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보수…정체성·인물·시스템 다 바꿔야 미래있다
시대정신 반영, 대안(代案)정당 창당 수준 혁신을
개혁적 ‘중도보수의 틀’ 수권 면모 구축 중요
계파 싸움·낡은 이념에 머물면 ‘만년 야당’
통합당 역대급 참패 이면…더 추락해야 정신 차릴 건가
'젊은 보수'가 비전과 패기로 당 활로 열어야
엄중한 총선 민의, 중진들 부터 백의종군 자세로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병도 주필)
한국 보수정치가 중대 분수령을 맞았다. 대표 정당인 미래통합당이 총선에서 궤멸 수준의 참패를 당했다. 보수 정치사에서 전례가 없는 사태다.
국민은 미래통합당을 비롯한 보수 정치 세력에 레드카드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대로는 2년 뒤 대선에서도 통합당의 미래는 없다. 제대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수주의는 시대 변화에 맞춰 먼저 변화함으로써 혁명적 파괴를 막자는 이념이다. 영국 보수당은 불리한 줄 알면서도 선거권 확대, 미국 공화당은 노예 해방, 독일 보수 세력은 사회보장제도 도입에 앞장서 성공을 일궜다. 한국 보수당도 이를 교훈으로 삼아 이제는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변화에 나서야만 한다.
여당의 독주는 민주 헌정에 적신호다. 대한민국은 이번 총선으로 정부와 거의 전국 시·도·군, 대법원, 헌법재판소에 이어 국회까지 민주당 세력 한 곳이 장악하게 됐다.
총선 승리로 문재인 정권은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지난 3년간의 잘못된 정책에 더한층 드라이브를 걸 것이다. 입법 활동 등에 여당 독주가 더 심해질 개연성이 확연한 상황에서 견제할 야당이 지리멸렬인 것은 국가적으로도 심각한 일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나라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야당이 강해야 정부·여당이 독주하지 못하고, 국정이 엇나가는 것도 막을 수 있다. 통합당이 이제라도 바로 서야 하는 이유다.
보수 각성, 민주주의 미래 좌우
유권자들은 중도층까지 아우를 수 있는 제대로 된 건전한 보수정치의 재건을 바라고 있다. 총선 메시지 중 하나는 '중도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중도는 중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극단의 극복이다. 합리적 보수와 온건 중도층을 아우르는 보수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통합당은 당을 해체하고 백지상태에서 재창당의 수순을 밟는 것이 옳다. 재설계한다는 각오로 근본적 쇄신에 나서야 한다. 개혁적인 ‘중도보수의 틀’을 새로 짜 수권정당의 면모를 확보해야 한다.
보수는 이제부터라도 자기만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대안도 제시할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한다. 보수가 실력 있는 견제 세력으로 거듭나 있을 때 중도층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외연을 넓히는 과정에서 방해가 된다면 극우 세력과도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미래통합당의 총선 참패는 대한민국 보수정치 세력에 실로 많은 과제를 던졌다. 보수 이념의 생명력이 다했는가라는 근원적 의문에서부터 ‘보수 정당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하는 당면 현안까지 다면적이다.
시대정신이 반영된 보수의 각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 나라 민주주의의 미래는 보수 야당의 건강한 회생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됐다.
민심 최후통첩…보수세력 전체 위기
선거 결과를 냉정히 인지해야 한다. 21대 총선은 보수 야당 심판으로 귀결됐다. 다수 국민이 보수 야당을 불신하고 외면했다. 최소한의 수권능력도, 미래비전도 보이지 못한 통합당을 믿을 수 없다는 준엄한 민심의 표출이다.
참패 원인을 코로나19로 인해 민심이 현 정권에 힘을 실어준 탓으로만 돌릴 순 없다. 통합당은 자중지란으로 스스로 무너졌다.
통합당의 패배는 통합당을 넘어 보수세력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지난 70여 년 헌정사에서 보수 정당은 변신과 부침은 있었지만, 언제나 정치의 중심에서 국가의 무게중심 역할을 했고, 야당 시절에도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의 의석을 확보했었다. 그러나, 이젠 삼권분립마저 흔들리게 됐다.
야당으로선 지고 싶어도 지기 어렵다는 정권 3년 차의 총선에서 기록적으로 참패해 충격이 더하다. 민심이 4년 차 접어드는 문 정권 심판보다 야당의 구태와 퇴행을 심판한 결과다. 통합당은 정권을 심판하려다 되레 심판당하고 말았다. 사실상 ‘투표 탄핵’ ‘선거 탄핵’을 당한 것이다.
2016년 20대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총선까지 전국단위 선거에서 지면서 1987년 민주화 이후 첫 ‘4연패’란 오명의 주인공이 됐다.
통합당은 이제 벼랑 끝에 섰다. 전국 단위 선거 4연속 패배를 기록한 것은 고인 물에 안주하는 보수 세력에 대한 민심의 최후통첩으로 봐야 한다.
뼈를 깎는 자성의 노력이 없이는 2년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정권탈환이라는 목표달성도 물거품이 될 위기에 직면했다. 대안정당·수권정당이 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유권자에게 심어주지 못한 데 근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념 정립, 과거와의 단절, 새 리더십 변수
패인은 자명하다. 통합당은 4연패의 치욕에 성적을 안을 때마다 극약처방은 불가피해 보인다고 했지만 말에 그쳐왔다.
이제, 뼈를 깎는 자성이 없으면 통합당 내부에서 나왔던 "존재 자체가 역사의 민폐"라는 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국난을 국민과 함께 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2년 뒤 대선에서 또다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위기임이 분명하다. 이념 정립, 과거와의 단절, 새 리더십 창출은 위기의 보수 앞에 놓인 과제다.
향후 보수 진영의 재편이 어떻게 이뤄질지에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통합당 안팎에서는 ‘중도개혁보수’의 아이콘 유승민 의원, 탈당파 무소속 당선자 홍준표 전 대표와 김태호 전 최고위원, 범야권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까지 포함한 재창당 수준의 ‘2차 야권통합’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와 주목된다.
무엇보다, 정체성, 인물, 시스템을 전면 개조시키는 대수술의 과감한 단행이 관건이다. 보수의 가치를 다시 세우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그동안 보수 정당을 이끌어오던 정치인들이 이번 총선으로 대거 낙선했다. 오히려 새로운 인물들이 부상할 기회다. 발상의 전환과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탄핵 찬반과 특정 인맥에서 자유로운 초선들이 전면에 나서고, 중진들은 열린 자세로 병풍 노릇을 하면 된다.
YS ‘40대 기수론’ 교훈
새로운 인물 수혈을 통해 낡은 보수 이미지를 버리고 완전히 스마트한 보수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당을 바꾸겠다는 결심으로 깃발을 든 '젊은 보수'들이 비전과 패기로 당의 활로를 열어가도록 해야 한다.
최근 세계에선 40대 국가 지도자도 많이 탄생했다. 정치를 개혁하고, 보수정치를 살린다는 진정성으로 도전한다면 국민도 성원할 것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에서 당시 44세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오자 역시 40대인 김대중·이철승이 호응했다. 이들은 당내 세력도 미미했고, 중진들은 구상유취(口尙乳臭)라고 비아냥댔지만, 시대정신과 당원 지지에 힘입어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이처럼 세대교체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사의 교훈이다. 통합당은 이제 벼랑 끝에 섰다는 각오로 근본적 쇄신과 혁신을 해야 한다.
통합당은 이번 참패를 계기로 진정한 대안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코로나 위기를 패배의 핑계로 삼고 대통령 때리기를 계속할 때가 아니다. 국가적 현안이 산적해 있다.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 수준의 혁명적 변화를 꾀하는 것만이 불확실한 미래의 보험이라도 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여당이 반사이익
건국과 산업화를 주도해 온 보수 정당은 늘 여당 아니면 제1 야당으로 우리 정치의 중추 역할을 해 왔다. 총선마다 부침은 있었지만 상대 당의 독주를 막을 수준의 의석은 늘 획득해 왔다.
이번 총선은 소득주도성장과 탈원전 등 반시장정책의 부작용이나 조국 사태와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등 문재인정부의 감점 요인이 적잖았다. 그런 점에서 여당이 개헌 이외 모든 입법활동을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전체 의석 중 5분의 3을 차지한 건 뜻밖이었다. 그만큼 보수 야당의 패배는 참담했다.
통합당이 4·15총선에서 얻은 지역구 의석은 여당의 절반 수준인 84석에 그쳤다. 최대 접전지인 수도권에서는 121석 중 겨우 16석(13.2%)을 얻어 사실상 궤멸했다.
기록적인 참패로 황교안 대표가 사퇴하고 최고위원 7명 중 조경태 최고위원을 제외한 6명이 모두 낙선했다. 당 대표권한 대행을 맡아야 할 심재철 원내대표까지 낙마해 지도부마저 공중 분해될 처지다.
‘정권 심판론’이나 ‘정권 견제론’은 거의 먹히지 않았다. 소득주도성장과 부동산 정책, 조국 사태 등에 실망해 여당에서 이탈한 중도층을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여당이 야당의 잘못에 따른 반사이익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코로나 사태라는 한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통합당의 궤멸에는 블랙홀처럼 모든 현안을 빨아들인 코로나 사태가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코로나가 확대되는 미국, 유럽 등에 비해 우리는 진정세가 두드러지고 각국의 지원 요청도 잇따르면서 정부의 ‘모범 방역’ 주장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이런 객관적 여건이 참패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낡은 인식과 퇴행적 행태
통합당이 구태를 못 벗어난 탓이 가장 크다. 이번 패배는 통합당이 자초했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통합당이 실제로 한 것은 수권 정당 재건이 아니었다. 지도부는 인재 영입과 정책 대안 마련보다는 당내 라이벌 부상을 견제하고 축출하는 데 더 신경을 썼다.
공천이 문제였다. 한때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공천 파동으로 다 날아가 버렸다. 4년 전 총선도 공천 파동으로 놓쳤으면서 버릇을 고치지 못한 것이다. 공천 결과가 몇 번씩이나 뒤집히는 정당에 누가 표를 주겠는가.
이길 수 있는 후보를 공천하는 데도, 새로운 인물을 수혈하는 데도 실패했다. 여기에다 황교안 대표와 김형오 통합당 공천관리위원장, 한선교 미래한국당 대표 간의 내홍까지 겹쳤다.
시민적 상식에 턱없이 모자라는 낡은 인식과 퇴행적 행태는 유권자들의 냉정한 심판으로 이어졌다.
국가적 위기를 맞아 국민은 사회적 거리 두기, 마스크 나누기 등으로 높은 시민의식을 보였지만, 통합당이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결과가 4연속 전국 선거 패배로 나타난 것이다.
근본 체질 그대로가 문제
통합당이 '영남 자민련'이 되어간다는 따끔한 지적이 있다. 민주당이 영남에서의 득표율이 35%에 이르는 데 비해 통합당의 호남득표율이 5%에 불과하다는 것에서 드러난 것에서 보듯 통합당은 이미 ‘영남 자민련’으로 전락했다.
이런 정당이 2년 앞으로 다가온 차기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보는 국민들은 없다. 과거 정당들의 40대 기수론, 재야 흡수통합론, 386 수혈론처럼 새롭게 태어나려는 몸부림이 없다면 그건 운명의 굴레일지도 모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 보수 정당은 궤멸 위기를 겪었다. 그후 보수 정당은 입만 열면 자성과 쇄신을 외쳤지만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근본 체질은 그대로였다. 뒤에선 계파 싸움으로 날을 새우고 기득권 챙기기에 혈안이 됐다.
진정한 보수주의 가치는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혁신과 쇄신인데도 통합당은 이를 철저히 외면했던 것이다. 정부의 경제 실정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도 못했고, 새로운 비전이나 참신한 전략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태극기부대에 편승하여 정책 대안 없이 정부 여당에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았다. 1950년대식 ‘못 살겠다, 갈아보자’구호로 대응했다.
책임과 헌신 저버린 행태
선거 후 당 수습과 진로 모색을 두고서 보인 자중지란도 한숨이 나올 정도다. 선거 결과만큼이나 실망의 연속이었다. 참패의 늪에서 허우적 거렸다.
선거 이튿날 낙선한 두 ‘대표’는 출근도 하지 않고, 당은 공식 논평조차 내지 않는 등 진공(眞空)상태를 보인 것은 무책임의 극치다. 그래도 지지해준 국민에게 감사하고, 낙선자를 위로하며 당선자를 축하했어야 했다.
당 어디에서도 왜 궤멸적 참패를 당했는지 패인을 분석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패배 원인을 짚고 진정성 있는 성찰의 토대 위에서 새 출발 의지를 다져야 할 판에, 오히려 과거에 매달려 허상을 좇고 자리다툼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을 놓고도 주말 내내 서로 다투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갈등에는 차기 당권 향배와 대권후보 선출의 정치역학과 권력투쟁이 도사리고 있었다. 비대위를 한다 해도 짧은 기간 과도적 관리 형태로 하는 것이 맞는다는 주장들도 나왔다.
당선한 다선 의원 가운데 벌써 10여 명이 원내대표 출마 의사를 밝혔다. 이미 대선 후보가 된 듯 행동하기도 한다. 밖에서 보기엔 ‘당이야 어찌 되든 한 자리 차지하려는 자리다툼’일 뿐이었다.
통합당의 이같은 내홍에 대해 “태풍으로 집 기둥이 무너진 와중에도 밥그릇 챙기기 싸움만 벌인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알량한 당의 권력이나마 쟁탈하기 위한 개인·계파 간의 대결을 앞세우는 식이었다. 보수 정치의 기본 덕목인 책임과 헌신을 저버린 행태다.
무소속으로 당선된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통합당 복당과 대권 도전 의사를 밝힌 뒤 당내 설전이 오가는 것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복당을 노리는 무소속 홍 전 대표는 '비대위원장 김종인, 대선후보 홍준표' 구도를 주장하고 있다.
김종인 비대위, 파괴적 혁신이어야
통합당은 결국 '김종인 비대위' 카드를 꺼내들었다.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을 구원투수로 재등판 시켜 당 수습과 쇄신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김 전 위원장 외 당을 수습할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감안한 것으로 분석된다. 김 위원장이 통합당 수술을 직접 집도하는 방안이 유력해 보인다.
통합당은 이제 비대위 체제로 전환된다. 말 그대로 보수진영은 비상상황이란 점을 잊지 말고, 뼈를 깎는 자성 속에 다시 허허벌판 천막으로 돌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 당을 해체한다는 각오로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비대위의 갈 방향은 그야말로 파괴적 혁신이어야 한다. 보수 진영 내부에서 나온 해산 요구를 이해하고 제대로 된 보수 정당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대 여당을 견제할 건강한 야당은 국민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친박 세력까지 진정으로 반성하고, 그 토대 위에서 유권자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하면 여전히 미래는 없다.
백지상태에서 재출발을
전국적인 진보를 능가한 혁명적 세대교체와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희생과 헌신,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가진 자의 도덕적 책무)를 다하는, 보수 본연의 가치를 바로 세워 나가야 한다.
선거에 졌지만 통합당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어설픈 진보세력의 경제·안보 포퓰리즘이 실제로는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증거해 나가야 한다.
당면 과제는 당내 리더십 공백이다. 이기는 공천을 해야 했는데, 중진들을 인사(人事)하듯 험지(險地)로 보내 사지(死地)로 만들었다.
황교안 대표를 비롯한 대권 주자급 후보들이 죄다 낙선한 건 지금의 인물들로는 안 되니 백지상태에서 재출발하라는 민심의 명령이다.
능력 있는 새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안보도 평화도 놓치지 않는 대북정책 등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정책으로 승부해야 한다.
변화와 담 쌓은 기득권 유지
총선 과정과 결과를 깊히 되새겨야 한다. 국민은 문재인정부 국정 운영에 합격점을 준 것일까. 소득주도성장을 비롯해 기존의 정책 방향을 고수해도 좋다는 의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도저히 미래통합당에 표를 줄 수 없는 야당의 현주소가 여당 승리의 첫 번째 요인으로 꼽힌다. 통합당은 탄핵사태 3년 만에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보수세력을 끌어모아 지난 2월 출범했다. 당명에 미래와 통합을 담고 혁신을 약속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위기 때마다 당명을 바꾸고, 당 색깔을 다시 칠하는 것으로 혁신을 가장해왔다. 보수가 통합했다지만 ‘도로 새누리당’에 그쳤고, ‘새로운 보수’도 공수표에 불과하니 중도층이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통합당의 보수 지향은 시민의 눈높이와 맞지 않는다는 게 이번 선거에서 다시 한번 판명되었다.
눈에 띄는 인재 발굴은커녕 이렇다 할 만한 대표공약 하나 내놓지 못했다. 민생 현안에서 책임있는 야당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국민이 문재인 정권 3년의 실정을 심판해줄 것이라고만 여겼을 뿐, '심판 민심'을 표로 연결시키기 위한 전술도 의지도 없었다.
가장 큰 패인은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낡은 인물들이 계속 요직을 독차지하면서 전면에 나선 것이다. 변화와 담을 쌓은 기득권 유지가 보수의 가치인 것처럼 비친 것은 혁신에 눈 감은 탓이다.
공천 파동 재연 배경
전대미문의 참패 책임은 하나부터 열까지 통합당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한 보수주의 가치는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수반해야 하나 이들은 이를 거부한 채 네거티브 정치로 일관했다.
20대 국회 첫해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당하고도 3년 내내 누구 하나 진심으로 반성하며 물러난 사람이 없었다. 친박은 비박 탄핵 세력을 ‘배신자’라 몰아붙이고, 비박은 비박대로 당권 투쟁을 일삼아 ‘도무지 희망이 없는 당’ 이미지를 고착시켰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의 시발점이었던 20대 총선 공천 못지않은 공천 파동의 재연 배경에는 그런 안이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교안 대표가 이끄는 당은 혁신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대결정치를 이어갔다.
황 대표가 공천관리위원회 안을 뒤집고 측근들을 심은 사천 논란에 유권자들은 실망했다. 위성정당의 비례대표 공천 명단도 황 대표의 말 한마디에 뒤집혔다. 계파의 이익을 앞세운 탓에 당내 민주주의는 물론 보수의 가치인 법치조차 무시된 것이다.
이런 사달은 쇄신을 위한 진통이 아니라 개인적 손익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국민은 이를 다 지켜보았다. '물갈이 공천'으로 혁신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싶더니 공천 파동이 커지며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이 중도 사퇴하기까지 했다.
김 공천관리위원장의 ‘사천 논란’과 사퇴, 황 대표의 개입 등 공천을 둘러싼 극심한 분열로 민심이 등을 돌리게 했다. 선거 막판엔 황 대표의 ‘n번방’ 관련 실언, 긴급재난지원금과 관련한 말바꾸기에다 김대호·차명진 후보의 세대비하·세월호 막말 등이 터져나오면서 치명상을 입었다.
대구ㆍ경북 집단감염이 심각했던 3월 중순까지만 해도 미래통합당은 쉽게 총선에서 이길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통합당은 국난 극복에 힘을 합치는, 책임 있는 야당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국민의 분노와 심판을 자초했다.
정책, 막연한 비난만 반복
정책 면에서도 소득주도성장이나 탈원전, 남북 화해 등 정부의 노선을 비판하기에 급급했을 뿐 국민이 납득할 만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코로나19 전쟁 와중에 사태 수습보다는 정부 흠집내기에 급급했고, 긴급재난지원금을 놓고서도 오락가락하며 혼선을 키웠다.
청와대와 여당의 긴급재난금 지급을 ‘퍼주기’라고 비난하더니만, 황 대표는 스스로 ‘모든 국민 1인당 50만원’을 제안하며 오히려 통합당이 판을 키우는 등 보수진영의 논리를 스스로 깨뜨렸다.
이번 선거는 야당이 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였다.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 실패로 경기가 침체해 자영업자·소상공인 등 많은 사람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탈원전과 같은 국가적 자해 정책은 어떤 비판도 듣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다. 조국(曺國) 임명 강행과 국민 분열, 헤아릴 수 없는 내로남불, 울산 선거 공작 사건 등 정권의 행태는 선거로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지금의 야당에는 표를 주지 않았다. '정권의 실정(失政)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통합당만은 찍을 수 없다'는 국민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이 나와도 시장경제 원칙에 충실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 없다. 친북 정책이 동북아 정세 흐름과 맞지 않고 남북 관계 자체도 왜곡시킨다는 비판을 효과적으로 한 적이 없다.
문 정권이 사회주의라는 식의 막연한 비난만 반복해 왔다. 탈원전 정책이 세계 최고 수준인 원전 산업을 붕괴시킬 상황이라는 업계·학계의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국민에 무성의한 자세들
정치 노선도 지리멸렬 자체였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범보수 진영은 자중지란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정작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의 본령은 제쳐둔 채, 탄핵 찬반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철지난 낙인찍기에 급급했다. 정책 대안 없이 정부 여당 반대에만 매달리는 낡고 편협한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공천 내용도 부실했다. 통합당은 호남 지역구 28곳 가운데 12곳에만 공천했다. 전국 정당을 포기한 것이다.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그런 자세는 국민에게 무성의하게 비친다.
3040세대의 민심 악화에 처방을 내놓기는커녕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지도 못했다. 통합당 비호감도가 북한 김정은과 같은 수준이라는 충격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는데도 경보를 울리는 사람 한 명 없었다.
통합당은 선거에서 대패한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듯하다. 국민 눈치를 보지 않고 당내 다툼만 반복하고 있다. 보수 원로들이 모인 국민통합연대가 성명을 통해 “통합당은 자진 해산하고 중도실용 정당으로 환골탈태할 것을 권고”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비상대책위와 대안(代案) 정당론
이제, 통합당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당 재선과 쇄신을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에게 맡기기로 했다. 김 전 위원장은 ‘계엄령 수준의 전권, 무기한의 시간’을 요구했다.
통합당 당헌상(제 96조) 비상대책위원회는 당 대표가 궐위되거나 최고위원회의의 기능이 상실되는 등 당에 비상상황이 발생한 경우 안정적인 당 운영과 비상상황 해소를 위해 설치할 수 있는 기구다.
김 위원장은 총선 참패와 관련해 “국민의 지지를 얻기에 통합당의 변화가 모자랐다는 것은 인정한다”면서 “야당도 변화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이번 총선의 가장 큰 패인이 통합당의 쇄신과 개혁 부족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환골탈태에 나서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일단, 정확한 진단이다.
국민의 심판을 받아 참패했으면 패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뼈를 깎는 마음으로 쇄신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비대위의 첫 주제는 총선 패인 분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과론적 얘기지만 보수 대통합으로 외연을 확장한 뒤 정권 심판론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통합당의 기본 총선 전략은 결국 실패한 것을 알 수 있다. 반문 연대 전략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시말해 국민들이 보는 보수의 의미를 다시 새겨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이제 야당의 역할과 관련, 비판만 하는 정당은 여기서 끝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통합당이 비대위 체제를 거치며 제대로 된 설득력을 갖춘 대안을 제시하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데는 다른 의견이 없어 보인다.
‘과거의 굴레’ 벗어나야
무엇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등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세대교체 등 당내 개혁에 적극 나서야 한다.
상황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정당 투표에서 통합당의 위성정당 미래한국당은 가장 높은 득표율(33.84%)로 더불어시민당을 2석 앞선 19석을 확보했다. 또 부산·경남에선 4년 전 잃었던 의석 상당수를 되찾았다.
통합당은 현역 의원과 21대 당선자 전원에게 차기 지도부 구성과 당 진로에 대한 의견을 묻는 조사에 착수했다.
절박한 것은 사람의 문제다. 정책과 노선의 정비도 긴요하지만 당의 간판과 주류 세력이 교체돼야 민심을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당 안팎에서 830세대(1980년대생, 30대, 2000년대 학번)를 내세우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러한 요구의 부분적 반영일 것이다. 통합당은 그것을 포함한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고 진짜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
시급한 것은 통합당의 주역을 새로운 인물로 바꾸는 정치적 세대교체다.
시대정신을 대변할 새로운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혁명적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통합당, 나아가 범보수 세력을 해체한 뒤 재편성한다는 각오로 인물과 시스템, 가치 모두를 다시 세우는 대수술을 해야 할 것이다.
당 전면에 젊은 세대를
원내 여부에 구애받지 말고 젊은 세대와 참신한 전문가 그룹이 지도부에 대거 진출해야 한다. 총선 패배에 책임이 큰 인사들은 2선 후퇴하고 당 시스템도 혁신해야 한다.
노년층 표에만 매달리는 불임 정당에서 벗어나는 것도 시급하다. 민주당만 쳐다보는 젊은층의 마음에 적극적으로 다가가 그들의 시선을 붙잡는 대안 정당으로 거듭나려는 노력만이 그들의 살길이다.
현재 20~40대 젊은 층의 통합당 지지도는 한 자릿수에서 10% 초반에 머문다. 선거 때마다 30·40대 정치인들을 들러리로 내세우는 식으로는 청년 세대의 보수 거부 현상을 타개할 수 없다. 당 전면에 젊은 세대가 나서는 정공법만이 해결책이다.
통합당 지역구 당선인 84명 가운데 40명이 초선이다. 비례 정당인 미래한국당도 당선인 19명 가운데 정운천 의원을 제외한 18명 모두 초선이다. 당선인의 56%인 이들 58명이 앞으로 보수 혁신의 주역을 자임해야 한다.
그동안 통합당을 이끌어온 중진들부터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해야 한다. 젊고 유능한 새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이 통합당 재건 출발점이라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할 때다. 지도부 공백(空白)을 보수 정당 재정립이라는 전화위복과 환골탈태 기회로 삼아야 한다.
‘국정 평형수’, 국민 이익 대변 실용주의로 나가야
정책 과제도 난제(難題)이다. 지금의 경제 위기는 일방적인 국정 운영과 진영싸움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소모적인 정쟁에서 벗어나 협치를 통해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을 때 위기 극복이 가능하다.
진보와 보수라는 낡은 이념과 진영 대결의 틀을 폐기하고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만들기로 서민을 비롯한 전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실용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고통받는 국민을 외면하고 정쟁에만 매달린다면 등돌린 민심은 더 멀어질 것이다. 경제·민생 현안을 다루는 데는 여야가 따로 없다는 성숙한 자세부터 보여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번 총선은 많은 과제를 남기고 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정부여당의 오만과 독주다. 총선 승리에 취해 국정을 독선적으로 끌고 가려 할 가능성이 크다. 수권 능력을 인정받는 대안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면 권력은 독주하고 폭주하게 된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통합당이 어떻게 제1 야당의 목소리를 내고 새롭게 부활하느냐는 숙제를 안게 됐다. 이번 총선 결과를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 수권정당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한다.
실정의 반사이익만 노릴 게 아니라 정부에 협조할 건 협조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표심에 다가가야 한다. 수권정당의 자질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내후년 대선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전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경제난은 국가의 역량이 총집중하지 않고선 넘을 수 없다. 소비 진작, 고용 안정, 중소 자영업자와 한계 기업에 대한 유동성 공급과 도산 방지 등 과제가 켜켜이 쌓여 있다.
통합당 주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런저런 변화의 욕구와 흐름을 잘 타야 할 것이다. 좌파 정책으로 인해 대한민국호(號)가 뒤집히지 않게 할 ‘국정 평형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보수 지지층이 돌아오고, 언젠가 국민도 진정성을 이해할 것이다.
재활(再活) 여지는 있다
이번 총선 보수의 궤멸은 김 위원장의 “탄핵 이후 자유한국당이 거쳐오는 과정에서 변해야 할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이 잘못돼 별로 노력한 흔적을 보이지 않고 계속 ‘보수, 보수’만 외치다가 지금까지 온 것 아닌가”라는 반문이 공감되는 측면이 있다.
보수가 앞으로는 안일한 생존 전략에서 벗어나 대대적인 혁신으로 환골탈태하라고 호되게 채찍질을 한 것이다. 보수 진영은 ‘보수와 진보’란 프레임을 통한 ‘미워도 다시 한번’이란 구호가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총선 결과를 전면적인 '보수 몰락'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 아직도 재활의 여지는 있다.
실질적인 데이터 분석을 보자. 득표율 차이가 과도하게 의석 수에 반영됐다. '190(범진보) 대 110(범보수)'만 보면 착시를 일으킨다. 비례대표 득표율은 범진보 48.44%, 범보수 40.63%. 7.81%포인트 차에 불과하다. 이 7%가 80석 격차를 만들었다. '의석수 불비례' 현상이고 표심 왜곡이다. 소선거구제의 특성이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실험의 사생아 '위성정당' 꼼수의 결과다.
총선 민심에 가장 근접한 이념 비(比)는 '48 대 40'이다. 이 수치가 대한민국 정치의 현재 지형이다. 보수는 참패했지만 탄탄한 지역기반과 강고한 세대기반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 수치다.
공화주의(共和主義)로 재무장을
정치는 보수와 진보 두 날개로 날아야 한다. 좌파와 우파가 양립하며 건전한 정책 대결을 벌이는 게 국익을 극대화하는 길이다.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잘사는 나라를 만든다는 보수의 이념을 그 세대의 유연한 시각으로 제시하면서 새로운 보수가 어떻게 국가와 사회를 지키고 발전시킬지 희망을 보여주면 국민이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통합당은 이제 선거 결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바탕으로 혁신해야 한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야당다운 야당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백지상태에서 신당(新黨)을 창당한다는 각오로 새 출발의 초석을 깔아야 한다.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는 실력뿐 아니라 더 높은 도덕성과 품격도 갖춰 나가야 한다.
보수 야권이 개인의 자유와 공공선의 균형을 추구하는 공화주의로 재무장하는 모습을 보이면 국민이 다시 눈길을 주지 않을 리가 없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시민적 상식을 갖춘 건전한 보수로 거듭난다면 유권자들도 다시 지지를 보낼 것이다.
이병도는…
1952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했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후 1981년 연합뉴스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 야당출입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저서로는, <6공해제>, <97년 대선 최후의 승자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