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식의 正論직구] 공해 없는 말글생활을 위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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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식의 正論직구] 공해 없는 말글생활을 위한 단상
  • 김웅식 기자
  • 승인 2018.05.10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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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웅식 기자) 

▲ 아파트 단지에 설치돼 있는 조형물과 작품설명. ⓒ 시사오늘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는데, 작품설명이 다음과 같이 돼 있다.
 
‘아파트의 기하학적 주거공간에 우리의 자연을 닮은 유려한 곡선으로 인체의 형상을 상승감 있게 처리, 조화로운 대비로 주변공간에 활력을 줌.’

매일 보는 조형물인지라 무심코 지나쳤다. 지난주에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궁금해서 작품설명을 읽어봤는데 무슨 말인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기하학적 주거공간’ ‘자연을 닮은 유려한 곡선’ ‘조화로운 대비’는 한글로 표기만 돼 있을 뿐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 말글생활에 공해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사례로 넣을 수 있겠다.

이전 직장에 있을 때 홍보용 자료를 쓰곤 했는데,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써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야 했다. 특히 기술연구소에서 보내오는 신기술 관련 내용은 전문용어가 많아 그냥 한번 읽어봐서는 내용조차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선배의 따끔한 질책과 함께 보도자료 초안은 뻘겋게 변하기 일쑤였다.   

길을 가다 보면 말글생활을 어지럽히는 게시물을 많이 보게 된다. 어려운 한자어나 외래어, 잘 쓰지 않는 말을 사용해 보는 이를 주눅 들게 한다. ‘내가 배움이 부족해서 이해를 못하나’라는 자괴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런 글들은 남을 배려하지 않은 것이다. 고압적인 어휘와 어투로 ‘이렇게 정했으니 무조건 따라 오라’는 식이다.

국민을 배려하지 않는 글 가운데 대표적인 게 판결문이 아닌가 한다. ‘대쪽판사’로 불리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는 대법관 시절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쉬운 판결문 쓰기를 강조하고 실천했다. 그의 판결문은 명쾌한 단문으로 이어지는데, 2~3쪽짜리 판결문 전체가 한 문장이기 일쑤였던 당시로서 신선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지난달에 있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 1심 선고공판의 부장판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1심 선고공판을 맡은 김세윤 부장판사는 100분 넘게 판결요약본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법률 용어를 쉽게 풀이해 설명했다. 이러한 모습은 전에 보지 못했던 것으로 국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우리 말글을 올바르고 쉽게 써야 한다. ‘어려운 말글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정말 쉬운 말글은 아무나 못 쓴다’는 말이 있다. 인터넷공간에서 국적 불명의 글은 우리 말글을 해치는 주범이 되고 있다. 우리 말글의 지킴이 기능이 약한 언론매체의 글들은 중병에 걸린 지 오래다.

우리 말글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깊이 있는 이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언론이 앞장서야 한다. 내용만 제대로 전달하면 되지 글에 티끌 좀 있는 게 무슨 대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은 언론이 쓰는 말과 글을 표준으로 생각하고 따라하기 마련이다.

영국 BBC, 프랑스 르몽드 등 세계의 권위 있는 언론들은 자국어를 지키고 가꾸는 ‘주역’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담당업무 : 논설위원으로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2004년 <시사문단> 수필 신인상
좌우명 : 안 되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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