상임위원장 등 국회직 분점부터 권력기관 중립화 등 지금까지 정착된 개혁 조치를 하나씩 실현할 수 있었어요.”
이런 대화를 거쳐 다시 통추 전신인 구당파 얘기로 돌아왔다. 15대 총선은 민주당 잔류파 대다수가 낙선했다. 김원기도 고배를 마셨다.
- 분당해 나간 DJ 측의 방해가 컸다는 지적도 있는데 정읍은 어땠습니까.
“나는 고향 정읍에서 6선을 했는데, 매번 순탄하게 연전연승한 것은 아니고 12대와 15대 두 번 낙선을 했어요. 바람직한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고난을 무릅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 구당파 리더로서 이기택 총재와 당의 진로를 놓고 대립했습니다. 당내 개혁을 주도하려 했으나 주도권을 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치철학이나 결이 달랐습니다. 작은 정당이 된 민주당의 대표 자리를 놓고도 서로 경쟁했지만, 큰 의미와 성과는 없었습니다.”
- 이후 통추를 결성하고 상임공동대표를 맡으면서 출당까지 당하는데요. 통추 출범의 의의는 뭐로 봅니까.
“구당 모임의 일부는 국민회의에 합류했지만 대부분은 다가올 대선까지 대응하기 위한 모임 체를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지역주의 타파, 국민통합을 기치로 통추를 결성하게 된 것이지요. 통추에는 민주당 정치인들도 있었지만 신경림 송기숙 백낙청 이호철 같은 문화예술계와 송월주 박형규 김진홍 같은 종교계, 유창우 박찬석 같은 학계 인사들도 함께했습니다. 내가 상임대표를 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정치운동단체이기 때문에 상징성과 실행력을 갖춘 상임대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 15대 대선을 앞두고 독자후보론을 모색하다 흐지부지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DJ 이회창 후보와 대결할 수 있는 독자후보를 낼 정도로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 독자후보론의 노무현 후보를 설득해 DJ 쪽으로의 합류를 강권한 이유는요.
“노무현 후보를 독자후보로 내보자고 모색도 했어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군소후보가 될 가능성이 컸어요. 야권을 불열 시키느냐는 덤터기를 쓸 우려도 있었고요. 반면 DJ는 김영삼(YS)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과 민주세력 입장에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모아지고 있었어요. DJP(김대중 김종필) 연대가 합리적인 보수 세력에 안심감을 준 측면이 있다면 통추와의 합당은 범 민주 세력이 현실적으로 집권 가능성이 있음을 눈뜨게 해줬다고 봐요. DJ도 마치 왼쪽과 오른쪽 날개를 다 얻은 것 같다고 했어요. 대선의 낙관적 전망을 가능케 해줬다고 실제 내게 여러 번 그런 표현을 해줬지요.”
통추 멤버들은 대선 국면에서 DJ, 이회창 쪽으로 양분됐다. 김원기 김정길 노무현 원혜영 유인태 박석무 등은 DJ를, 제정구 이철 이부영 홍성우 등은 이회창을 지지했다.
- 미완으로 끝났지만, 어떻게 평가하고 싶습니까.
“통추는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지 않는 바른 정치인들의 운동 체였어요. 국민통합, 즉 지역과 세대와 남북을 통합하는 가치를 지향했어요. 현실 정치에서는 손해를 보는 것이 뻔한 데도 가치 지향 면에서 서로 독려했던 모임이었어요. 함께했던 고난의 시기에 한국 정치도 성숙해졌다고 생각해요.”
지역주의 타파 꿈
- ‘노무현의 정치적 스승’으로 불리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원래 노무현 전 대통령이 YS 당(통일민주)에 있었잖소. 나중에 DJ한테로 옮겨온 건데 그때 기자실에서 한 얘기가 있어요. 자기는 정치 시작을 YS 밑에서 하고 이제는 DJ 당으로 왔지만 제일 좋아하는 정치인은 김원기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노무현 정치’가 오래갔으면 지역주의 정치가 없어지는 데 상당히 결정적 계기가 됐겠지요.”
- 참여정부 때 국회의장, 열린우리당 공동의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주류로 활약했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좀 더 큰 꿈을 키워도 됐을 텐데 그런 건 없잖습니까.
“큰 꿈이라 하는 것은 대통령을 말하는 것일 텐데 내가 호남 출신 정치인이잖아요. 용기가 없어서라기보다 나는 냉정하게 판단을 하는 사람이에요. 도전은 할 수 있는데 당선될 가능성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어요.”
- DJ 경우 행보 면에서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다고 보는데 호남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측면이 있던 것일까요.
“왜냐하면 호남은 전국적으로 보면 소수거든요. 예전엔 특히 비호남 쪽에서 호남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가진 것에 대한 장애가 있었을 때예요. 누구 잘못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거죠.”
- 호남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은 박정희 정권이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박정희 정권 때 굉장히 심화됐지. 전에는 경상도 사람이 호남에 와서 국회의원 한 경우도 여럿이고 호남 사람이 그쪽에 가서 국회의원도 여럿 했어요. 조재천(전남 광양) 같은 분도 대구에서 국회의원(6대)을 했거든. 박정희 시대 같으면 상상도 할 수가 없어요. 어느 때나 지역주의 문제는 있었지만 정치를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렇게 고질적 병폐가 된 것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된 거예요.”
- 정치를 돌이켜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지역주의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는데 그렇게 잘 된 것은 아니에요. 극복되는 게 참 어려워요. 말로는 옳지 못하다고 하면서 전부 다 지역주의 구도에 묶이는 거예요. 어느 때 되면 극복은 되겠지….”
현직에 있을 당시 평소 정세 분석이 뛰어나고 합리적, 논리정연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고 전해진다.
요즘 정치권에 대한 단상을 물으니 “정치적 양극화가 제일 걱정스럽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통해 상당부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제언도 보태왔다.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는 “야당을 배제한 국정운영이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1937년생, 여든일곱이다. 걸음은 정정했지만, 돌발적 질문엔 기억을 멈추고 생각하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가물가물한 일들은 잘 모르겠다고 답해왔다. 끝나고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 주는 모습 속에서 푸근한 포용력이 느껴졌다. 보충이 필요한 부분은 서면 답변을 참조했음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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