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2022년 가을 정비사업 수주대전이 전국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서울 서초구 방배신동아 재건축, 용산구 한남2구역 재개발, 동작구 흑석2구역 재개발, 울산 중구 B04구역 재개발 등 모두 규모가 크고, 상징성이 높은 사업장들로, 시공사 선정을 앞두고 대형 건설사들의 물밑 빅매치가 격렬하게 이뤄지는 중이다. 가을 정비사업 수주대전에서 주목할 만한 세 가지 부분을 짚어봤다.
달라진 수주전 분위기…경쟁 최소화에서 출혈 경쟁으로 회귀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대형 건설사들의 태세전환이다. 올해 들어 각 업체들은 미국발(發) 고금리 현상, 원자재 가격 급등, 부동산 경기 침체 등 악화된 경영환경 속에서 수익성 확보를 위해 최대한 경쟁입찰을 피하는 행보를 보였다. 일찌감치 '침'을 발라둔 사업지 위주로 단독입찰에 나섰고, 일종의 물밑 '담합'으로 각 사업장을 나눠먹었으며, 수의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중견업체들을 '들러리 카운터 파트너'로 삼았다.
대표적인 예가 대전 도마·변동 일대다. 4구역에선 롯데건설·현대엔지니어링 컨소시엄이 DL건설(구 대림건설)을 누르고 시공권을 확보했으며, 5구역은 현대건설·GS건설 컨소시엄이 두산건설을 뿌리치고 수주했다. 13구역도 DL이앤씨·대우건설 컨소시엄이 중견사(社)인 동부건설을 제치고 시공사로 선정됐다. 합종연횡, 나눠먹기, 들러리 등 의혹이 불거졌다. 현대건설은 올해 상반기 단 한 차례도 다른 업체와 싸우지 않고 약 7조 원 규모 정비사업 수주 실적을 달성했다. GS건설, 롯데건설 등도 경쟁 없는 선별수주로 양호한 실적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같은 분위기가 대형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확 바뀐 눈치다. 서울 서초구 방배신동아 재건축, 용산구 한남2구역 재개발, 동작구 흑석2구역 재개발, 울산 중구 B04구역 재개발 등 앞서 거론한 사업지들은 현재 불법 홍보, 경쟁 과열 등 문제로 크고 작은 논란에 휘말린 실정이다. 흑석2구역에선 삼성물산, GS건설, 대우건설 등이 조합(주민대표회의)과 SH서울주택도시공사로부터 불법 홍보 등에 따른 경고 조치를 받은 바 있으며, 방배신동아에선 현대건설과 포스코건설이 수십억 원을 투입해 홍보관을 건립하는 등 출혈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울산 B04구역에선 현대건설이 조합으로부터 OS(외주홍보대행)요원을 동원한 불법 개별 홍보를 금지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
여기에는 연간 실적 목표 달성, 장기 침체 대비 먹거리 확보, 민간 주도 공급과 정비사업 규제 완화를 공언한 윤석열 정권 출범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아울러 각 업체 CEO들의 처지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해외 건설현장 전문가로 통하는 오세철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은 지난해 실적 부진으로 체면을 구긴 바 있는데, 올해에는 그룹 일감과 해외사업 수주를 앞세워 일단 지난 상반기까진 실적 반등에 성공한 상태다. 오 사장은 상승세를 이어가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윤영준 현대건설 사장은 지난해 말 한화건설(한화 컨소시엄)에 약 2조 원 규모 잠실 마이스사업을 내주며 현대자동차그룹 내 입지를 다소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올해 현대건설이 역대급 정비사업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배경으로도 읽힌다. 특히 윤 사장은 전임인 정진행 전 부회장, 박동욱 전 사장 등과 달리 모그룹과의 끈이 부족한 편이다. 오는 2023년 3월 임기가 만료되는 한성희 포스코건설 사장은 이번 하반기 실적이 연임을 좌우할 전망이다. 백정완 대우건설 사장은 중흥건설그룹을 새 주인으로 맞은 첫 해, 첫 CEO로서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어차피 시공사는 삼성물산?', 이번에도 이어지나
'어시삼'(어차피 시공사는 삼성물산) 행진 지속 여부도 관심사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2020년 신반포15차 재건축사업을 통해 5년 만에 정비사업 시장에 복귀한 이후 수주전에 나서는 현장마다 인지도, '래미안' 브랜드 가치 등을 앞세워 연전연승을 이어가고 있다. 그룹 총수이자 개인 최대주주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발(發) 오너 리스크 속에서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표면적 홍보활동을 최소화하는 자칭 '클린수주', '선별수주' 전략을 펼쳤음에도 고무적인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이 과정에서 삼성물산이 뜨면 다른 건설사들이 수주를 포기하는 현상도 자주 목격됐다.
이번 하반기 수주대전에선 흑석2구역, 한남2구역, 울산 B04구역에서 삼성물산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세 사업 중 뭘 수주하든 2010년 이후 12년 만에 재개발사업 시장 컴백이기 때문이다. 경쟁구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한남2구역, 재입찰이 진행되고 있는 흑석2구역에선 신반포15차, 반포3주구에서 악연이 된 대우건설과 맞붙는다. 울산 B04구역에선 업계 라이벌 현대건설과 자웅을 겨룬다.
변수는 클린수주다. 이재용 부회장의 광복절 특별사면·복권으로 리스크는 덜었지만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 합병 의혹 관련 재판이 여전히 진행 중에 있으며,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눈치를 봐야 한다. 반포3주구에서 발생한 경쟁사 비방 우편물 논란, 대리 홍보 의혹, 이주비 편법 지원 의혹 등 잡음이 불거질 조짐이 보인다면 지난해 말 한강맨션 재건축사업 사례처럼 삼성물산이 과감하게 입찰 자체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 최치훈, 이영호 등 불법 합병 의혹 관련 재판을 받고 있는 전임 CEO들에 대한 고액 연봉 챙겨주기 의혹이 불거진 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전망이다. 반대로 경쟁사들 입장에선 '어시삼'을 막기 위해 과감하게 진흙탕에 뛰어들 것으로 보인다.
尹정부, 수주경쟁 과열 단속할까
관련 업계는 정비사업 시공권을 둘러싸고 건설사간 경쟁이 과열될 경우 윤석열 정부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하고 있다. 정비사업 규제 완화, 재건축·재개발 활성화 등을 통한 민간 주도 주택 공급을 천명한 만큼, 현재 건설사 관계자들은 '작은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 정국을 감안하면 이 같은 기대는 실망으로 변할 공산이 있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 여당인 국민의힘 내홍 등으로 현 정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된 가운데 그나마 우호적이던 부동산 시장 내 민심마저 1기 신도시 재정비 공약 파기 논란과 종합부동산세 부담 완화 법안 국회 통과 불발 등으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민심을 회복하는 데에는 기업 때리기, 특히 건설사 때리기 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최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특정 중견 건설사들을 겨냥하듯 '벌떼 입찰' 공공택지 환수 조치를 마련하겠다는 '무리한 발언'을 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과거 한남3구역 사례와 같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사정의 칼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국토부는 지난 6월 "정비사업 과열경쟁을 억제하고 투명성을 제고하겠다"며 정비사업 지역 주민들에게 허위·과장 정보를 제공하는 걸 금하는 내용이 담긴 도정법(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 개정안이 연말 시행을 예고한 바 있다. 이는 이번 하반기 각 건설사들이 정비사업 수주전에 집중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더욱이 국회에서는 오는 10월로 예정된 국정감사 때 여야를 막론하고 건설사 CEO 줄소환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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