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황선용 APEC 기후센터 경영지원실장)
역사는 반복되고, 사람은 진화하고 기술은 발전한다. 이 세 가지를 통해 세상은 순(順)기능을 유지하면서 평화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틈을 노리고 역(逆)이 발원하면 순기능의 고리가 순간 끊어지고 역기능들이 발산하게 된다. 그게 전쟁이다. 국가안보론적 관점에서 보면 국가 간의 무력을 통한 분쟁만이 전쟁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전쟁은 모든 분쟁을 포함하고 있다. 경제, 문화, 역사문제 등등이 전쟁의 범주에 들어간다.
순기능과 역을 꺼내든 이유는 내가 과거에 벌였던 해프닝(거의 큰 사고 수준이었지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2018년 9월 나는 모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근무 하던 중 국가재정정보시스템에 부정한 방법으로 접근해 국가재정정보 수백만 건을 불법으로 다운로드 했다는 이유로 사법당국으로부터 6개월 여 기간 동안 조사를 받은 바 있다. 이른바 백스페이스 사건이 그것이다.
기획재정부로부터 정당하게 부여받은 아이디로 접속해서 들어간 뒤, 시스템의 문제로 알 수 없는 경로에 추가 접속한 것이 첫 번째 문제(첫 번째 혐의라 하겠다)가 됐고, 그 공간에서 평소에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사료되는 예산정보를 다운로드 한 것이 두 번째 문제(두 번째 혐의)였다고 수사당국은 말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기소되지 않은 채 종결돼 세간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지만, 당시 이 사건의 가운데에 있었던 나는 대한민국에서 거의 완벽한 해커가 돼 있었다. 아니 반드시 해커가 돼야만 했다. 그 이유는 국가재정정보라 함은 외부 침입으로부터 철통방어가 생명일 진데 일개 보좌관의 클릭 몇 번으로 구멍이 뚫렸으니 나는 당연히 해커가 되어야 재정정보시스템담당 관계자들이 면책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밝히건 데 나는 해커도 아니고 해커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으며, 워드 정도 다룰 줄 아는 저급 수준의 컴퓨터 활용자일 뿐이었다. 이 사건 이전의 일들은 모든 것이 완벽한 순기능으로 작동하고 있었다면 이 사건이 역이되어 이후의 일들은 그야말로 전쟁 수준의 변혁들이 공직사회에 일었다.
첫 번째 전쟁은, 국가재정정보시스템은 물론 각 정부부처의 예산정보 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과 보완이 이뤄졌다. 부실했던 보안시스템이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예산을 투입해 업그레이드되고 보안도 한층 강화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후로 국회 보좌관들이 시스템을 통한 예산정보 접근 범위가 상당히 좁아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전쟁은, 이 사건으로 인해 들춰졌던 각 부처의 업무추진비(업추비) 집행의 문제로 인해 업추비 관리가 한층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했던 모 국회의원 보좌관은 지금도 나를 국회에서 만나면 그때 업추비 사용 문제로 인해 하나하나 소명하는 일들이 자주 벌어져서 모두가 힘들어했다며 나에게 핀잔을 주곤 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어쩌다 해커가 된 덕에 국가예산정보시스템은 더 강화됐고, 공직사회의 업무추진비 집행은 한층 투명해질 수 있었다는 점은 나에게는 숏포지션이지만 국가적으로는 롱포지션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본다. Process 없는 Progress는 없다. 어떤 일이든 벌어져야 수습과정을 통해서 역을 죽이고 순기능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내 스스로를 숏포지션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를 평가하는 관점이 이 사건 이전과 이후로 극명하게 구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큰 일 낼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인식이 더 강해졌다는 말이다. 나로서는 숏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공직사회에서는 순기능을 저해하는 역과의 전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믿는다 결국은 역이 순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셜록홈즈의 원작자인 코난도일은 장난 삼아 공직에 있던 친구 12명에게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 전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일이 들통 났으니 도망가라”
코난 도일은 이 전보를 보낸 뒤 각 친구의 집을 차례로 방문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전보를 받은 친구 모두가 다 도망을 치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영국 고위 지도층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에피소드로 회자되는 내용인데 지금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2023년 코난도일이 보낸 ‘도망치라’는 문자를 받게 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회피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맞서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곳이 바로 공직이고 공공분야다. 민생의 순기능들을 저해하는 역이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고도 나와 관련된 일이라서, 내가 맡은 일이 늘어날까봐 등등의 이유로 도일의 전보를 받은 친구들처럼 도망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서 순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사건 당시 비록 전문 해커라는 비아냥이 있기는 했지만 도망치거나 숨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공직사회의 순기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서울과기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국방대학원 안보정책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이북오도청 (이북오도위원회) 동화연구소 연구원과 상명대학교 산학협력단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국회의원 비서관, 보좌관 등을 지냈다. APEC기후센터(APEC Climate Center) 경영지원실장이다. 저서로 <대통령의 근위병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