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동 “독자후보, 제정구로 모아진 것 맞지만…노무현도 훌륭하다 생각” [통추 되짚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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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동 “독자후보, 제정구로 모아진 것 맞지만…노무현도 훌륭하다 생각” [통추 되짚기②]
  • 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 승인 2024.07.13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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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동 전 국회의원
“대권 의지 높았던 노무현, 자질 남달라” 
“지나고보니…김영삼‧김대중 역할 컸더라”
“한나라당 간 것은 통일 과업 소신 때문”
“국민회의 따랐다면 순탄했을 텐데 아쉬워”
“시대의 올바른 가늠자, 통추가 역할 해줘”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같은 꿈을 꿨으나 동상이몽으로 흩어지고만 스타군단들이 있다.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는 야당 주류인 동교동계와 이기택계에 맞선 그룹이 주축으로 모여 만든 정치조직이다. 훗날 노무현이라는 통추 출신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국민들에게 제대로 호소할 수 있는 정치를 해보자는 뜻에서 당대 가장 시급한 화두였던 지역주의 청산을 내걸고 국민통합에 나섰다. 하지만 1년여 만에 김대중(DJ) 지지파와 반DJ파로 갈라져 해체되고 만다. 주류 정치를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로 건너가 보려 했던 ‘똘기 어린’ 실험 정신은 여전히 주목할 만하다. 크든 작든 한국 정치지형에 변화를 가져온 통추. 그들이 꿈꿨던 정치 개혁은 지금도 유효할까. 다시 만나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편집자 주> 

 

국민통합추진회의 두번째로 박계동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사진은 박 전 의원이 지난달 14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민통합추진회의 두번째로 박계동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사진은 박 전 의원이 지난달 14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삼김 시대를 넘어 새로운 정치 세력화를 꿈꿨던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그 시절을 되짚는다. 두 번째 주인공은 박계동 전 국회의원(이하 박계동)이다. 지난달 14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만났다. 

박계동 = 1952년 경남 산청, 1972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1985년 민청련 대변인, 1986년 민통련 조직국장, 1989년 전민련 대변인, 1991년 야권통합추진위원회(평민당+민주당), 1992년 14대 국회의원(서울 강서갑), 깨끗한정치모임 운영위원, 미국 미주리대학교 언론연구소 객원연구원, 불교방송 라디오 <박계동의 아침저널> 진행,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후보 특보, 17대 국회의원(서울 송파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간사), 국회 사무총장, 한국택시협동조합 이사장 

 

통추 멤버들 중에는 재야 출신이 많다. 박계동도 그렇다. 이번 인터뷰는 통추 멤버 저마다의 뿌리일 수 있는 재야 투쟁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박계동은 1970‧80년대 군부 독재에 맞서다 수차례 연행된 바 있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 1980년 5월 계엄포고령 위반, 1987년 5‧3인천항쟁 주도 혐의로 3차례 투옥됐다. 수감된 시간만 4년 반이다. 

 

민청련에서 민통련‧전민련으로
공개적 반체제 활동 단체로 발전 
재야세력 합법화 정치 노선 꾀해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출신의 정치인이다. 대변인과 기관지 발행하는 일을 맡았다. 먼저 민청련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부터 부탁했다. 

“민청련에 앞서 민청협(민주청년인권협의회)이라고 있었습니다.”

- 두 개는 다른 조직입니까. 

“민청협이 발전해 민청련이 만들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박정희 유신 정권 때 태동했다. 

“그 무렵 재적 당한 학생 수만 8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일부가 모여 반체제 활동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파고다 공원에 사무실을 냅니다.”

박계동을 비롯해 장영달 홍성엽 장선우 등이 참여했다고 한다. 

“박 정권 때는 반체제 활동을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잖아요. 엄청나게 탄압을 받다 보니 견디지 못했습니다. 한동안 주춤해 있다가 1980년대 후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민청련입니다. 그때부터 사무실도 유지되고 공개적인 반체제 활동이 지속될 수 있었지요.”

전두환 정권의 강경 탄압으로 위축돼 있던 운동권 학생들은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자 1983년 9월 30일 선명 투쟁 노선의 민청련을 결성했다. 학생들부터 젊은 노동자, 농민들까지 결합했다. 1980년대 청년 민주화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발전해갔다. 상징물은 두꺼비였다. 뱀의 먹이가 된 두꺼비는 제 몸의 독으로 숙주를 죽이고 그 속에 알을 낳는다. 두꺼비 새끼들은 뱀의 사체를 자양분 삼아 성장해 몸 밖을 뚫고 나온다. 자신을 희생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잉태하겠다는 결의를 담았다. 

신군부로서는 눈엣가시였다. 1983년 11월 28일 안기부 요원들은 민청련을 급습했다. 의장인 김근태를 끌고 갔다. 집단 고문을 가했다. 박계동을 비롯해 민청련 간부들도 폭행당하고 회유 당했다. 굴복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모두 버텨냄으로써 그다음부터 공개적으로 반체제 활동을 벌이는 여러 단체들이 생겨날 수 있었지요.”
 

전민련 출신인 박계동(왼쪽부터), 이재오, 이부영, 김근태 등이 1989년 3월 27일 문익환 목사 방북에 즈음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전민련 출신인 박계동(왼쪽부터), 이재오, 이부영, 김근태 등이 1989년 3월 27일 문익환 목사 방북에 즈음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 예를 들면 어떤 단체들입니까.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련)부터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지하화 돼 있던 반체제 운동을 공개운동으로 전환한 계기가 돼줬지요.”

1985년 3월에는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상임의장 문익환)이 출범한다. 민중 민주 통일운동 세력의 대동단결을 기치로 내걸었다. 

출범하기까지는 12대 총선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YS(김영삼)가 주도해 만든 신한민주당(신민당)은 총선서 돌풍을 일으켰다. 상도동 동교동 할 것 없이 야당 정치인들을 규합해 정치결사체를 조직한 결과였다. 제도권 중심에서부터 이미 반독재 투쟁에의 불이 당겨지고 있었다. 재야에서도 이를 지켜보며 자극받고 있었다. ‘우리도 단결된 힘을 보여주자.’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민통련이었다. 

박계동은 “민통련이 탄생되면서 반체제 운동 전선의 구심축이 형성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민통련에서 조직국장을 맡았다. 

- 87 대선을 앞두고 민통련에서는 양김(김영삼-김대중) 중 누구를 지지했습니까. 

“부분적으로는 양쪽으로 분화돼갔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노선은 따로 피력하지 않았다. 당시 공식적으로 민통련 지도부는 DJ(김대중)를 지지하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 보면 또 다른 양상이 있는 듯했다. 그런가 하면 30년간 이어온 삼김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는 분위기도 민통련 내부에서 일찌감치 감지되고 있었다. 

“제3의 노선 내지 독자노선을 지지하는 흐름들이 표출되고 있던 겁니다. 이후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등으로 발전하며 재야세력 중심의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 논의가 커져갔지요.”

1989년 출범한 전민련(공동의장 이부영 이창복)은 민족민주 세력 중심의 전국 연합체 성격을 띠고 있다. 박계동은 민통련을 거쳐 전민련에서 활동했다. 

재야 세력들이 제도권 안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데에는 수배당하고 잡혀들어 가기 쉬운 비합법 투쟁으로는 운동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담보해낼 수 없다고 본 요인도 있었을 터였다.

박계동은 이에 대해 “비합법 투쟁만 계속할 것이 아니라 제도권 안에서 합법 투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인식으로 바뀐 것”이라고 보탰다. 

“기존 정치세력과의 결합 방식과 지지 성향 등에 따라 노선이 갈리긴 했지만, 진보 진영끼리 연합한 정치 세력화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연추(민주연합추진위원회)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1990년 4월 제정구 장기표 백기완 이부영 등은 민중정당 창당을 목표로 민연추 출범을 본격화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민중운동의 역량을 토대로 각계각층의 염원인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실현하고자 한다”며 자주 민주 통일 복지 등 4대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 등의 의사를 집중 대변할 것을 약속했다. 

민연추는 재야의 야권통합 기구인 범민주통합추진회의(통추회의)를 결성하고 민주당(3당합당 후 통일민주당 잔류파)와 평민당의 통합 추진에 전력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통일민주당 잔류파가 만든 꼬마민주당에 합류하며 조직은 와해되고 말았다.

 

재야 출신 정치인으로 출발  
노태우 비자금 사건 폭로
일약 스타 정치인 되기까지 


국민통합추진회의 두번째로 박계동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사진은 박 전 의원이 지난달 14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민통합추진회의 두번째로 박계동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사진은 박 전 의원이 지난달 14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계동도 재야 세력에서 넘어와 꼬마민주당에 합류한 경우였다. 1991년 6월 창당한 꼬마민주당은 같은 해 9월 신민주연합당(김대중 동교동계)과 신설 합당해 본격적으로 민주당을 출범했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재야에서 촉구하던 야권통합이 이뤄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박계동은 이듬해(1992년) 14대 총선에서 서울 강서갑에 출마해 당선된다. 

- 누구로부터 공천을 받은 건지요. DJ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것인지 궁금하더라고요.

“내 경우는 꼬마민주당계 몫으로 공천을 받았습니다. 유인태 박계동(본인) 원혜영 선배 등 재야 출신들 대부분이 그 과정을 통해 공천을 받은 거지요. 재야 운동의 중심부 입장에서는 DJ나 YS로부터 스카우트돼 정치권에 입문하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양김 밑으로 들어가는 대신 꼬마민주당계를 선택했다는 말로 들렸다. 국회의원이 되면서는 초선 의원들과 함께 ‘깨끗한 정치’ 선언을 주도했다. 한준수 전 연기군수와 관권 부정선거를 폭로해 노태우 대통령이 선거 중립 내각을 선언하도록 만들었다. 1993년 대정부질문에서 12‧12사태가 불법 군사 쿠데타인 점을 각인시켰던 주역이다. 예산결산특별위원으로서 안기부 비밀예산을 밝혀낸 것도 의정활동의 주요 성과로 꼽힌다. 

본격적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은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공개하면서였다.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고 묻자 박계동은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대한 루머는 시중에 이미 많이 나돌고 있었다”는 것부터 전해왔다. 

- 처음엔 서석재(YS계) 전 의원이 흘린 게 아닌지요. 

“그렇지요.”

1995년 8월 총무처 장관이던 서석재는 사석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두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이 4000여억 원 차명계좌를 갖고 있으며 측근 중 한 사람이 실명전환이 가능한지를 물어왔다’고 해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노태우가 대형 국책사업과 재벌들로부터 정치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야당 의원들의 주장이 잇따랐다. 

- 본인은 누구한테 들은 건지요. 

“나는 고등학교 후배로부터 비자금 제보를 받았습니다.”

1995년 10월 19일 대정부질의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박계동은 이듬해 있을 15대 총선에서 이기려면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줄 폭발적인 이슈거리가 필요했다. 민주당은 어려운 국면이었다. DJ가 탈당해 새정치국민회를 차리면서 잔류파들만 남은 상태였다.  

그때 마침 생각지도 못한 제보가 하나 들어왔다. 10월 16일 보성 고등학교 총동창회 모임에 참석했는데 후배(하종욱) 한 명이 “의논할 게 있다”며 헐레벌떡 찾아왔다. 

얘기인즉 자신의 아버지 이름의 휴면계좌 통장에 노태우  비자금 110억 원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담당 거래 은행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이었다. 잘 알고 있던 지점장이 차명계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그리됐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세청으로부터 세금 폭탄이 떨어졌다. 1년에 세금만 자그마치 7억 원이 됐다고 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눈먼 돈인데다 아버지가 예금주이니 자기 돈인 양 찾아갈 수 있지 않겠냐 싶겠지만 금융실명제가 도입돼 거액을 인출할 경우 자금 형성 과정을 밝혀야 했기 때문에 인출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청와대의 홍인길 총무수석에 이어 박계동에게 자초지종을 알려 도움을 구하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난감한 상황을 전해들은 박계동은 후배에게 자신들과 무관한 돈임을 밝히는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야 세금 폭탄을 면할 수가 있다고 설득했다. 마침 노태우 비자금의 실체를 밝히기 좋은 대정부질의 시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사를 앞둔 박계동은 확실한 물증부터 확인하고자 후배한테 예금조회표를 보여 달라고 했다. 통장 잔액을 보니 실제로 110억 원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그 돈만으로 노태우 비자금 4000억 원의 실체를 밝혀내긴 어려웠다. 
 

14대 국회에 입성한 박계동 의원이 1995년 10월 국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 원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14대 국회에 입성한 박계동 의원이 1995년 10월 국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 원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고민하던 중 묘수가 생각났다. 기자들을 통해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장을 추궁해 본인 입으로 실토하게끔 유도하는 일이었다. 대정부 질의 날을 D-데이로 잡은 박계동은 은행에서 대책을 세우기 어려운 점심시간대를 이용해 기자회견을 갖고 폭로했다. 박계동이 주장한 것이 맞는지 궁금한 기자들은 즉시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으로 달려갔다. 앞다퉈 지점장을 에워싸고는 사실 관계를 물어댔다. 
 

“(지점장은) 점심식사를 막 마치고 슬리퍼를 신은 채 책상머리에 앉아 있다가 느닷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와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 기자들이 들이미는 복사된 예금잔고조회표를 보고 이내 항복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 박계동, 공동수필집 <의원님 요즘 장사는 잘돼요?> 중


기자들이 도저히 알기 어려운 듯한 내용들까지 파악해 질문해오자 이미 다 알고 온 것이라고 본 지점장은 서소문지점을 비롯해 시중은행 40계좌에 100억 원이 분산 예치돼 있다는 것을 마지못해 시인했다. 박계동이 넘겨짚은 것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지점장이 실토한 것을 통해 근거를 확보한 박계동은 자신 있게 대정부 질의에 나서 노태우 비자금 실체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 의원은 이날 ‘노 전 대통령 퇴임 직전인 지난 93년 1월 말까지 4000억 원 비자금이 상업은행 효자동 지점에 예치돼 있었다’며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관리인으로 알려진 이원조 전 의원은 시중은행의 영업담당 상무들을 소집해 차명계좌 확보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이어 ‘같은 해 2월 1일 4000억 원은 100억 원짜리 수표 40장으로 인출돼 동화은행, 신한은행 등 시중은행의 40개 계좌에 분산 예치됐다’며 ‘신한은행의 경우 모두 600억 원이 배당돼 이중 서소문지점에 300억 원이 예치됐다’고 주장했다.”
-1995년 10월 20일 <한겨레> 기사 중


“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은 24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 관련, ‘여권은 이현우 전 대통령 경호실장이 검찰에 출두하기 전에 이미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된 300억 원이 노 전 대통령의 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이날 기자와 만나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폭로한 다음날인 지난 20일 여권의 한 핵심인사가 나에게 직접 ‘300억 원은 노 전 대통령 당시 청와대 경호실 돈이라고 말했었다’고 밝혔다.”
-1995년 10월 25일 <동아일보> 기사 중 

 

 

DJ에 표적, 15대 총선 낙선
통추 출범 배경과 하로동선 
독자노선론 불발과 노무현  


15대 총선이 다가왔다. DJ와 갈라진 민주당은 총선을 앞둔 1995년 12월 시민사회운동계열의 개혁신당과 합당해 통합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듬해 4월 11일 15대 총선이 실시됐다. 통합민주당 안에는 박계동을 비롯해 이철 노무현 김원기 제정구 이규택 이부영 등 스타정치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다수가 떨어졌다. 지역구에서는 이부영 제정구만 되고 나머지는 낙선했다. 박계동은 물론 이철 원혜영 노무현을 비롯해 민주당 간판이라 할 만한 정치인들 모두가 고배를 마셨다. 

- 결국 지역주의에 패배했다고도 보입니다.

“그런 게 없지 않아 있죠. 경상도 사람들은 신한국당, 호남 사람들은 국민회의, 충청도 사람들은 자민련에 표를 주니 남은 표로 당선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나만 해도 선거에 끝까지 매달렸으면 당선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선거구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데 전국 유세하고 다니느라 지역 선거에 전념하지 못했어요. 3000여 표차로 떨어졌어요. 그 점은 아쉽죠.”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밝힌 주역이라는 점에서 그를 향한 주목도가 가장 높을 때였다. 인기가 많다보니 사실상 정당 유세 책임을 도맡다시피 했다. 합동연설회가 있으면 앞다퉈 지원유세를 요청했다. 자연히 전국 지원 유세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당락에는 독이 됐다고 자평했다. 인지도 때문인지 당선할 수 있다고 꽤 자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상 졌으니 충격이 꽤 크게 다가왔다. 
 


“15대 국회에 패배했다. 선거 직전만 해도 각 언론사 여론조사는 내가 10% 정도 앞서 있는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그러기에 충격 또한 큰 것이었다. 투표 당일 밤, 나는 이런 결과를 예상치도 못한 채 민주당 간판격으로 이부영, 제정구, 이철, 원혜영, 노무현 선배 등과 함께 마포 중앙당사에서 개표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권총으로 사살 당하듯 정작 낙선의 충격은 짧은 순간이었다.

개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언론들은 ‘총선 이변’이라는 말을 붙여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이들의 이목을 피해 중앙당사를 나와 지구당 사무실로 향했다. 잡다한 생각이 교차하고 또한 당황해하고 있을 선거운동원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도 잡지 못했는데 자동차는 어느새 지구당 사무실에 당도했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선거운동원들은 짐짓 태연을 가장했다. 그러나 곧 누가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고 분통을 터뜨리자 이를 신호로 일제히 울음바다를 이뤘다.”
-박계동, 공동 수필집 <의원님들 요즘 장사는 잘 돼요?> 중 

 

1995년 10월 박계동 의원이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 촉구 등을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1995년 10월 박계동 의원이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 촉구 등을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  DJ가 유독 통합민주당내 스타 정치인들을 대놓고 떨어뜨리려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꼭 저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민주당이 1차 분당 사태를 겪었을 무렵 잔류파들은 당의 분열을 초래하고 딴 살림을 차리고 나간 DJ를 비판했다. 갈등의 골이 생기면서 앙금 또한 커졌을 거로 추측됐다. 

- 아무리 갈라섰기로서니 14대 대선 때 자신을 도와준 동지들이었는데 말이죠.

“권노갑 선배를 가끔 만날 때가 있는데 이분이 손을 꼭 잡고 안 놔줘요. ‘자네 때문에 DJ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는데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고 말이에요.”

박계동은 아권 통합을 추진해온 인물이었다. 그런 움직임들은 DJ가 꼬마민주당과 합당해 지역 정당 대선주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전국정당의 후보로 14대 대선에 나갈 수 있는데 도움이 됐다. 또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15대 대선을 준비하면서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권노갑 말에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함축돼 있었다고 보인다. 

- DJ가 굳이 핀셋으로 집어내듯 낙선시키려고 한 이유가 뭘까요.

“나만 해도 아파할만한 내용들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노태우 중간평가 유보 당시를 예로 들었다. DJ가 당초 YS와의 약속을 깨고 중간평가 유보에 찬성한 데에는 노태우 최측근 박철언을 통해 비자금을 받은 것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관여된 이로부터 직접 들은 바가 있다고 했다. 박계동은 전두환‧노태우는 물론 3김 지도자들의 비화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 많다고도 덧붙였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존재가 불편했을 것으로 짐작했다.

총선 참패 후 민주당은 2차 분열을 겪고 있었다. 통합민주당 주류파인 이기택계와 비주류를 둘러싸고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김원기 이철 유인태 노무현 박계동 원혜영 박석무 등은 개혁파였다. 이들이 비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6년 6월 4일 임시 전당대회는 이기택의 승리로 돌아갔다. 

비주류 개혁파들은 이에 반발해 새로운 정치결사체 조직화에 나섰다. 그것이 이른바 지역주의 타파, 3김 정치 청산을 기치로 내걸고 1996년 11월 출범한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의 시작이었다. 

통추는 김원기 김홍신 노무현 이철 박석무 원혜영 김원웅 유인태 등이 주도했다. 총선 낙선 후 가족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박계동도 돌아와 통추에 합류했다. 

그는 통추에 대해 “삼김 정치, 지역주의 정치, 묻지마 패권 정치에 반대한 사람들이 미래 정치로 나아가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고 출범의 의의를 짚었다. 

김원웅·김홍신·노무현·박계동·박석무·원혜영·유인태·이철·제정구·홍기훈·장두환 등은 하로동선 운영 당시 경험을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라는 수필집에 남기기도 했다. ⓒ정음문화사
김원웅·김홍신·노무현·박계동·박석무·원혜영·유인태·이철·제정구·홍기훈·장두환 등은 하로동선 운영 당시 경험을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라는 수필집에 남기기도 했다. 사진은 책 표지. ⓒ정음문화사

 

- 낙선한 통추 멤버들끼리 모여 ‘하루동선’이라는 한우 고깃집도 운영했습니다. 그건 왜 만든 건가요. 돈이 없어서 그랬나요.

“먹고살기 어렵잖아요. 생계문제도 해결하고, 겸사겸사 투명한 정치자금을 만들자, 우리끼리 흩어지지 말고 뭉치자, 대중과 접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 그런 의미로 만든 겁니다. 장사도 무지하게 잘 됐습니다. 일주일에 당번제로 관리했는데 홀도 꽉 차고 그랬죠.”

이철 김원웅 유인태 노무현 박석무 홍기훈 원혜영 박계동 등 15대 총선 낙선자들이 공동으로 투자해 1997년 3월 강남구 역삼역 근처에 한우 고깃집을 개업했다. 간판명은 하로동선이었다. 낙선했으나 언제고 요긴하게 등판할 자신들의 상황을 빗대어 여름 화로나 겨울 부채처럼 때가 되면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거라는 뜻을 담았다. 

- 근데 1년여 만에 폐업하잖아요. 왜 안 된 건가요. 공짜 손님이 많아서였나요.  

“관리가 잘 안된 거죠. 식당이란 걸 해보니 겉으로는 많이 남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밑지기 쉬워요. 주방이나 카운터 매출 관리 등이 잘 돼야 하는데 그런 것을 못하면 이익은커녕 다 날아가 버리죠.”

15대 대선을 앞두고 통추에서는 진로 모색 과정에서 독자후보론을 고민한다. 노무현 전 의원이 가장 강하게 주장했는데 독자후보론과 함께 대권 출마를 시사했다. 

“노무현 선배가 통추 진로에 대한 입장을 얘기하면서 A4용지에다 입장문을 적어 우리에게 보여줬어요. 독자후보론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회원들도 그게 맞다, 대부분 동의를 했고 말입니다. 대선후보를 누구로 할까 논의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통추는 내부 격론 끝에 1997년 10월 14일 독자후보론을 철회했다. 이후 통추는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한 DJP(김대중-김종필)연대 지지파와 새정치를 주창한 반대파로 갈려 노선 투쟁에 돌입한다. 노무현 김정길 박석무 홍기훈 김원웅 유인태 원혜영 등은 DJ 지지파였다. 제정구 이철 등은 DJ 패권 정치를 비판하고 3김 청산을 주장해오던 통추가 DJ를 지지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며 반대했다. 

합의점을 찾지 못한 과정에서 노무현 등 DJ 지지파들은 1997년 11월 국민회의 입당을 선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제정구 이부영 이철 김홍신 박계동 홍영기 김부겸 등은 반DJP 노선을 결의하며 통추에 잔류했다. 이들은 대선 막바지가 되자 “이번 대선에서 낡고 부패한 정치세력의 청산을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하며 반DJP 연합전선에 올라탔다. 신한국당이 이기택과 조순이 있는 민주당과 통합해 한나라당으로 새로 출범할 당시 신정연(신정치추진연합)을 만들어 합류했던 것이었다. 

결국 통추는 DJ 지지로 선회한 이들과 끝까지 반 DJ로 남은 이들로 갈라진 셈이었다.  이 과정에서 3김 청산과 세대교체론을 명분으로 독자후보론을 제일 강하게 주장해왔던 노무현이 서두르듯 DJ 쪽으로 옮겨간 모양새는 여러 의문을 낳은 바 있다. 

- 일각에서는 통추 멤버들이 자신(노무현)을  대선후보로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막상 내부에서 제정구 전 의원 중심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돌연 DJ가 있는 국민회의로 입당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제정구 선배를 독자후보로 내세우려 한 것은 맞습니다. (국민회의로 간 이유가) 그런 것도 조금 있을 수 있었겠지만 노무현 선배는 한 판에 자기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조급함이 있었다고 치면 제정구 이부영 선배도 다르지 않았어요. 누구도 사실 대권을 바라고 있었다면 느긋할 수는 없었겠죠. 그 당시에는 다 똑같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분들이니까요. 뭐든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매 순간이 다 중요한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 통추 멤버들 중에는 명문대 출신이 많았습니다. 그런 것과 비교해 당시 노 전 의원이 학력 콤플렉스를 가졌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멤버들은 인적 네트워크도 넓어서 언제든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다고 봤다면 노 전 의원은 상대적으로 입지가 협소해 더 조급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냐. 그래서 DJ한테 갔다고 보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공감하는지요.

“어쨌거나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는 노무현에 대해 대통령이라는 존칭을 꼬박꼬박 붙였다) 그런 의지가 굉장히 충만했지요. 매순간 기회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보면 노무현 선배를 훨씬 높게 평가하게 돼요.”

박계동은 그러면서 노무현과의 지난 추억을 회상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투쟁을 하던 중 박계동은 집회시위법 위반 혐의로 수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국을 돌며 피신하던 중 한번은 송기인 신부의 도움으로 부산의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을 찾게 됐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경찰의 눈을 피해 광안리 해수욕장의 모래 위에 앉았다. 노무현은 회 한 접시와 소주를 사왔다. 

통금 시간이 있을 때라 이번엔 노무현네 집으로 갔다. 해수욕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15~16평 남짓 되는 주공아파트였다. 거실 겸 주방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동그란 접이식 식탁이 놓여 있었다. 부인(권양숙 여사)은 안에서 자고 있고, 노무현이 안주를 몇 개 챙겨 왔다. 둘은 식탁에 앉아 밤새도록 대화를 나눴다. 

“노무현 선배는 속임수가 없어요. 솔직한 성격이거든요. 그때 나한테 ‘정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해요. 자기 콤플렉스도 얘기하더라고요. 서울 변호사도 아니고 지방 변호사에 스카이(SKY) 대학 출신도 아니고 연고도 없고 등의 얘기를 해왔어요. 어떻게 정치로 나아갈 수 있겠냐며 내 생각을 묻는 거예요. 그래서 말해줬지요.”

박계동 : 지금은 인권변호사가 기근입니다. 부마항쟁 사건부터 시작해서 변호사를 못 찾고 있어요. 현대중공업 사태도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어려운 데 가서 본인을 드러내면 정치 입문할 기회가 올 겁니다. 

힌트를 얻은 노무현은 이후 노동자 집회 과정 중 크레인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노무현 : 노동자를 보호하는 게 정부 책임인데 재벌기업 편에 서서는 오히려 탄압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부는 타도해야 합니다. 

그의 연설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요시찰의 대상이 돼왔던 장기표 선생이나 나 같은 사람이 그렇게 했으면 내란선동죄를 갖다 붙여 잡아갔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무명 변호사에 재야 출신도 아니니 정부에서도 놔둔 거지요. 노동자들이 얼마나 감동받겠어요. 일약 스타가 됐지요.”

노무현은 1987년 본격적으로 노동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 된 울산현대중공업 파업 과정에서도 변론을 맡았다. 이듬해 13대 총선 당시 부산에 출마했을 당시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선 것이 큰 힘이 돼줬다는 평가다. 
 

국민통합추진회의 두번째로 박계동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사진은 박 전 의원이 지난달 14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민통합추진회의 두번째로 박계동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사진은 박 전 의원이 지난달 14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정치 입문에 큰 역할을 한 거네요. 

“노 대통령 아니면 그런 것을 못한다고 봐요. 보통 용감하지 않고는 안 되거든요. 자기를 던질 수 있어야 되는데 쉬운 일아 아니에요. 본래부터 (대통령) 자질이 있었던 거죠.”

- 그렇게 각별했던 관계였는데 2003년 2월 제정구 추모 4주기 행사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과 갈등이 있었습니다.(빈민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제정구는 폐암 투병 중 1999년 2월 별세했다) 

“2002년 3일 전쯤 TV 인터뷰가 있었는데 후보한테 물어요. ‘왜 통추를 같이 했는데 제정구 이부영 이철 박계동 등은 저쪽(한나라당)으로 가고 당신은 국민회의로 갔습니까.’ 그러자 노무현 선배가 ‘저쪽은 이(利)를 따라간 것이고 나는 의(義)를 따라갔다’고 한 거예요. 그건 나한테도 굉장히 모욕적이었고 제정구 이부영 이철 선배한테도 그랬던 것이죠.”

특히 제정구 선배 부인이 크게 노했다고 한다. 

“형수님으로서는 죽은 남편에 대한 모욕적 발언이라는 생각에 더 화가 났어요. 일부는 노무현 후보 캠프에 가서 뒤집어엎어야 된다고 강력하게 얘기하기도 했지요.”

- 그래도 어떻게 그때는 넘어간 모양입니다. 

“유인태 선배가 말리고 해서 대선은 그래도 잘 치러진 것이죠.”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은 제정구 추모 4주기 때 사과를 하겠다고 찾아왔다. 

“그런데 사과가 좀 잘못됐어요. 추모사에서 ‘대선 기간인 지난 연말 방송에서 한나라당으로 간 사람들을 두고 이익을 위해 간 것처럼 표현한 것은 원고대로 읽다 보니 그리된 거였다’는 취지로 사과와 유감을 표한 것 까지는 좋았어요. 그런데 추모사 말미에 다시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 거예요. 제정구 이부영 선배 등과 차별성을 드러내고 싶어 그랬을 수 있겠지만 사과한다고 해놓고 결국 사과한 게 아닌 게 돼버린 거잖아요. 보다 못해 내가 ‘무슨 변명을 그렇게 해!’ 버럭 한 것이죠.”

- 그것 때문에 이미지 타격을 좀 받았지요?

“그랬죠. 대통령 당선자가 됐을 때라 위상이 굉장히 높고 전부들 잘 보이려 할 때잖아요. 분위기상 내가 한 말이 크게 불경한 언사같이 보인 것이죠.”

이후 둘의 관계는 껄끄러운 모양새로 언론에 비쳤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사실 나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초기 국정원장을 맡아달라는 취지의 전화도 받고 그랬어요. 근데 거절해버렸죠. 정치를 통해 출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으니까요.”

 

한나라당 간 것은 통일 소신 때문
김영삼 김대중 한국 발전에 큰 기여
통추는 통추대로 제 역할 했다고 봐


어느 때는 소신으로 인해 어느 때는 억울할 일로 또 어느 때는 논란 등에 휩싸였던 그는 정치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그만큼 풍파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16대 총선 경우는 15대 선거 당시 종로에 나간 노무현을 지원 유세한 것이 사전 선거 운동 위반에 걸려 피선거권을 박탈당해 아예 출마 조차 못했다. 좀 더 민심 속으로 파고들어가 보겠다는 생각에 택시기사도 하고 라디오 DJ 활동도 했다. 17대 선거가 돌아오면서는 한나라당 후보로 송파을에 나가 당선되긴 했지만 한두 차례 구설에 오르면서 연거푸 공천을 받지 못하는 등 좀처럼 정치적 꿈을 펼칠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 

- 사실 한나라당에 가지 않고 국민회의로 갔다면 내리 당선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죠. 길을 잘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싶은데요.  

“그 점은 후회를 많이 해요. (원래 지역구였던) 강서구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줄만 섰다 하면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김대중 대통령이 나를 20대 때부터 좋아했어요. 눈여겨도 봐줬고 잘 대접도 해줬지요.”

실제 국민회의로 입당하라는 제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거절했다. 

“생각해 보면 나한테도 많은 기회가 있었는데 젊었을 때 다 차버렸어요. 김영삼 대통령도 나한테 애정을 많이 보내줬었는데 말이죠.”
 

민주당 시절 왼쪽부터 이규택 강창성 이부영 박계동 이철 홍기훈 등이 국회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연합뉴스
민주당 시절 왼쪽부터 이규택 강창성 이부영 박계동 이철 홍기훈 등이 국회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연합뉴스

- 근데 한나라당엔 왜 간 건가요. 다른 통추 잔류파들과 같은 명분(반DJ노선) 때문이었나요. 

“민주화운동하고 정치하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던 것이 통일이었어요. 좌파 진영에서는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봤어요.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우파 진영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통일로 가는 것이 낫다고 봤죠. 한나라당에 간들 환영받을 일이 없을 거라는 것도 알았고 본래 친북 아니냐며 의심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먼 장래 다음 세대를 위해 내가 할 역할은 통일이라고 봤기에 내 기반은 보수 진영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한가요. 

“네. 그래요. 통일의 과제는 남아 있고 갈수록 더 급박해지고 있다고 봐요. 우리나라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잖아요. 통일이라는 게 꼭 우리 뜻만 갖고 되는 게 아니라 주변 국가,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일본 이런 주변 국가들과 관계되는 거잖아요. 우리나라가 중심적 역할, 주도적 역할을 해내기가 비교적 커진 상황이라고 느껴요.”

-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뭔가요. 

“내가 40대 때는 양김이 용납이 안 됐어요. 3당합당이나 DJP연대 모두 용납이 안 됐지요.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나중에 와서 반추해 보니 그분들이야말로 한국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고 훌륭한 역할을 했다는 거예요. 60대가 되고 보니 대단히 존경스러워요. 김영삼 대통령이 없었다면 금융실명제, 하나회 청산, 군부 청산은 쉽지 않았어요.

역사에서 리더십의 퍼스낼리티는 굉장히 중요한 건데 김영삼 대통령은 오기 같은 게 있어요. 하나회를 하루아침에 청산하고 노태우 비자금 사건도 막 협박을 받았음에도 협상을 차단했지요. 이런 것들은 김대중 대통령이었으면 못했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새로운 민주화 기틀을 이루는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역할을 매우 컸다고 봐요.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관계에 있어 굉장히 아주 선한 흐름을 조성한 점, 분단의 고착화를 막아내고 지역 구도를 완화하는 데 있어 역할이 굉장히 컸다고 생각해요. 지역주의를 보면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 정도예요. 예전엔 정말 원죄적 갈등이었어요. 호남 출신의 호남 대통령이 된 것은 김대중 대통령밖에 없어요. DJ가 아니면 정말 깨기 어려운 벽을 넘어설 수 있었죠. 

그다음 노무현 대통령은 엘리트 정치가 아닌 서민 중심의 시각을 대변한 정치인이었던 거예요. 정치의 주인이 누구여야 되느냐. 기층부 민중이어야 하는 점을 몸소 보여준 지도자였지요.” 

- 대통령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인데 서민적 정서를 대변한 것이 거기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대통령의 업적이라기보다 정치인 노무현의 업적 아닐까요.

“그렇죠. 일찍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가슴이 아파요.”

- 통추가 실패한 것은 결국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인가요. 

“그것보다는 다 각자의 욕심들 때문이겠죠. 개개인이 자기 정치판에서 서바이벌하고자 하는 욕구가 컸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 양김이 옳고, 통추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봐도 될까요. 

“그분들(양김)이 큰 정치에서 훌륭한 역사적 기여를 한 것은 맞지만 어느 단계든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역할도 굉장히 중요한 거잖아요. 정치가 현실적 이해득실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너무 숨 막힐 일이죠. 시대마다 올바른 정치에 대한 가늠자가 필요해요. 그 시절 국민이 볼 때는 통추 멤버들이 그러한 역할을 해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비록 정치세력화는 성공하지 못하고 기성 정치권 속으로 빨려 들어갔지만 당대의 정의를 추구하던 통추의 실험적 모색들은 그것대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정치권을 떠나 현재는 택시협동조합을 이끌고 있다. 그동안 수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완곡하게 거절해왔다. 정치를 다시 할 것처럼 비칠까 봐 우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렵사리 성사된 인터뷰였다. 마치면서는 요즘 정치권에 대한 제언이 듣고 싶어졌다. 

“우리 정치가 바람직하지 못한 모양새로 가고 있는데 어떻게 회복돼야 할까, 이런 고민을 많이 해요. ‘직접 민주주의’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국민 공천이 바로 이뤄져야 한다고 봐요. 지금은 스펙만 갖고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는 일이 많잖아요. 누가 윤석열 대통령,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친한가. 이런 것만 중요하지, 소신이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집단 관료화돼버린 것이죠.

여론조사기관도 자기네들 입맛에 맞게 선정해 돌리니 당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찾으려는 노력도 안 해요. 유럽식 엘리트 정당으로 가든지 미국식 대중정당으로 가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 해요. 정책을 공부하고 대안을 내놓는 정치로 가야죠.”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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