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잃어버린 기억, 1987 전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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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잃어버린 기억, 1987 전후史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8.01.26 1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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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역사도, 분열의 역사도 정치권이 썼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한설희 기자)

▲ 〈시사오늘〉은 ‘침묵의 시간’으로 안일하게 평가되는 80~87년 초반과 ‘분열의 시간’이라는 87년 후반을 기억해보려 한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전두환 정권 당시 간절하게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사람, 바로 당신이다. ⓒ시사오늘 그래픽디자인 김승종

사람들은 기억 속에 망각과 주관을 담아 추억을 만든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바래지고, 추억은 선명해진다. 영화 <1987>의 흥행에 힘입어 사람들은 저마다 1987년의 추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1987년 6월의 함성은 우리들에게 선명하다. 이는 아프지만 영광스러운 추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억들이 기억을 왜곡시키는 함정을 남기듯, 87년 이전 ‘침묵의 시간’과 87년 이후 ‘분열의 시간’은 대부분 단면적으로 평가된다.

98℃, 99℃가 넘어 100℃가 되어야만 물은 끓는다. 99.9℃까지 불을 지펴도, 겉보기엔 큰 변화 없는 평온한 ‘침묵의 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 0.1℃의 차이로 물이 끓어 넘치듯,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폭발한 민심은 이전까지 99.9℃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시사오늘>은 ‘침묵의 시간’으로 안일하게 평가되는 80~86년과 ‘분열의 시간’이라는 87년 후반을 기억해보려 한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전두환 정권 당시 간절하게 민주주의를 열망했을 사람, 바로 당신이다.

1987, 침묵의 시간

1980.08.27.

당신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군부(軍部)를 이끌고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모습을 TV화면으로 지켜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순간이나마 고조되던 민주화의 열기는 이내 물을 끼얹은 듯 차가워진다. 군인들은 5월부터 김영삼(YS)의 상도동 자택을 둘러싸고 가택연금 조치를 취했고, 이에 YS는 8월 13일 현 상황에 야당 총재로서 책임을 지고 위협받는 측근들을 보호하고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제 민주화는 잡을 수 없는 안개 같기만 하다. 모든 것이 막막해 보인다.

1981.01.15.

전두환 대통령은 자신을 총재로 한 민주정의당을 창당한다. 당신은 이 민정당이 군사정권의 집권당이던 민주공화당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옆에서 같이 TV를 보던 동료는 “그냥 전두환이가 더 해먹으려고 만든 정당”이라며 버럭 화를 낸다. 당신은 그의 말에 동감하며 TV의 전원을 껐다.

1982.12.16.

민주화 세력의 한 축이던 김대중(DJ)마저 전두환 정권의 압박으로 신병치료를 명분으로 미국으로 2년간 출국하게 된다.

▲ 단식 투쟁 중인 YS를 지켜보고 있는 정치인들. 23일간의 단식은 민주화 전선 구축과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김영삼자서전

1983.05.18.

YS가 장장 23일간에 걸친 단식투쟁을 시작한다. 5월 18일,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절정에 이른 ‘광주사태’를 상기시키는 바로 그 아픈 날짜다. 재야 민주세력 중 한 명이었던 김정남(영화 <1987>의 핵심주인공)은 YS의 메모를 토대로 ‘국민에게 드리는 글’과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작성한다. 이 성명서에는 △구속인사 석방 및 전면 해금 △해직교수와 근로자 및 제적학생 복직·복교·복권 △언론의 자유 △개헌 및 국보위 제정법률 개폐 등 ‘민주화 5개항’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단식 성명서는 군부의 언론 통제로 인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못했다. 이 소식은 AP통신 등 외신을 통해 알려졌고, 국내신문에서는 ‘정치현안’ 등의 애매한 표현으로만 언급될 수 있었다.

그러나 YS의 단식을 계기로 다시 모이게 된 민주세력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이 성명서를 대학가는 물론 전철, 시내버스 등에 뿌리면서 국내 전역에 전파한다. 당신도 새벽녘 발에 채이던 한 장의 유인물을 집어들었다.

“민주화투쟁을 더욱 굳건히, 그리고 더욱 튼튼한 신념으로 해 나아가기 위하여 이번 단식투쟁을 하는 만큼, 나는 이 단식으로 민주화투쟁에 대한 나의 움직일 수 없는 결의를 나 자신과 국민에게 분명히 하는 바입니다. 나에 대한 어떠한 소식이 들리더라도 그것에 연연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민주화에 대한 우리 국민의 뜨거운 열정과 확고한 결의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나의 호소요 당부입니다.” (단식에 즈음하여中)

이 소식이 알려지며 미국 워싱턴에서 DJ도 연대 의사 성명을 발표한다. 이에 이민우를 비롯한 전직 국회의원들이 모여 ‘김영삼 단식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YS의 민주화투쟁을 전폭 지지하며 민주화 전선을 구축한다고 한다.

당신의 가슴속에도 다시 ‘대통령 직선제’를 향한 열망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YS가 단식을 그만둔 후에도 개헌을 밀고 나갈만한 동력이 생겼다는 확신이 든다.

1984.12.11.

그로부터 1년이 흐른 84년 5월이 되어서야 진통 끝에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 몇몇 재야 세력이 합쳐진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발족했다. 그리고 공동의장을 맡고 있던 YS는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민추협의 총선 참여를 선언한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국민운동기구로서 민추협 조직을 계속 유지·확대·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범국민적 민주화 추진의 일환으로 선거투쟁을 전개하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선거투쟁은 민정당에 대한 반대 투쟁을 핵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독재 정권이 치르는 선거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회의감이 앞선다. 전두환에게 유리한 중선거구제 하에서, 괜히 당신의 소중한 한 표가 독재에 정당성만 부여해주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다.

1985.02.06.

당신은 동료와 함께 이날 옛 서울고등학교에서 열리는 이민우 신한민주당(민추협을 모태로 한 정당) 총재의 종로·중구 합동연설회를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연설 30분 전 일찌감치 도착한 당신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광경이 펼쳐진다. 이미 운동장과 스탠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자리를 잡지 못한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단상 가까이에 있는 고목나무에 올라타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인파를 뚫고 자리를 잡았다. 이 총재가 대통령직선제와 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우자 청중들이 연신 환호하기 시작한다.

“살인정권의 심판은 종로 1번지에서 하겠습니다!”

이 총재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서있던 넥타이 부대들이 벅찬 표정으로 박수갈채를 보낸다. 어쩌면 민주화가 아주 먼 얘기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1985.02.12.

12대 총선,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신민당은 제1야당이 되는 돌풍을 일으킨다. ‘관제야당’ 민한당이 전국구 포함 35석을 차지한 것에 비해, 신민당은 67석이라는 두 배에 가까운 성과를 보였다. 이에 힘입어 신민당이 직선제 개헌을 위한 1000만 명 서명운동을 진행한다고 한다. 이제 대통령을 당신의 손으로 뽑는 날이 정말 목전(目前)에 와 있다. 동료와 함께 직선제 개헌 요구서에 서명하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른다.

1986.12.24.

이민우 총재가 ‘이민우 구상’을 발표한다. 이 총재는 △언론자유 보장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공무원 정치중립 보장 △국회의원 선거법 협상 △지방자치제 도입 등 ‘민주화 조치 7개항’을 전두환 정권이 수용한다면 의원 내각제 개헌에 적극 응하겠다고 말한다.

청천벽력(靑天霹靂)이다. 이는 당신과 동료들이 신민당을 뽑은 이유, 시민들이 응집한 목적 그 자체인 ‘직선제 개헌’을 깡그리 무시한 처사다. 희망이 차올랐던 자리는 분노가 대신한다. 당신은 이틀 후 민정당의 대표 노태우가 ‘이민우 구상’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는 언론 보도를 접한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직선제는 물 건너가겠다는 노파심이 든다.

1987.01.15.

당신은 이날 오후 <중앙일보> 신문을 읽다가 사회면 2단에 있는 한 기사를 보게 된다. 어젯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학생이 경찰에 연행돼 남영동에서 심문을 받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다. 그날 저녁 TV 브라운관 속엔 치안본부장 강민창이 등장한다. 그는 박 군의 사망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망언을 내뱉는다.

“책상을 ‘탁’치니까, ‘억’하고 죽었다.”

1987, 점화의 시간

그리고 여기서부턴 당신이 추억하고 영화가 재생하는 1987년 6월의 서막이 펼쳐진다.

부검 결과 박종철 군의 신체에 피멍과 고문 흔적이 발견됐고, 정부는 은폐에 실패했다. 언론은 보도지침을 깨고 진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갑작스러운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는 민심을 더욱 격앙시켰다. 전두환 대통령은 간선제가 현재로선 최선이니 ‘직선제 개헌 논의는 나중에 하자’는 논리로 여론을 묵살하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재야 민주 세력이었던 이부영이 쓴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으며 고문경찰은 2명이 아닌 5명이었다”는 내용의 서신을 김정남에게 전달받고, 5·18 7주기 추모미사에서 이 5명의 이름을 폭로했다.

박 군의 사건은 ‘격발 장치’가 되어 시민들 가슴 속에 잠들어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폭발시켰다.
대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갔고, 그러던 도중 6월 9일 연세대학교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 파편을 맞아 부상으로 숨졌다. 연이은 참사가 발생하자 더 이상 우리의 딸들과 아들들을 잃을 수 없는 부모들도 거리로 나섰다.

마침내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는 ‘6·29 선언’으로 모든 폭풍이 그친 듯 보였다.

▲ 갑작스러운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는 민심을 더욱 격앙시켰다. 이에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자, 시민들은 가슴 속에 잠들어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깨워 거리로 뛰쳐나갔다. ⓒ뉴시스

김덕룡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지난 11일 본지와의 만남에서 “YS와 DJ 두 분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었고,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종교계,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민주헌법쟁취범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서 6월 항쟁의 중심 세력이 됐다”고 회상했다.

김 수석부의장은 “이한열 열사의 죽음 등 안타까운 사건을 계기로, 소위 넥타이 부대라고 하는 시민들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고 군부정권으로부터 6·29 항복을 받아냈다”며 “그렇게 87년 헌법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동화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동화보다 잔혹하며, ‘폭풍의 끝’으로 보였던 87년 6월은 ‘폭풍의 눈’에 불과했다. 정치권의 폭풍은 잠잠해지는 듯하다가 다시 시작됐다.

시간은 무심하게 직선으로 흐른다. 이제부턴 ‘분열의 시간’으로 불리는, 1987년 나머지 6개월의 이야기다. 단순히 ‘죽 쒀서 개줬다’는 문장으로만 이해하기엔 현 세대에게 너무 많은 유산을 남겨버린 6개월, 180여 일이다.

1987, 분열의 시간

1987.08.08.

‘이민우 구상’ 이후 신민당은 서로간의 불신(不信)으로 분열된다. YS는 상도동계와 통일민주당을 만들고, DJ는 이날 YS의 통일민주당에 입당하겠다고 선언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 이면에 두 사람 간 대선을 향한 힘겨루기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때의 당신은 미처 알지 못했다.

1987.08.11.

12월에 있을 제13대 대선 후보를 두고, 정치권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YS와 DJ의 지지자로 갈라지고 있었다. 당신은 YS(또는 DJ)를 지지하지만, 동료는 DJ(YS)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다가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노태우가 당선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이 사람들 사이에 고조됐다. 상황을 인지한 YS와 DJ는 첫 단일화 협상을 시작한다.

YS의 상도동계는 故김동영, DJ의 동교동계는 이용희를 내세워 한 치의 양보 없는 설전에 돌입한다. 지루하고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1987.09.14.

YS가 DJ의 지방순회 중단을 요구한다. 후보 조기 단일화를 시작해야만 통일민주당에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를 거절한 DJ는 ‘미창당 지구당 분할’을 역으로 제안한다. 당시 지구당위원장(당협위원장)은 92곳 중 36곳이 공석이었고, 채워져 있는 56곳은 YS측이 30대 26으로 더 많았다. 이에 DJ는 실질적 평등을 고려해서 남은 36석을 18:18로 나누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10석을 더 준 23:13으로 나눠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YS가 거절하면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된다.

1987.09.29.

YS와 DJ의 단일화를 결정하는 회담, ‘9·29회동’이 시작됐다. 서울역 뒤에 있는 통일민주당 당사에서 ‘양김(金) 단일화 협상’을 위해 끝장 토론까지 불사한다고 하니, 결국 어느 쪽으로든 승부가 나지 않겠느냐는 낙관적인 마음이 꿈틀댄다. 당신은 동료들과 함께 누가 단일 후보가 될 것인가 추측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려고 했으나, 그날 오후 단일화 협상이 결렬됐다는 비보(悲報)를 접하고 만다. 두 후보가 모두 욕심을 놓지 못해 생긴 참사라는 생각에 화가 치민다.

한편,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YS계의 핵심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지난 2017년 2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그날을 증언한 바 있다.

“점심을 설렁탕을 시켜놓고. 오전 10시 부턴가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몇 시간이 지나 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나니 DJ 차례가 됐다. 사실상 단일화 여부가 달려있는 상황에서 DJ가 단상에 올라서 입을 열었다.

‘군부와 싸우고 아스팔트 길에서 최루탄을 마시며, 끌려가고 옥살이를 했던 건 김영삼 총재 아니냐. 나도 외국에서 투쟁했지만 국내 현장에서 제일 고생했던 사람이 YS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까지 DJ가 말을 마쳤다. 우리 상도동계 사람들은 모두 아, 드디어 단일화가 이뤄지는 구나 하고 들떠있었다. 그런데 DJ의 비서가 갑자기 단상으로 다가가 쪽지를 한 장 건넸다. 쪽지를 받아 읽은 DJ가 ‘함석헌 씨가 운명 직전인데, 자신을 보고 싶어 하니 을지로 백병원으로 빨리 가 봐야 겠다’라고 말하기에 우리는 다들 큰일이 났다고 빨리 가보라고 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이는 거짓말이었다. 함석헌은 그 당시 비서와 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 자리를 모면하려는 것이었고, 처음부터 DJ는 독자 출마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DJ의 이러한 행보의 뒤엔 일명 ‘4자 필승론’이라는 논리가 있었다. 당시 DJ는 ‘4자 필승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노태우·김영삼·김종필·김대중 4인 출마 시 노태우·YS가 영남 지역, 김종필이 충청 지역, 자신이 호남 지역과 수도권 지역의 표를 가져가면서 대권을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동교동계 참모들 중 조윤형과 박영록이 제시한 전략이었다.

1987.10.10.

YS는 통일민주당 후보로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두 후보 간의 접점은 이제 없는 것만 같다.

1987.10.22.

최종 담판을 위해 외교구락부에서 DJ와 YS가 접선한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당신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이 날의 접선 결과를 기다려보기로 한다.

1987.10.26.

DJ는 끝내 YS의 ‘단일화 전당대회’를 거부하고, 이틀 후인 2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하고 독자 후보로 나선다. 당신은 생사를 걸고 함께 민주주의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투쟁하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실제 YS와 DJ의 자서전에 따르면, 22일 YS는 DJ의 ‘미창당 지구당 분할’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통일민주당 내 경선 및 단일 후보를 낼 것을 제안했다. 반면 DJ는 이미 경선 일정이 너무 미뤄졌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제 후보단일화를 위해서는 경선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첫째, 경선은 공평한 게임이었고, 김대중은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둘째, 예측할 수 없는 경선을 통해 단일화가 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 결과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이다.” -YS 자서전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12페이지 中

“김영삼은 내가 요구한 미창당지구당 조직책 임명권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선거일정상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사실상 후보단일화 협상은 결렬됐다.” -DJ 자서전 <김대중 자서전> 503페이지 中

1987.12.16.

제13대 대선이 치러지고, 결국 군부세력에 속한 노태우가 당선된다. DJ의 ‘4자 필승론’은 결국 무용(無用)했던 셈이다. 노태우는 36.6%라는 역대 최저 득표율로 28%의 YS, 27%의 DJ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치지도자의 오판으로, 당신이 ‘박정희·전두환 암흑기’에서 꿈꿔왔던 민주주의는 상처로 남았다. 민주화를 태동시킨 것도 83년도의 그들이었는데, 모든 걸 수포(水泡)로 만든 것도 87년도의 그들이었다.

▲ 여야 영수회담의 호헌철폐가 결렬된 후 민추협, 통일민주당 등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모여 시청앞에서 거행한 6·26 평화대행진. 노태우의 6·29 선언을 불러온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김영삼자서전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은 지난 11일 영화 <1987>을 민추협 인사들과 단체 관람한 후 본지와의 만남에서 “그 때 우리 민주세력이 분열되지 않고 후보 단일화를 했다면 바로 민주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는데, 양 세력이 분열돼서 노태우 정권이 탄생하게 됐다”고 평가하며, “그것이 현재 보수와 진보의 정치세력으로 분열시키고 우리 사회가 진영 논리에 빠져 홍역을 치르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큰 후회도 하고, 책임감도 많이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천하는 오랫동안 나뉘어져 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게 되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나뉘어지게 된다’는 삼국지연의의 도입부 문장이다.

대통령직선제와 민주주의라는 강한 열망으로 응집(凝集)했던 그들은, 대권 욕심으로 다툰 후 다시 분열하고 말았다. 단식·연합·조직 등 갖은 노력을 통해 1987년의 기폭제를 만든 것도 정치권이었으나, 이를 허사(虛事)로 돌린 것 또한 정치권이었다. 침묵의 역사를 깬 것도 정치권이요, 분열의 역사를 쓴 것도 정치권인 셈이다. 1000년 전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고전(古典)의 한 문장이, 1987년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명문으로 다가오는 현실이다.

이와 관련해 강상호 국민대 교수 및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26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영화에서는 6월 항쟁만 나오고 끝났지만, 87년 전후로 누적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며 “정치적 분석 없이 한 사건만 가지고 접근하면, 항쟁과 죽음을 되풀이할 뿐이다. 87년 전후로 어떻게 사회 구조가 바뀌어왔는지, 6월 항쟁을 ‘맥락의 흐름’에서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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