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결단식 대결정치의 폐단…거부 민주주의 현상 뚜렷”
“의회민주주의 확립하고 중도 실용적 정치 확장 이뤄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국민의힘 이태규 의원은 최근 한 일간지 칼럼에서 ‘상식’을 소환했다. 안철수 전 대표와 중도 지대에서 국민의힘에 오기까지 실사구시 정치의 저변을 넓혀왔던 그다. 내전 양상이 가열되면서 정치적 상식이 실종돼가는 작금의 현실이 개탄스러운 모양이었다.
지난 3월 이 의원은 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간사를 맡았다. 장관 물망 등에 오르내리던 때로부터 수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조용히 의정활동에만 전념했다. 언론 노출도 자제하는 듯했다.
슬슬 소식이 궁금하던 차 6일 국민대학교 북악정치포럼에 등장해 반가운 얼굴을 비췄다. 이날 이 의원은 정치대학원생들 대상의 강연자로 나섰다. ‘현 단계 한국 정치의 문제와 개혁 방향’에 대해 논했다. 조금씩 활동을 재개하는 모습이다.
현주소는 ‘거부 민주주의’
“밥값 못하는 정치”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일컬어 그는 이같이 규정했다.
“제 의정활동 목표가 밥값 하는 정치입니다.” 그런데 몸담고 있는 정치권에서는 뜻대로 안 된다고 했다. “부끄럽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1년에 상을 2~3개 정도 받는 데요….” 의정 활동을 열심히 하는 의원에게 주는 상이다 그럴 때마다 “과연 나는 밥값을 하고 있는가. 공익에 얼마만큼 기여하고 있는가.” 자문하게 된다고 술회했다.
갈수록 국민은 정치에 등을 돌리고 있다. 신뢰도 바닥이다. “왜 그럴까요? 진영 논리에 빠진 사생결단식 대결 정치의 폐단 때문이죠.” 자문자답하듯 이 의원이 답했다.
그러면서 다음을 예로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김건희 여사)의 캄보디아 봉사활동을 두고 빈곤 포르노라고 하지 않나. 청담동 해프닝 문제는 또 어떻습니까?” 더불어민주당의 장경태‧김의겸 의원의 발언들을 지목했다. 얼마 전 장경태 의원은 김건희 여사의 봉사활동을 빈곤 포르노에 빗댔고, 김의겸 의원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해당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곤욕을 치르고 있다.
“결국 상대에 대한 증오가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까 그런 불상사가 생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를 두고 이 의원은 ‘거부 민주주의’에 빗댔다. 즉, “비토크라시(vetocracy)가 여의도 국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논문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가 미국의 양당 정치를 비판하면서 사용한 용어입니다.”
뒤이어 부연해 나갔다. “상대 정파의 정책을 무조건 거부하는 아주 극단적인 파당 정치를 의미하는 것인데 현 단계의 한국 정치가 여의도 국회에서 상징적으로 그런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 것이죠.”
때문에 “정치의 낮은 생산성과 대결 정치가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같은 “연장선상 속에서 지역과 이념에 기반한 진영 정치가 더 심화되고 있다”는 점도 주시했다.
“계승과 발전이 아닌 단절과 부정의 역사관이 진영 정치를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국민 전체의 이익보다는 자기 정파와 진영의 이익이 우선인 겁니다. 불공정과 불합리가 발생해도 그것을 외면하기 바쁩니다.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특히 약자한테 돌아갈 수밖에 없는 데도 말이죠.”
한편으로는 “내부 비리에 대해서는 온정주의가 횡행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남의 잘못엔 처벌을 요구하지만 자신들의 내부 비리는 덮고 마는 거죠.” 한마디로 “공공성 상실의 시대”라고 진단했다.
공공성 상실의 시대의 폐단
문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련의 양상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을 잡으면 그 힘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지배하려는 경향들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전 정부들의 역사 교과서 논쟁을 들 수 있지요. 우리 아이들이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답답함이 느껴졌다. “기성사회의 고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더불어 이 점도 환기했다.
“신뢰를 기반으로 공정하게 분배하는 과정 등의 역할을 해주는 게 정치라고 봅니다. 한국 정치가 과연 그런지 묻고 싶습니다. 문제 해결과 사회 발전 방향의 제시, 시민의 행복 증진에 얼마만큼 기여하고 있는가?”
이런 점들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언급했다.
87 체제 극복하고 권력구조 개편해야
결국, “대의민주주의 실패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87년 민주화 이후에 제도적인 또 절차적인 진전과 발전은 어느 정도 이뤄왔지만 내용적으로 과연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느냐. 이 부분을 놓고 보면 ‘한국 정치는 실패하고 있다’ 고 생각합니다.”
현 단계 한국 정치는 이런 상황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개혁 방향 쪽으로 나아갔다.
“삼권 분립이 성공하고, 합리적인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고, 여야가 존중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이 공동집필한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의 책 제목을 들었다. 해답은 그 안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취지로 들렸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지켜온 두 가지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하나가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 또 제도(권력)의 자제. 미국 민주주의를 지켜온 핵심요소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 이전에 서로를 적이 아닌 합리적 합법적 경쟁자로 대해야 합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경쟁하며 공존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 정치 보복 논란이 있었잖습니까? 제도상의 권력 남용 문제가 있는 거죠. 권력의 사유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겁니다.”
“좌우, 진보 보수 떠나 경계에 서야”
이 의원은 본론으로 들어와 한국 정치 개혁 방향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의회민주주의 확립이고요, 두 번째는 중도 실용적 정치의 확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전부 아니면 전부인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을 이겨내고, 팬덤만 바라보고 극단적으로 정치하는 흐름을 끊어낼 수 있다고 했다. 또 이를 위해서는 수행돼야 하는 게 있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개헌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6공화국 시대를 종식하고, 87 너머의 7공화국 체제를 열어야지요. 실패한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권력구조 개편이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어떤 모델이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여러 예시가 전해졌다. “분권형 대통령제든 아니면 이원집정부제든 내각제든 간에 새로운 대한민국에 맞는 가치와 비전을 국민과 함께 논의하고 모색해야 한다”는 말로 여지를 남겼다.
선거제도 개편도 관건이다. 지금과 같은 ‘무늬만 연동형인’ 기형적 형태가 아닌 “독일에서 굉장히 성공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나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다당제 전환에 용이한 제도들이다. 이 의원도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관계에 이용되는 소선거구제의 폐해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이외에도 진영 정치와 이익 정치를 배제할 줄 아는 유권자의 자각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했다. 일하는 국회를 위한 제도 개혁 일환으로는 △국회법 위반시 패널티 부여 △상임위원회의 소위원회 중심 운영 △예산결산특위의 실질적 상설화 등이 열거됐다.
끝으로 그는 “진보든 보수든 좌파든 우파든 경계에 서자”며 “가운데 서야 양쪽을 다 볼 수 있다. 진영 정치의 벽을 넘자”고 강조했다.
참고로 강연 중 이 의원이 한 발언 중에는 “우리나라는 입시 위주에 매몰돼 정작 민주시민 교육이 없다”는 지적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정치의 근본 문제가 개선되려면 민주시민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취지의 관점도 눈길을 끌었다. 국회 교육위원으로서의 남다른 소신이 엿보였다.
돌아보면 1990년 삼당합당에 반대해 창당된 꼬마민주당에서부터 정계 입문한 뒤부터 지금까지 ‘가치 지향의 정치’를 해온 것으로 가늠됐다. ‘미스터 쓴소리’ 조순형 의원 보좌관으로 있으면서는 청빈한 삶을 배웠다.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을 지냈지만 뜻이 맞지 않아 얼마 안 있다 나왔다. 이후 2012년부터 안철수 의원과 함께하고 있다. 모두 ‘가치 지향’으로 이해됐다.
전략통으로 통하는 만큼 청중과의 질의응답 시간이 끝난 뒤 국민의힘 전당대회 관련 현안들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비공개를 전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듯 말을 아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조만간 의견을 밝힐 때가 있을 겁니다.” 어떤 얘기일까? 그에 대한 답은 다음 몫으로 남겨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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