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신민당사] 역사의 변곡점…‘YH사건’ 있었던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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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신민당사] 역사의 변곡점…‘YH사건’ 있었던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8.08.14 1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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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 사건 이후 YS 제명…부마민주항쟁 기폭제 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1979년 신민당 총재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둔 신민당사의 모습. ⓒ김영삼민주센터

1979년 8월 9일,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는, 당사를 찾은 YH무역 노동자들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은 눈물겹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 경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YH무역은 1966년 창업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1970년 기준 수출 순위 15위에 오를 만큼 급성장한 기업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들어 가발 산업 후퇴하고 수출이 감소하면서 경영 상태가 악화되자, YH무역은 공장이전·위장휴업 등 불법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대거 해고했다. 

▲ 마포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자 종업원들을 경찰들이 끌어내고 있는 모습. ⓒ김영삼민주센터

하지만 이러한 ‘무리수’에도 경영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1979년 YH무역은 과다한 부채와 적자 운영,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 등을 이유로 일방적인 폐업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러자 회사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인 YH무역 노동자들은 ‘강성 야당’이었던 신민당에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기로 결정하고,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로 모여들었다. 

YH무역 노동자들의 호소를 들은 YS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곧바로 당사를 집회 장소로 내줬고, 당직자들을 동원해 경찰의 접근을 차단했다. 아울러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노동청에 연락을 취해, 사건 해결을 위한 협상 테이블 마련에도 착수했다.

그러나 정부여당의 선택은 ‘강제 진압’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무려 1000여 명의 경찰 병력을 동원해 YH무역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했다. 경찰은 앞을 막아서는 신민당원들과 노동자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했으며, 건물과 집기를 파손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김경숙 씨가 사망하고, 신민당 의원과 당원은 물론 취재 중인 기자들까지 폭행을 당해 부상을 입었다.

또 경찰은 노조 지부장 최순영 씨 등 여공 172명과 신민당 당원 26명을 강제 연행했다. 정부는 YH무역 노조의 신민당 농성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인명진 목사와 문동환 목사, 이문영 전 고려대 교수, 고은 시인 등 8명을 구속했다.

「3일째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YH무역 주식회사 여종업원 170여 명이 11일 새벽 2시쯤 1000여 명의 기동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이날 여자종업원들이 잠이 든 사이 출동한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비상계단을 통해 4층 강당으로 진입, 30분 동안 여자종업원들을 끌어내 대기 중이던 버스에 태워 경찰에 연행했다.
이날 경찰과 대치 중 YH무역 여자종업원 김경숙 양이 면도칼로 왼쪽 팔목을 긋고 4층에서 뛰어내려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이 소동으로 취재 중인 기자 12명을 포함, 신민당원 경찰관 여종업원 등 모두 50여 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중략)

신민당 주위에 모인 경찰관들은 담을 넘어 신민당사 정문으로 진입, 2층에서 신민당원들과 맞부딪쳐 한때 밀고 밀리는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당원들은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관들을 제지했고, 4층 강당에서 잠자다 깬 YH무역 여자종업원들은 병과 화분 등을 내던지기도 했으나 밖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 차량들이 서치라이트를 비추자 일단 병 던지기를 중단했다.
2층 저지선을 통과한 경찰관들은 4층 강당으로 들어가 여자종업원들을 포위, 경찰관 3~4명이 종업원 1명씩을 끌어내 밖에 대기하고 있던 6대의 경찰버스에 태워 연행했다.

이때 반항하던 여종업원들과 신민당 청년당원들이 경찰관들과 난투극을 벌여 20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이를 취재하던 한국일보 박태홍 기자, 최규식 기자, 중앙일보 양원방 기자, TBC 노재성 기자 등이 경찰관들에게 카메라와 야통증을 뺏기고 폭행을 당했다. (중략)
한편 기동대의 당사 진입 때 2층 회의실에서 경찰기동대 및 사복경찰관과 충돌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은 중상을 입었고, 황낙주 원내총무, 박용만 의원도 가슴 등에 타박상을 입어 메디컬센터에 입원했다.

이밖에 녹십자병원에 입원 중인 김형광 의원을 비롯하여 신민당 당사무처 간무 10여 명도 중경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신민당사는 이 소동으로 2층 회의실 유리가 거의 모두 깨지고 전화, 집기 등이 부서지는 등 수라장이 됐다.
1979년 8월 11일 <경향신문> ‘오늘새벽 2시 신민 당사에 농성 YH종업원 경찰력 투입 해산’」

▲ 마포 신민당사가 있던 자리에는 SK 허브그린이라는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 ⓒ시사오늘

하지만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민당은 김경숙 씨 사인 규명, 책임자 문책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YS도 특유의 ‘강경 투쟁’을 지속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압박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YS의 <뉴욕 타임스> 인터뷰를 문제 삼아, YS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해버린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불러왔다. YS 제명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는 사태로 비화됐다. 그리고 이는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 불을 댕기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YH사건과 YS 제명은 우리 사회가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를 얼마나 억압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YS가 제명된 지 12일 후, 부산과 마산에서는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후,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YH사건을 우리 역사의 변곡점(變曲點)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는 이유다. 

▲ SK 허브그린 정문 앞에 있는 작은 삼각형 동판. 이 자리의 역사적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시사오늘

한편, YH사건이 있었던 신민당 마포당사는 1981년 6월 서울시에 매각됐다. 이 건물에는 대한적십자사 중앙혈액원이 들어섰으나, 1997년 중앙혈액원이 이전하면서 한동안 공터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2002년 ‘SK 허브그린’이라는 오피스텔이 자리를 잡은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제 이 역사적인 건물의 의미는, SK 허브그린 정문 앞에 있는 작은 삼각형 동판에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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