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성회복투쟁동지회 만들어 이철승 체제 비판한 YS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정당 내부에서 분열의 조짐이 발생할 때마다 흘러나오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분당설’ ‘신당창당설’입니다. 주로 당내 주류와 비주류 또는 계파 간 갈등이 표면화될 때 불거집니다.
신당창당설은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금태섭 전 의원은 9월경 신당 창당 절차에 돌입한다고 알려왔고, 무소속 양향자 의원은 오는 26일 ‘한국의희망’ 창당발기인 대회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한때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었으나 탈당한 인물입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김남국 의원 신당설, TK(대구·경북) 중심 친박계 신당 창당설 등의 소문도 무성합니다.
신당을 주창하는 이들은 많은 국민들이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거대 양당에 대해 회의감과 실망감을 느끼고 있는 점,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관계 등을 지적합니다. 국회 대부분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양당에 실망한 무당층이 늘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제3지대의 성공 가능성까지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국민의당, 바른미래당 등 정치권에 몇 차례 신당이 등장했지만 도중에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실패 사례 반복으로 신당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졌습니다. 안철수 의원과 같은 대선주자급 인물, 지역적 기반이나 조직의 부재, 거대 양당에 대한 비토 감정 외에 뚜렷한 지향점이 보이지 않는 점 등이 신당에 부정적인 우려 요소로 꼽힙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2021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김남국 의원 코인 보유 논란,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발언 논란 등이 불거지며 이재명 지도부 리더십이 심판대에 올랐습니다. 일각에서 ‘심리적 분당’ 상태에 이르렀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는데요. 이재명 지도부 체제로 총선을 치를 수 있겠느냐를 두고, 소위 친명, 반명, 비명 혹은 친문으로 분류되는 계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민주당 박용진·김종민·이상민 의원 등은 지난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 직후 재보궐 선거에 도전하고, 전당대회를 치를 때부터 비판하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습니다.
야권 내 갈등의 목소리는 흘러나오지만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시사오늘>은 과거 유신 시절 제1야당인 신민당 내 비주류계가 조직한 ‘야당투쟁성회복동지회’(일명 ‘야투’) 사례를 살펴봤습니다. 야투는 1976년~1979년 이철승 지도부가 ‘중도통합론’을 이유로 유신 정권에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를 비판하며 야당 내 야당으로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974년~1976년 김영삼 지도부
‘강경 대여 투쟁’에서 ‘영수회담’ 이후 변화
신민당 당수였던 유진산의 서거로 1974년 8월 김영삼(YS)이 만 45세 나이에 야당 총재로 선출됩니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지 2년이 되어가던 때였습니다. YS는 ‘선명 야당’ ‘대여투쟁’을 약속했습니. 재야민주세력과 손잡고 민주 회복을 위한 개헌 투쟁을 전개했고, 부정부패 색출규탄 운동을 벌였습니다. 1975년 2월 조윤형·최형우·김상현 등이 유신 직후 중앙정보부 등에 끌려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하자 ‘고문정치 종식을 위한 선언’이라는 회견문을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을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그해 5월 13일 유신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등 내용이 담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합니다. 그러던 1975년 4월 말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공산화 소식이 전해지는 등 국제 상황이 야당에 여의치 않자, YS는 박정희에게 회담을 제안합니다.
그해 5월 21일 영수회담 이후 YS의 민주화 투쟁 강도는 눈에 띄게 약해졌는데, 그 때문에 그의 당내 입지도 축소됩니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 따르면 YS는 박정희가 눈물을 닦으며 ‘민주주의 하겠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던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고 합니다.
YS가 이야기를 비밀로 해달라는 박정희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당시에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는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회동 이후 YS의 대여투쟁 강도가 약해지자, 밀약설이 돌기도 했는데요. 당내 비주류들의 반발이 거세졌고, 결국 1976년 신민당 당권이 이철승에게로 넘어갑니다. 이철승 체제로 넘어가게 된 계기는 앞서 얘기한 비주류의 반발과 더불어 중앙정보부의 공작도 한몫했습니다. 박 정권 입장에선 YS보다는 이철승 체제가 다루기 쉽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고흥문 등 당내 중진들을 안가로 불러 차기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을 도우라고 협박했고, 이같은 행위로 인해 당권이 바뀌게 됩니다.
1976년~1979년 이철승 지도부
‘중도통합론’으로 정부 타협적 태도…김영삼계 등 ‘야투’ 조직해 이철승 비판
이철승은 ‘중도통합론’을 말하며 ‘참여하의 개혁’ 노선을 채택했습니다. 유신정권에 대항하기보다 타협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중도통합론은 국가 안의 공당이라는 차원에서 안보, 외교 면에서도 초당 또는 거국적 입장을 취하고 세제, 국민복지, 치안 등 내정 면에서는 비판과 견제를 해 긴 안목으로 수권정당의 터전을 닦는다는 것이다. 이는 종전의 대여투쟁보다는 대화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 1976년 9월 17일 자 <동아일보> ‘이철승 체제 신민당의 앞날 투쟁보다 대화의 시대로…’
이철승 체제가 들어서며 신민당의 주류와 비주류 세력이 뒤바뀌었습니다. 연말부터 당권파와 비주류 간 노선 시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김영삼계, 고흥문계, 김재광계 등 비주류로 분류되는 계파는 이철승을 비롯한 당권파에게 미온적인 중도론을 거두고 야당성을 회복할 것을 요구합니다. 신민당이 이대로 유신에 타협해선 안 된다고 본 겁니다. 이들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야당성회복동지회’를 결성한 것이죠.
고흥문 씨계, 김재광 씨계, 김영삼 씨계, 정해영 씨계, 견지동우회, 화요회 등 6개 계보와 새로 결성된 이충환 씨의 혁진회 측에서는 18일 ‘야당성 회복 투쟁 동지회’를 구성하고 나섰다.
이철승 씨 계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계보의 이같은 원외 세력 움직임과 함께 김영삼 씨와 이민우 국회부의장 등 비주류계 의원 15명도 이날 N호텔에 모여 반리(反李)라인을 구축기로 다짐했다.
이들 가운데 중앙상위 위원급 33명으로 구성된 야당성 회복 동지회 측에서는 결의문을 통해 △이 대표는 반민주적이며 반당(反黨)적인 국내 외 발언으로 당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킨 데 대해 책임져라 △이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겠다는 등을 밝힘으로써 강경한 투쟁 목표를 내놓았다. (중략)
중도통합론을 둘러싼 신민당의 진통 제2라운드는 다분히 국민 및 당원들의 불만을 고려했던 제1라운드에 비해 반이 세력의 결집 등으로 한층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동안 이 대표 측과 밀월을 계속해 온 신도환 최고위원 측이 반이 라인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고, 김영삼 씨를 중심으로 한 비주류 측에서 다시 단합하는 조짐을 나타내고 있는 게 이번의 특색.
- 1977년 4월 19일 자 <조선일보> ‘중도론의 사면초가’
야투는 이날 대회에서 구당 선언문을 채택, “스스로 집권 능력을 부인하는 이철승 대표와 현 당 지도부를 거부한다”고 천명하고 “조속히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당내 제도적, 인적, 정신적 저해 요소를 과감히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 1977년 12월 12일 자 <경향신문> ‘야당성회복 전국대회 구당 선언 “신민 현 지도부 거부”’
야당성회복투쟁동지회는 결성 이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수도권 등 각 지역 지부를 결성해 활동을 뻗어나갔습니다. 이는 1979년까지 이어집니다. 1978년 치러진 10대 총선에서 이철승이 ‘야투’ 멤버였던 김봉조를 공천에서 배제하는 일도 있었지만, 야투는 신민당 내에서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신민당의 야당성회복투쟁동지회는 16일 오전 서울 B음식점에서 전국 시-도지부 의장단 회의를 열고 ‘참여만 하고 개혁하지 못한 과거의 무기력을 탈피함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기해 실질적인 투쟁을 전개해달라’는 내용의 당 지도부에 보내는 건의문과 결의문을 채택.
- 1979년 2월 17일 자 <조선일보> ‘참여만 하고 개혁 못 한 무기력 탈피해야’
1979년 김영삼 당권 획득
1979년 5월 치러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3년 만에 다시 당권을 잡습니다. 당시 YS는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하며 “나의 도전은 당내 특정인이나 세력을 상대로 한 당권 도전이 아니라 정권을 상태로 한 정권 투쟁”이라며 “이번 전당대회야말로 누가 당권을 잡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참된 야당이 존재하게 되느냐 말살되고 마느냐 하는 문제가 걸렸다”며 ‘야당의 사명’ ‘강경 대여 투쟁’을 강조했습니다.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이 전당대회 하루 전날 김영삼이 행사를 연 아서원을 찾아 “반독재의 선두에서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이철승의 당권파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고 있는 김영삼 동지가 이번 경선에서 당선되는 것이 신민당을 살리는 길이고 국민을 살리는 길”이라며 지지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김영삼은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가 뚜렷했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아 행동으로 옮겼고,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끈기 있게 밀고 나갔습니다. YS는 신민당에서 당권을 잡은 뒤 대여 투쟁으로 정권의 눈엣가시가 됐습니다. 그의 총재 취임이 의원직 제명, 부마항쟁, 10·26사태로 흐른 일련의 과정들은 2019년 9월 28일 자 <시사오늘> 기사 ‘[1979 격발史] ‘유신의 심장’ 누가 쐈나?’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22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당이 추구하는 가치가 안 맞아서 떠나는 것과 당에서 내 목소리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고, 구성원과의 화합이 어려워서 떠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일례로 ‘민주당은 586이 장악했고, 순혈주의라 설 자리가 없다’며 나온 경우가 안철수 의원·이언주 전 의원 경우다. 그 안에서 싸워서 당권을 잡고 체질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우선돼야 하지 않냐”고 말했습니다.
정 평론가는 “현재 민주당에서 박용진·이상민·조응천·김종민 의원 등이 방송에서 이재명 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크게 내는데, 현 체제가 힘들다면 사람들을 조직하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며 실질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비판하는 목소리는 언론을 통해 크게 들리지만, 이 비판이 ‘실질적 변화를 가져왔느냐’를 물으면 회의적이다. ‘당내 비판의 목소리가 필요한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비판해서 이름값을 높이고 이미지를 띄우는 비판을 위한 비판 식으로 생각된다”며 “YS는 야당성투쟁회복위원회를 통해 야당 내 야당을 조직해, 50개 지부로 뻗어나갔고, 마침내 당권을 잡았다. ‘나하고 안 맞아서 신당 차리는 식’의 정치를 하는 이들은 야투 사례에서 배워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정의당은 ‘노동’ ‘사회적 약자’ 의제에 대해 어떤 것을 위해 싸우고, 어떤 것을 변화시켜야 할지 명확한 생각을 공유한 이들이 함께 호흡을 길게 해 유지해 온 정당이다. 제3지대는 필요하지만 공천 안 주고 버림당해서, 또는 거대 양당에 대한 비토 감정에 기대서 신당을 차리는 것은 좋은 방향이 아니라고 본다”고 덧붙였습니다.
여야간 대립이 날로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정치권에서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의문이 든 적 한 번쯤 있을겁니다. 이들의 선택은 과거 정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학습효과 아닐까요. ‘김자영의 정치여행’은 현 정치 상황을 현대 정치사를 비춰 해석해 봤습니다. 다음주 금요일에 찾아 뵙겠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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