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가 직접 영입…광명을 전략공천”
○“당 대변인·장관 모두 파격적 발표”
○“최형우 좋아했지만…이수성 지지”
○“개혁의 아이콘, 당 수구화 돼 탈당”
○“패거리정치 안 돼, YS식 정치 절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구술 손학규|정리 정세운·윤진석·조서영 기자]
YS(김영삼) 서거 5주기 즈음이었다. 나를 통해 YS를 조명해보고 싶은 듯했다. 돌아보니 문민정부 그때 나는 개혁의 아이콘 YS 직계였다. 그 뒤 내 정치적 행보에 대해 누군가는 트리플크라운(장관-도지사-의원)을, 다른 이는 정치적 부침과 멍에를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선택적 타이밍을 아쉬워할지도 모르겠다. 실패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내 길을 걸어왔다 답하고 싶다. 사전 질문지를 보며 생각에 잠기던 차, ‘똑똑똑.’
1. YS와의 첫 악수
“YS가 직접 꽂았다”
지난 24일 이사장으로 있는 서대문구 소재의 동아시아미래재단. 기자는 정계 입문 당시부터 물어왔다.
“93년 4·23 광명시 재보선을 앞두고 손 전 대표께서 최형우 내무부 장관으로부터 연락 받아 출마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 자리(광명)는 노병구 민주산악회 연수원장이 준비하던 곳이었는데 말입니다. 노 원장께서 공천 탈락 후 최 장관한테 항의했더니 ‘김현철(YS 차남)한테 찾아가 봐라.’ ….”
속뜻인즉 내가 발탁될 수 있던 배경에 ‘최형우·김현철’이 관여됐던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고개를 젓고, 설명에 들어갔다.
“원로 한 분이 YS를 만나 ‘손학규 어떠냐’ 추천해줬던 거예요. 나에 대해 알아보니 사회 정치적 분위기와 잘 맞았다고 본 듯해요. 서울대 재학시절부터 민주화 운동했지, 재야에서 오랫동안 빈민·노동 운동 했지. 영국 옥스퍼드 박사지, 서강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지. 또 젊고 개혁적이지…. YS가 92년 12월 14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듬해 2월 취임했는데 3월 말 (영입 제안) 전화가 온 거였어요. 노병구 원장이야 훌륭한 분이죠. YS도 개인적으로는 민주산악회를 함께한 노 원장한테 애정이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나라의 개혁적 분위기를 높이는데 ‘손학규 같은 사람이 필요 하겠다’ 그랬던 거예요.”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나 최형우요.”
처음 서강대 교수실로 전화가 왔던 때가 떠올랐다. 괄괄한 목소리였다. “손학규 교수죠?” “네. 그런데요.” “내일 몇 시까지 당사로 오시오.” “당사가 어디죠?” “아니, 알아서 찾아올 일이지.”
최 장관의 말에서 기분이 나쁜 듯 느껴졌다. 후에 알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이때는 그가 민자당 사무총장일 때였다. 문민정부 탄생 후 처음 치르는 선거였다. 부산 두 곳, 광명 한 곳인데 공천을 YS가 ‘손학규한테 주라’고 한 듯했다. 내심 언짢았을 것 같았다.
93년 4월 23일 재보선 지역 중 부산 동래갑은 민자당의 박관용 의원의 지역구였다. YS에 의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면서 재보선 대상이 됐다. 부산 사하구는 무소속 서석재 의원이 상대 후보를 매수했다는 혐의로 직을 상실하면서, 광명시는 통일국민당의 윤항렬 의원이 작고하면서 실시됐다. 부산 동래갑과 사하구는 각각 재경부장관을 지낸 강경식과 YS 측근이던 박종웅이, 광명시는 내가 전략공천 됐다.
“부산은 (YS 민자당이) 으레 이기는 분위기였지만 광명은 친YS가 아니었어요. YS로서는 승부처였던 셈이죠.”
“YS가 직접 꽂았던 거네요.”
“그렇죠. 직접…. 그런데 일면식도 없던 분이었죠. 악수도 청와대에서 공천장 받을 때 처음 해봤어요. 그때만 해도 대통령이 총재였으니 직접 줬어요. DJ는 전부터 여러 번 악수도 하고 집에 가서 밥도 먹고 했지.”
이기택 체제였던 야당(민주당)에서는 광명을 목표로 ‘노무현 공천’을 생각하고 있었다. 앞서 노무현 전 의원은 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했다가 YS 지원을 받은 민자당의 허삼수 의원에 패해 재선에 실패한 터였다. 재보선 결과 세 곳 모두 민자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YS가 집권하면서 개혁의 열풍은 거셌다. 청와대 안가를 없애고, 인왕산 길을 개방했다, 하나회를 해체했다, 공직자 재산을 공개하고,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섰다. 또 역사 바로 세우기 등…. 전 국민의 90% 이상이 YS를 지지할 정도였다.
‘개혁 위해 나섰다.’ 보궐 선거 기간 내 선거 구호였다. 그때 나는 개혁의 아이콘이었다. 선거 기간 4·19 기념식이 있었다. YS는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묘지에 참배했다. 비서가 나를 YS 옆에 세웠다. YS가 좋아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2. YS 제안
“당 대변인 손학규”
국회 입성 후 당 부대변인에 임명됐다. 민자당은 3당(민정당+통일민주당+공화당)이 합당한 당이라 부대변인도 셋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나 혼자서 그 역할을 했다. 지금은 최고위원회의지만 그때는 고당(고위당직자 회의)이라고 했다. 대표위원, 최고위원,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의장, 기조실장, 대변인만 하는 아침 회의였다. 당시는 모두 발언도 없었다. 회의 내용을 대변인이 브리핑해주는 방식이었다. 때론 부대변인인 내가 하곤 했다. 정치학과 교수 출신이니까 기자들이 잘 물어왔다. 소통도 잘 됐다. 자연스레 개혁의 상징처럼 돼갔던 것 같다.
95년경이었다. 하루는 YS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정감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직원들과 저녁 먹으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네, 대변인을요?”
나보고 대변인을 하라는 것이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잘할 거예요. 절대 비밀입니다.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요. 내일 발표가 나갈 겁니다.”
끊자마자 고민이 시작됐다. ‘집권 여당의 대변인을 나 같은 초선의원이 한다?’ 여태까지 재선의원은 돼야 대변인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엄두가 안 났다. 아무 소리 않고 밥만 먹었다. 직원들도 덩달아 긴장하는 눈치였다. 다시 돌아와 청와대에 전화부터 했다.
“대통령 좀 바꿔 주세요.”
초선 의원이 겁도 없이 한 건데 바꿔줬다.
“각하. 정말 고마운 말씀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습니다.”
각하라고 할 때다. 거절하자 YS가 깜짝 놀랐다.
“아니 왜요”, “집권 여당 대변인이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국정이 완전히 흔들리는데 못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 할 수 있어요.” 거듭 거절하자 “전체 당직 개편 안인데 대변인에 대해서는 손 의원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한참 듣던 YS가 재차 용기를 북돋아 줬다. 실제로는 아니겠지만 느낌상 30분간은 고집을 피웠던 것 같다.
“알았어요. 끊으세요.”
대통령 말에 전화를 끊었다. 한사코 사양했으니 학교로 돌아갈 일만 남았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받을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됐다. 기자들한테 전화가 왔다. “대변인 됐다면서요?” “무슨 소리에요. 아니에요.” 오전 9시인가 10시인가. 진짜로 ‘당 대변인 손학규’이렇게 보도되는 거였다.
기자들한테 다시 전화가 왔다.
“아니 대변인 첫 마디가 거짓말입니까?”
3. YS의 신임
“보건복지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도 했잖아요?”
기자는 문민정부 아래서 잘 나가던 때를 연속으로 물어왔다. 96년 4월 11일 15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나는 정책조정위원장을 거쳐 그해 11월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됐다.
“발탁 과정도 설명해준다면요.”
“건국대학교에서 특강을 할 때였어요. 한 500~600명이 들어선 대강당이었죠. 부총장이 연단 앞으로 걸어오더라고요. 쪽지를 주는데 ‘대통령 각하께서 전화를 원하신다.’ 강의하는데 갈 수 없으니, ‘끝나고 하겠다.’”
여기까지 말하다, 나는 웃음이 났다.
‘공중전화로 하세요.’
쪽지에 쓰인 YS의 특명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요즘같이 휴대폰이 없을 때니, 비밀을 엄수하라는 뜻에서 홀로 공중전화를 이용하라는 당부였다.
특강을 끝내고 공중전화를 찾았다. 학교 관계자가 “아휴. 총장실 전화 쓰세요.”
“아닙니다. 각하께서 공중전화로 하라고 했습니다.”
나가서 전화를 했다. “복지부 장관 하세요.” 그때는 내가 사양을 안 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할 겁니다. 내일 발표 때까지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세요.”
대통령으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전문성이 필요한 일에 전격 발탁한 거였다.
“성공한 복지부 장관으로 평가받았잖아요?”
“하하하. 성공적이긴.”
쑥스러워 넘겼지만, ‘보건복지부 장관하면 손학규’ 라고 회자된다고는 들었다. 취임할 당시 가장 큰 과제가 한약분쟁이었다. 3년을 끌 만큼 쟁점이었다. 때로는 대통령을 따로 만나 설득하면서 약사법시행령, 한방정책관실 등을 신설하며 현안을 풀어나갔다. 공무원과의 협의 체계, 청렴도를 비롯해 그런 점이 호평으로 남겨진 듯싶었다.
4. YS와 97 대선
“최형우? 난 이수성이었지”
얘기는 97년 15대 대선 과정으로 넘어왔다.
“97년 5월 신한국당(민자당 후신) 경선을 앞두고 9룡 중에서는 최형우 전 장관을 밀었던 거죠? 최 전 장관이 (뇌졸중으로 97년 3월) 쓰러지기 전에요.”
당내 YS가 키운 잠룡들로는 9룡이 있었다. 이회창·김덕룡·박찬종·이수성·이인제·이한동·이홍구·최병렬·최형우, 이상 9명이었다. 이들 중 최형우 전 장관을 지지한 게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아니에요” 하면서도 나는 최 장관에 대한 마음부터 먼저 전했다.
“최형우 장관과는 (광명시 공천 받은 일로) 처음에 악연 비슷하게 시작했지만 나중엔 관계가 좋았어요. 최 장관이 쓰러지고 중국으로 치료받으러 갈 때는 휠체어도 내가 밀고 했지요. 요즘도 가끔 찾고. 얼마 전 사모님께 전화도 오고 그랬고요.”
“팔순 잔치에서도 사회를 본 걸로 압니다.”
“그렇죠. 이 양반에게서 두 가지를 배웠어요.”
하나는 돈에 관해서다.
“(최 장관이)어느 날 그러더라고. ‘나를 YS 가신이라고 하던데, 난 가신이 아니에요. 난 정치적 동지예요. 그런데 YS에게 배운 게 있습니다. 돈을 절대 탐하지 말라. 정치인의 돈은 오른쪽 주머니로 들어왔다가 왼쪽으로 나가는 거다. 머무르는 게 아니다.’ 내 그걸 배웠단 말이지.”
또 하나는 뜻에 관한 가르침이었다.
“손 의원, 정치 적당히 해서 재선·삼선하고 사무총장하고 원내총무 하려거든 그냥 학교로 돌아가세요. 사람이 뜻을 가져야지.”
평소 최형우하면 행동대장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나라를 경영해보겠다는 뜻을 갖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계기였다.
그렇다고 최 장관을 대선주자로 지지한 건 아니었다.
“누굴 지지했나요?”
“이수성 총리를 지지했지.”
장관할 때였는데 가끔 청와대를 가곤 했다. YS와 단독 면담에, 단독 식사도 했다. 내가 꼭 얘기할 게 있으면 김기수 비서실장한테 전화를 해놓았다. 그러면 곧바로 연락이 와 대통령과 얘기도 나눌 수 있었다.
“소통이 잘 됐네요.”
“YS가 날 좋아했어요.”
느낀 그대로 얘기했다.
“하루는 후보 경선 얘기가 나왔어요. YS와 단둘이 있을 땐데 ‘누가 했으면 좋겠어요’, 묻더라고요.”
YS는 내게 반말을 안 했다.
“글쎄요. 각하께서 잘 생각하시겠지만 이수성 총리가 잘 할 것 같습니다. 국정 운영에서 포용력도 있고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습니다.”
“나도 이수성 총리가 좋은 정치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아서….”
YS는 대중 정치인이라 항상 지지율을 고려했다. 앞서 95년 6·27 민선1기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후보를 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됐으면 좋겠소.”
“각하께서 최병렬 의원을 서울시장으로 앉혔을 때는 초대 민선시장 시키려고 한 게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지지율이 안 올라서….”
YS는 정원식 전 국무총리를 후보로 냈다. 97 대선에서도 이수성 총리를 선호했지만 지지율이 오르지 않아 이회창 총재로 한 거였다. 의원직을 겸임하던 장관들은 대선을 앞두고 국회로 복귀했다. 나도 그해 8월까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5. 민주계 적통
“승승장구 했는데 어쩌다…”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 거치며) 승승장구했잖아요. YS 민주계 적통을 받아 차세대 리더로 부상했고, 대권주자가 됐고요. 경기도지사도 성공적으로 마치고, 같은 당 김문수 지사에게 바통을 넘기는 과정도 순조로웠고요.”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장황한 전제 뒤로 어떤 질문이 뒤따라올지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2006년 100일 민생대장정 마치고 2007년 갑자기 (한나라당을) 탈당하잖아요. 뭔가 큰 그림을 그리다 삐걱거린 듯싶은데요. 과정을 좀….”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줄까. 경기도지사 때로 돌아갔다. 처음 도전하던 98년 때는 YS가 하지 말라고 했다. 97년 대선 당시 DJ가 당선되고 YS가 막 청와대를 떠나기 전이었다. 인사드리러 찾아 가자,
“아, 그러지 않아도 손 의원이 경기도지사 나간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안 됩니다. 나가지 마세요. DJ가 정권을 잡았는데 그 자리를 야당에 내줄 리가 없습니다.”
극구 말렸다. YS 예측대로 98년 지방선거는 패배로 돌아왔다.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분임을 새삼 느꼈다. 이후 나는 16대 총선에서 당선, 삼선 의원이 됐다. 2002년 경기도지사에 재도전해 성공했다. 민선 3기 도지사에 취임 후 2006년까지 정말 재밌게 일했다. LG필립스, 외국인 첨단산업 투자 유치, 판교 테크노밸리, 평택항, 파주 평화누리와 영어마을 조성, 수원영통 신도시 조성, 일자리 74만개 창출 등…. 지금 생각해도 경기도 발전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했다.
“당시는 도정에만 전념한 터라 정치와는 멀리 있었어요. 경기도지사를 마치고 민심대장정 후 정치에 복귀하니 YS 퇴조 후 당이 완전히 탈색됐더라고요.”
“수구보수화 됐다는 거죠.”
“네네. 아까 나보고 한나라당에서 잘 나갔었다고 했죠? 근데 아니에요. YS 물러나고 당직 하나 받은 게 없어요. 3선 국회의원 되면 상임위원장도 주고 하는데 그것도 안 줬어. 언론에서는 ‘손이 된다’ 했지만 내가 기자들한테 그런 말도 했어요. ‘웃기지 마라. 손학규에 안 준다.’ 완전히 배제돼 있었어요.”
그때 기자가 반박해 들어왔다.
“계속 남아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는 얘기죠. 17대 대선 경선 때는 ‘이명박(MB)·박근혜’에 밀렸지만 차기에는 개혁보수계의 지지를 받아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되지 않았을까….”
말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정정할 것이 있었다. 그 전, 사전 질문지에서 나를 개혁 공천의 일환으로 표기해둔 것에 대해서다.
“질문지 보니까 개혁공천 이런 말이 있던데. YS때 김현철 여연소장도 가세한 개혁공천은 내 뒤의 얘기에요. ‘이재오·김문수·홍준표’ 등이 1차 개혁 공천, ‘오세훈·원희룡·남경필’ 등이 다음이었어요. 근데 (17대 당 경선에서) 줄 세우기하니까 나를 지지하던 젊은 사람들이 다 MB한테 줄서더라고….”
“MB 이후에는 친이(이명박)들이 박근혜를 지지했을까요. 손학규를 지지했겠죠.”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는지, 기자의 반박은 계속됐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노선을 바꾸지 않았으면 승리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거지. 그러니 그 당이 ‘이명박·박근혜·홍준표’로 이어진 거겠죠. ‘손학규 노선’을 지지하진 않았을 거다, 이 말이오.”
당 일각으로부터 “당신 빨갱이 아니오?” 추궁까지 받던 시절이었다. 안보는 지키되 DJ 햇볕정책을 호평하던 나였다. 도지사 시절 북한과의 벼농사 지원을 통해 남북 교류 사업에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런 나를 당에서는 곱게 보지 않았다.
이런 것을 기자는 간과하고 있었다.
6. 길
“나는 내 길을 지켜왔다”
혹자는 탈당 후 당적을 바꾼 데 무게를 둘 것이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 길을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아주 젊을 때는 급진사회주의 생각을 갖기도 했어요. 민주화 운동하던 70년대 때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그 시각 나는 (부마항쟁 일로) 김해 보안대에서 고문을 받고 있었어요. 10·26사태가 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지요. 안 그랬으면 내가 죽었을 거예요. 영국 유학하고 민주주의와 통합의 정치, 중도 정치를 배웠어요. 민자당 입당 때도 보수정당으로 들어간 게 아니었어요.
YS가 주도한 개혁정당으로 들어간 거였어요. 그런 이유로 한나라당에서 대선의 꿈도 꾸게 된 거고. 처음엔 ‘손학규가 YS 직계다’ 눈치도 보고 그랬죠. YS 기세가 등등할 때는 민정당 사람들이 꼼짝을 못했어요. 근데 본 뿌리를 벗어나지 못하더라고요. 후에 들어간 사람들도 동화되고.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구나. 설 자리가 없었어요.”
“민주당하고는 잘 맞았나요. 2007년 1월 대통합민주신당(현 더불어민주당) 대표, 2010년 10월 민주당 대표도 하고, 분당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도 됐잖아요.”
착잡했지만 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당 대표하면서는 내 보편적 복지 지론인 ‘저녁이 있는 삶’부터 평화 문제 등을 담론화 할 수 있긴 했죠.”
“근데 중심 세력에서는 자꾸 밀려났잖아요.”
“당이 친노(노무현), 친문(문재인) 세력으로 바뀌면서 밀려난 거죠. 편 가르기와 패거리 정치, 극단의 갈등이 심했어요.”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싸워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힌트를 얻은 건 독일에 가면서였다. 2012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떨어지고 8개월 정도 체류했을 때였다.
“거기서 배운 게 합의제 민주주의였어요. 독일은 한 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요. 승자독식이 아닌 다당제에요. 제1당이 3당의 정책을 받아들여 연합해 정권을 만드는 방식이죠. 이후 (2016년)전남 강진에서의 토담 생활을 마치고 들고 나온 게 제7공화국이었어요.”
“정계 복귀 후 민주당을 가지 않고 안철수의 국민의당으로 간 이유가 그때문인가요.”
나는 그 표현이 적절치 않다고 봤다.
“안철수당에 간 게 아니에요. ‘제7공화국, 제3의 당’으로 간 거예요.”
2017년 장미 대선을 앞두고 국민주권회의를 이끌던 나는 국민의당과 통합했다. ‘여야가 합의하고 연합하는 다당제 협치를 제도화 하자.’ 제3의 길을 향한 거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 중도와 통합의 정치, 새롭게 창조하는 한국적 대안인 제3의 길, 보편적 복지와 민생 경제를 대표하는 ‘저녁이 있는 삶’과 ‘함께 잘 사는 나라’, 승자독식과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극복할 새판 짜기 ‘7공화국’까지. 이 모두가 평생의 가치로 일군 나의 일관된 길 위의 연장선상이었다.
“2018년 9월 바른미래당(국민의당과 유승민 바른정당이 합한 당) 대표가 된 후 선거법 개정을 추진했잖아요. 그에 대한 소회도 듣고 싶습니다.”
“바른미래당 대표하면서 단식도 불사해가며, 연동형비례제 만들었다는 자부심하나 갖고 있었어요. 근데 법안 형성 과정에서 누더기가 되더니 종국엔 그마저 깨진 거야.”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2019년 12월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과 함께 패스트트랙에 태워 처리됐다. 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이 연합한 결과였다. 하지만 당초 계획과 달리 비례대표 의석의 숫자도 줄이고 거기에 상한선까지 일부만 적용하는 준연동형 수준에 그쳤다. 이 또한 무색하게 6·15 총선에서 제1·2당은 연동형 비례제를 악용해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순간 단식 때가 겹쳐 떠오르며 허탈감이 밀려왔다.
“내가 단식을 왜 했는데. (2018년 12월 4일) 여야가 제3당을 배제한 채 예산안에 덜컥 합의한 거예요. 연동형 비례제를 하지 않으려는 심산이었지요. 나를 희생해서라도 지키자. 그날부로 (국회 로텐드홀에서) 단식에 돌입한 거예요. 한 사흘간은 변도 안 나왔어요. 일주일쯤 되자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 그래도 매일 아침 용모를 단정히 했어요. 조그마한 직원용 샤워실에서 씻고 면도하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이기도 한 강진 생활 중 접한, 사의제(四宜齊)가 생각나서였다.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것. 마음을 정갈하게, 용모를 바르게, 말을 과묵하게, 처신을 똑바르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정치 오래했는데 위성정당 만들 줄은 몰랐나요.”
“그 정도로 상식에 없는 정치를 할 줄은 몰랐지. 다수당의 횡포요 극한 대결의 모순이요 민주주의의 맹점이겠지만.”
7. 다시, YS
“YS니까, 지켰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게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침묵을 깨며, 기자가 말을 건네 왔다. “2015년 11월 22일 YS 서거 때 강진에서 나와 5일장 내내 문상을 지켰잖아요. 발인 전 마지막 날 상도동(YS계파)계가 모인 식사자리에도 참석했고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대권주자로 추대하는 분위기라 소외감이 들었을 법도 한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더라고요. 올해 서거 5주기 추모식도 꼬박꼬박 오고 말이죠. 그렇게 된 배경도 궁금하더라고요.”
“YS가 나를 정치인으로 발탁하고, 뒷받침도 많이 해줬잖아요.”
개인적인 얘기지만, 고마움을 다 말할 수는 없었다. 속으로 삼키고는 “YS야말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문민화에 획을 그은 분이에요. 이 양반은 자기편을 내세우지도 않았어요. 국무총리 보세요. ‘이홍구·이수성’ 자기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장관시킨 건 ‘최형우·서석재·김덕룡’ 정도죠. 나머지는 각계 명망가들로 채웠잖아요. 며칠 전 YS 초대 비서실장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을 만났어요. ‘나는 YS계가 아닌 이기택계인데도 발탁해줬다’하더라고요.”
“그런데 YS가 자기편을 못 챙겨 정권 재창출을 못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솔직히 대표께서도 바른미래당 안에서 결국 자기편 못 만들어 부침을 겪었다는 시각도 있잖아요.”
나는 정색했다. 타협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내 편으로 채워 집권하면 뭐 하게요. YS는 포용과 통합으로, 미래 지향적인 정치를 한 분이에요. 나 역시 통합의 정치를 추구했고요. 패거리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나라 미래는 없어요.”
“현실 정치를 얘기하는 겁니다.”
“현실 정치얘기는 안 하고 싶어요.”
나는 잘라 말했다.
“다시 또 제3의 길이 보이면 동참할 건지요.”
기자는 정치 계획을 물어왔다.
“내가 뭐, 지금 정치에 다시 나설 것은 아니고….”
에둘러 비추며, 대신 강조하고 싶은 것에 힘을 줬다.
“세종대왕 보세요. 한글을 창제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야. 일반 백성이 글자를 몰라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역병이 돌아 방문을 붙여도 읽을 줄 알아야 약을 타가든가 하지.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든 거잖아요. 농사직설 펴내 농사짓는 법도 알려줘, 노비 출신인 장영실에게 관직을 줘 측우기도 만들고.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의 산후 휴가를 주고, 남편에게는 한 달을 주고. 모두 세종 때 펼친 정책이었어요. 우리 정치도 국민을 봐야 해요. 패거리 아닌 국민을.”
※<시사오늘>의 ‘시대산책’은 인터뷰이의 구술을 화자의 시점으로 재구성해 정리하는 형식의 코너입니다. 기술상의 이해를 돕고자 화자의 심리적 기법을 가미, 배경상의 설명을 부연한 점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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