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상도동·동교동계 합해 ‘민추협’ 결성
민추+비민추 ‘신민당’ 창당으로 12대 총선 돌풍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50여 년 정치 인생에서 주목해 볼 점은 낙관적 태도로 언제나 민심을 귀 기울여 듣고 ‘통합’을 추구했다는 사실입니다.
YS는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회에 입성하며 의회 경험을 차근차근 쌓았는데요. 당이 분열 위기를 맞았을 때, 30대였던 그가 민중당 원내총무로서 원로들을 찾아 갈등을 수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960년대 야당 대표 지도자는 윤보선, 유진산 등이었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산업화로 경제 성장을 이루는 동안, 야권은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윤보선은 유진산과 갈등 끝에 민중당을 나와 신한당을 창당한 뒤 대선 후보로 나섰습니다. 민중당은 민중당대로 유진오 박사를 영입해 대권후보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야권에서 후보가 둘이나 나온다면 표가 분산되고 패할 것이 자명했습니다. 이에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해 신민당을 창당하는데, 이때 YS가 유진오 영입부터 당 통합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40대 기수론’의 깃발을 처음 내걸었던 YS가 경선에서 김대중(DJ)에 패배했을 때, “김대중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나의 승리”라며 DJ의 선거 유세를 도왔습니다. YS는 ‘표결에선 패배했지만 나의 주장, 내가 제창한 40대 기수론은 승리했다. 이로써 신민당이 박정희에 맞설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1980년대 야권이 통합해 전두환 정권에 맞선 중심에도 YS가 있었습니다. 23일 단식 투쟁은 무기력한 야당을 일깨우고 결집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YS의 상도동계와 DJ 동교동계가 힘을 합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여기에 ‘비민추협’ 야권 인사들과 함께 ‘신민당’을 창당해 12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YS가 3당 합당을 통해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에서 대권을 쟁취해 출범한 문민정부에선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명예회복을 추진합니다. YS는 취임 초 광주항쟁 특별담화에서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라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조성, 피해자 명예회복 등을 약속했습니다.
YS의 이러한 정치 태도는 현 정치권에도 유효한 지점이 있겠습니다. 최근 치러진 강서구청장 보궐 선거 결과로 국민의힘에 내년 총선 적신호가 켜진 모양새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에 표를 던진 강서구 내 특정 지역을 포함해 중도층이 여당에 등을 돌린 것이 확인됐습니다. ‘수도권 위기론’ ‘정권 심판론’ 실체가 일부 드러난 것입니다. 여당은 임명직 당직자 전원 사퇴 결정을 내리고 ‘혁신위’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남 일색 지도부에 다시 한 번 TK(대구·경북) 출신 사무총장을 임명하는 등 선택으로 당 내에서도 여러 설왕설래가 오가고 있습니다. 당원들도 변화와 쇄신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19일 통화에서 “YS는 끊임없는 외연 확장을 꾀했다. 하지만 현재 보수 정당을 보면, 국민의힘 안에서조차 영남 위주 지도부를 세우는 등 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여러 사람을 삼고초려해 데려오는 등 통합의 정치, 외연 확장을 꾀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전했습니다.
‘내 편 찾기’보다 ‘원 팀 만들기’에 나섰던 YS의 정치에서 ‘통합’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여야간 대립이 날로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정치권에서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의문이 든 적 한 번쯤 있을겁니다. 이들의 선택은 과거 정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학습효과 아닐까요. ‘김자영의 정치여행’은 현 정치 상황을 75년간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비춰 해석해 봤습니다. 다음주 금요일에 찾아 뵙겠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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