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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散策] 이근식 “민주당 간판으로 나섰다, ´빨갱이´로 몰렸다”

기사승인 2018.09.05  15:5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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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식 전 행정자치부 장관
태풍피해 빠른 수습에…DJ ˝이 장관 고맙다˝
여권발급 밤샘줄 보고 분해서 당정회의 소집
˝정치는 착한 청지기처럼 책임가지고 해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글=이근식 정리=김병묵 기자)

우려를 모았던 태풍 솔릭이 예상보다는 적은 피해로 지나갔다고 한다. 다행이지만 그 와중에도 피해를 입은 분들에겐 안타까운 마음과, 빠르게 그 생채기가 치유되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 2002년 국토를 뒤집었던 초대형 태풍 '루사'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내던 내게, 정치인의 소명을 다시금 일깨워 줬던 사건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이에 대한 선배 정치인의 작은 첨언이 다시 이 시대에 한줌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지난 8월 20일 잠실송파교회를 찾은 기자와 장시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 "지금도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나를 왜 청와대로 부르려고 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DJ에게 내가 물어보지를 않았다. 나와 DJ 사이에 직접적 인연은 전혀 없었고, 사전에 알지 못했던 사이다. 다만 추측키로 우리 집안에 민주화 투쟁에 투신했던 어른도 계셨고, 호남정권이라고 하지만 믿고 쓸만한 영남사람도 필요하지 않았나하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일면식도 없는 DJ, 청와대 수석을 제안하다

나는 원래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다. 게다가 내가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거제군수·장승포 시장 등을 역임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정가에서 YS의 직계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문민정부의 끝 무렵 내무부 차관을 하던 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당선돼서 취임 전에 청와대 참모진을 구성하는데, 나를 사회교육문화수석 내정자로 발표했다. 당시엔 발표란 것이 소위 '언론검증'이라 해서 신문·방송에 내정자를 알리면 공론화가 된다. 그러면 이제 언론이 어떤 사람인지 알리고, 여론을 형성해서 수렴했는데 별다른 하자가 없으면 임명하는 식이었다.

언론 보도가 나자 두 군데서 난리가 났다. DJ의 가신들과 중견급 동지들이 강하게 반대했다. '천신만고 끝에 집권을 했는데 청와대 참모진에 어찌 YS계로 분류되는 사람을 앉힐 수 있느냐'고 반발했다.

DJ는 '나도 생각이 있다'고 두 차례나 읍소를 만류했지만, 계속해서 측근들은 소위 '아니되옵니다'를 연발했다. 게다가 일부 시민단체들이 내무공무원 출신이 교육·문화 쪽에 무슨 전문성이 있느냐면서 집단적으로 반대 표시를 했다. 그러니 결국 DJ도 이근식을 청와대에 들어놓지 않겠다고 뜻을 꺾었다.

지금도 나를 왜 청와대로 부르려고 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DJ에게 내가 물어보지를 않았다. 나와 DJ 사이에 직접적 인연은 전혀 없었고, 사전에 알지 못했던 사이다. 다만 추측키로 우리 집안에 민주화 투쟁에 투신했던 어른도 계셨고, 호남정권이라고 하지만 믿고 쓸만한 영남사람도 필요하지 않았나하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새정치국민회의가 새로 새천년민주당을 추진하는데 내게 추진위원으로 들어오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내무부 차관을 이미 그만둔 뒤였는데, DJ의 제의에 대한 고마움도 있고 해서 이를 수락했다. 결국 DJ는 나를 행자부 장관으로 불렀다.

태풍피해와 싸웠던 행자부장관의 기억

2년 가까이, 국민의정부의 끝까지 행자부장관을 꽤 오래했다는 평을 받는데, 사실 장관으로선 오래 한 것도 아니다. 행자부라서 그런 평이 나온다. 옛날 내무부 시절에 내무부장관의 평균 임기는 1년도 안된다. 내무부장관은 대권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노리는 자리였다. 그래서 오래하지 못하는 전통이 있었다. 내가 오래 한 것은 내 능력이 아주 좋았다기보다는 그 자리에 충실했다는 것, 그리고 신의 가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DJ도 신앙심이 돈독했던 분 아닌가.

행자부 장관에 있을 때 나는 장관직에 모든 걸 쏟아서 집중했다. 현장을 500여 군데를 넘게 돌았다. 중앙에서 국가의 정책이 지방까지 잘 스며들고 있는지를 피부로 느끼고 싶었다. 올바르게 집행·추진이 되고 있는가를 확인해 줘야 또 지방공무원들이 중간에서 엉터리 보고를 하지 않는다. 다만 지방 공무원들에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원칙은 있었다. 500번이 넘도록 다니면서 밥은 내가 사고, 시간이 많고 아무리 둘러보기 좋은 곳이라도 일을 마치면 바로 돌아오고, 특산물을 절대 받아 차에 싣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꼭 소방공무원과 경찰공무원, 소년소녀 가장이나 독거노인 등 불우이웃들은 격려를 했다. 그래서 기자들 앞에서도 나는 가십거리 하나 난 적이 없었다.

다만 행자부장관 재임 당시 가장 큰 사건은 태풍 루사였다. 국가는, 정부는, 공직자는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고 역할이다. 그 선두에 선 부처가 행자부 지금의 행정안전부다. 그런데 2002년 이맘때다. 8월말 루사라는 어마어마한 태풍이 몰아치며 전 국토에 난리가 났었다. 특히 강원도는 아주 초토화됐었다. 민심이 실의에 빠지다 못해 분노했다. 경남 거창에서는 고속도로를 점거하는 등 소요가 일어날 움직임까지 있었다.

한 순간도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헬기를 타고 전국을 돌면서 재난현장을 돌았다. 이재민들과 안고, 눈물도 흘리고, 약속을 했다. '여러분들 원상회복시켜드리겠다. 아무 염려 마라. 정부만 믿어라'라면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했다.

즉각 구호를 시작했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전에는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모두 고치고 나서야 돈을 입금해주곤 했었다. 이게 폐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전국의 컨테이너를 수배해서 숙소부터 구하고, 구호금을 처음으로 사전지급했다.

전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서 구호물품 총동원령을 내리고, 내가 전국 지역별로 보금품이 갔는지, 통장에 입금이 됐는지를 직접 전부 확인했다. 그러니 민심이 진정됐다. 이재민들도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언론들도 당시엔 이를 알아주면서 '재난현장엔 이근식 장관이 있다'고 알려줬다. 어느 한 곳에서도 불평과 불만이 나오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숨을 돌렸다.

태풍 이후 DJ가 해외에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돌아왔다. 당시엔 대통령이 귀국하면 대통령 내외와 행자부장관 내외가 티타임을 가지는 것이 관례였다. DJ가 "이 장관, 고맙다"고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래서 그냥 보편적으로 부재중에 별일이 없어서 그렇다는 건 줄알고 통상적으로 답했다. 그랬더나 DJ가 "아니, 수해 때. 정말 고생했다. 고맙다"고 다시 이야기 하더라.

   
▲  "행자부 장관에 있을 때 나는 장관직에 모든 걸 쏟아서 집중했다. 현장을 500여군데를 넘게 돌았다. 중앙에서 국가의 정책이 지방까지 잘 스며들고 있는지를 피부로 느끼고 싶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순수해서 험난했던 정치 여정

처음에 난 정치에 그리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청와대 수석이 무산되고 행자부 장관을 하기 전인 2000년, 새천년민주당 영입 인사로 고향인 경남 통영·고성에서 출마하게 됐다.

지금은 경남지사도 민주당 사람이고,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민주당 후보에게 경남은 완전히 시베리아, 그야말로 동토의 땅이었다. 고성은 고향인데도 내가 민주당이라고 하면 당시에 '빨갱이'라고 몰아세웠다. 내가 연설을 하고 가면 뒤따라 오는 다른 당에서 "방금 연설하고 간 새천년민주당 이근식은 빨갱이다. 빨갱이를 찍어주면 안된다"고 연설했을 정도다.

이렇게 이념적으로 공격받는건 당연했고, 정치적·인간적인 수모도 많이 당했다. 서운함도 컸다. 내가 공직에 있을 때는 고향에 내려가면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여러 민원과 예산을 내가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정말 많이 해줬다. 그런데 민주당 간판으로 선거에 나가니 모두 나를 피했다. 도와줬던 사람들도 등을 돌리는건 예사였다. 내가 재향군인회 회관을 짓도록 지원을 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나는 군필자고 다른 후보들은 거의 다 미필이었다. 그럼에도 재향군인회 간부들을 만나러 가면 한 사람도 만나주지 않았다. 사람들 모여있는 곳에 가서 인사를 드리려고 문을 열면, 콱 닫아서 목이 끼어버리는 일도 흔했다. 어디 가서 마이크를 잡으려고 하면 '여기가 어디라고 오냐'하면서 뛰어나와서 확 떠밀어 버린다. 많이 울었다. 나도 서운했지만, 그분들 입장에서 보면 내가 돌변한 것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상처를 너무 많이 입었다.

그래서 열린우리당 입당 제안을 받고도 망설였다. 이해찬 의원이 당 정책위의장으로 있을 땐데, 나를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러면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그래서 당장 답을 못했다. "우리 집사람이 선거문제로 고민을 많이 한다. 통영고성에서 너무 어려운 선거를 했기 때문에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대답했다. 당시가 9월이었는데, 서너달 뒤에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2월에 또 연락이 오길래 입당을 했다. 그리고 3월에 당 의장이던 정동영 의원에게 전화가 와서 국회의원에 나와달라고 하더라.

   
▲ "우리 정치인들이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과연 지금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느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즉답이 어려울 것 같다. 선한 청지기같은 정치인이 되어 신뢰를 얻어야 한다. 주인의 뜻을, 주인의 계획을, 주인의 생각을 그대로 집행하는 그런 청지기가 됐으면 좋겠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송파는 달랐다. 그래도 내가 장관을 하면서 얻은 인지도도 있고, 나를 빨갱이로 매도하는 이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현역 두 사람과 싸워야 했다. 한나라당에선 이원창 국회의원이, 민주당에선 김성순 의원이 나왔다. 표를 나랑 김 의원과 갈라서 가져가야 하는 상황이라서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탄핵 역풍도 있고 해서, 17대 때는 당선됐다.

하지만 18대 총선 때는 출마를 못 했다. 아픈 추억이다. 나는 16대와 17대 모두 영입인사로 전략공천을 받았었다. 그래서 공천 어려운줄을 전혀 몰랐다. 그냥 의정활동을 성실히 하고, 도덕적인 하자도 없고, 열심히 지역현안을 챙기면 다시 공천이 오는 줄 알았다. 중앙당에서 누가 공천심사위원인지, 실권을 가진 줄도 전혀 몰랐다. 공천심사를 받고 당일에도 지역을 쭉 돌면서 현안을 챙기면서 기다리는데 느닷없이 공천이 안 되더라. 황망했다. 너무 경험이 없었던 거다. 지금 생각하면 공심위나 고위당직자들도 내가 누군지 알아야 공천을 주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그렇게 좋게 생각을 하고 마무리를 했다.

그래도 의정 활동에서 보람찼던 일들은 꽤 있다. 대표적인게 여권 발급을 간소화한 거다.

지금은 여권이 쉽게 나오지만 발급이 어렵던 시절이 있었다. 언론에도 보도되고 하길래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종로구청을 한 번 방문해 봤다. 내가 민주당에서 제2정책조정위원장을 할 떈데, 제2정조위는 외교·통일·국방 담당이다. 가 보니 4층이 접수창군데, 접수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1층 도로까지 나와 있더라. 밤새 이불을 가져다 놓고 있는거다.

그 모습을 보고 '이건 나라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여권 하나 내는데 밤새 도로에서 이게 뭐하는 일인가. 엄청난 사회적 손실이라고 느꼈다. 너무 분해서 새벽에 바로 관계부처 당정회의를 소집했다. 기획재정부 장관, 외교부 장관, 행자부 장관 등을 불러서 이거 알고있었느냐고 다그쳤다. 다들 언론에 나왔으니 알고는 있었다고 답했다. 이거 그냥 두면 안된다고 내가 말했더니, 각 부처에서 애로사항을 토로하더라.

사실 들어보면 공무원 입장에서 나름 납득할만한 이야기도 있었다. 기재부에선 예산이 어떻고, 행자부에선 인원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각 부처가 자기 생각만 하다보면 절대 해결을 못한다. 내가 관료 출신이라 잘 알지 않나. 매주 불러 보완회의를 하고 집요하게 요구하니 결국 다들 손을 들더라.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여권발급이 간소화됐다. 지금 여권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나. 농담이지만, 내가 '쇼맨십'이 있는 정치인 같았으면 많이 을궈먹었을 것 같은데 그냥 해결되니 나 혼자 흐뭇해하고 지나갔다.

정치는 착한 청지기처럼

우리 정치인들이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과연 지금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느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즉답이 어려울 것 같다. 선한 청지기같은 정치인이 돼 신뢰를 얻어야 한다. 주인의 뜻을, 주인의 계획을, 주인의 생각을 그대로 집행하는 그런 청지기가 됐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의 주인이 누구인가. 국민들 아닌가. 그렇게 국민들의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

청지기가 주인알기를 우습게 알면 자격을 잃은 거다. 위임해준 권한이, 권력이 무엇인지 모르면 안 된다. 마이크를 가져다 대면 문제를 제기하다가, 마이크를 떼면 내가 언제 했느냐고 시치미를 떼면 안 된다. 문제를 제기했으면 정치적 선전효과가  없어도 끝을 봐야 한다. 그렇제 않으면 그 민생문제는 사각지대로 남게 된다.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착한 청지기'처럼 책임감 있는 정치인들이 많은 시대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이근식 정리=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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