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의 時代架橋] 南北관계, 아직도 갈 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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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時代架橋] 南北관계, 아직도 갈 길 멀다
  • 이병도 주필
  • 승인 2018.01.13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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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해결´, 긍극적 목표돼야
北 ´합의파기 타성´ 극복 중요
장기적 동력-민족시대 개막을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이병도 주필)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를 위한 남북 고위급 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새로운 국면의 화해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이에 일단은, 긍정적 평가와 함께 남.북한 평화체제 정착까지 순조롭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상당수 국민의 기대로 보인다. 그러나 합의와 파기로 점철돼 온 것이 지난 반세기 남북관계 역사였기에, 이번 합의의 새로운 기류가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 지, 근본적 의문을 떨칠 수가 없다.
역시 '북핵 문제'가 그 중심에 있다. 모처럼의 화해 기류를 통해 국제사회와 한국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북핵 해결'까지 끌어낼 수 있을런지, 과거 도발-제재-대화-도발 등의 경험으로 볼 때, 길고도 험난한 장정을 예견케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합의에 따른 향후 정세와 관련, 지난 날 거듭됐던 '남북간 합의' 악순환의 진상과 교훈을 점검해 본다.

순조로운 출발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가 공식 확정됐다. 남북은 지난 9일 판문점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평창올림픽 성공을 위한 협력 △긴장 해소를 위한 군사회담 개최 △남북 관계 모든 문제를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우리 민족의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 등 3개 항 원칙의 공동 보도문을 발표했다. 북한은 이와 함께 평창 올림픽에 고위급 대표단과 선수단 응원단, 예술단 참관단 태권도시범단 기자단 등 대규모 방문단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남북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개성공단 폐쇄 이후 끊겼던 서해 군(軍) 유선 통신도 지난 10일 오전 8시부터 정상 가동에 들어갔다. 출발은 일단 순조롭다. 지난 보수정권 9년 동안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다시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이번 합의로 사상 최대 규모의 북한 방문단이 남한을 방문할 예정이다. 북한이 남측 국제대회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한 적은 있지만, 예술단 참관단 태권도시범단 등을 함께 보낸 적은 없다. 개회식 공동입장 및 남북공동 문화행사 개최에 까지 의견 접근을 보았다는 소식이다.

국제사회 반응

이번 회담 자체에 대한 객관적 정황으로 국제사회의 반응은 중요하다. 미·중·북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내놓았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문 대통령이 나의 강경한 태도(tough stance)에 대단히 감사해했다"면서 "내 언사와 강경한 태도가 아니었다면 남북이 지금 올림픽에 대해 얘기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 쿵쉬안유 외교부 부부장 겸 한반도 사무특별대표는 "한미 양국이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 합동 훈련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은 사실상 쌍중단(雙中斷)이다. 한반도 정세가 안정적 방향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쌍중단은 한미는 군사훈련을,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을 각각 중단하는 중국식 북핵 해법을 의미한다.

즉, 미국은 강력한 압박과 제재를 통해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낸 것이라면서 그런 대북(對北) 기조를 이어가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중국은 남북 대화 재개를 계기로 남측이 미국과 하는 군사훈련 및 대북(對北) 제재 공조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정반대 주문을 한 것이다.

하지만, 남한으로선 미 정부의 시각이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번 남북회담이 “큰 시작”이라며 “그들이 올림픽을 넘어서 협력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김 위원장과의 통화 의향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다”며 “적절한 시점에 우리도 관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남북대화가 북핵 해결을 위한 단계적 절차이며, 남북대화를 북핵 정세 변화를 위한 발판으로 삼겠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얼마 전 김 위원장의 남북대화 제안에 “좋은 소식인지 아닌지 두고 볼 것”이라며 회의적 반응을 보인 것과는 달라진 기조다.

남북대화를 북한의 이간계로 경원시하기보다는 북한에 비핵화 협상을 강제하는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자세 변화로 읽힌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도 “(이번 회담이) 북한이 무언가를 의논하고 싶다는 바람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향후 남북회담 결과에 따라 북핵문제 해법을 찾기 위한 북·미 협상이 열릴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계의 벽…돌파구를 

그렇지만, 낙관은 금물이다. 이제 막 관계개선의 첫 단초를 열고 긴장완화의 첫 걸음을 뗐을 뿐이다. 남북이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하다.

과연 남북 관계를 진정으로 개선시킬 돌파구를 제대로 마련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핵심이다. 정말 중대한 문제는 북한 비핵화다. 궁극적으로 비핵화 회담과 연결되지 않는 남북대화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조 통일부 장관이 이번 회담 오전 기조발언에서 “한반도 비핵화 논의를 위한 대화 재개가 필요하다”고 한 데 대해 북측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밤에 열린 종결회의에서는 강한 불만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이번에는 우리 측이 북한 비핵화를 강도 높게 요구하는 대신, 형식적 언급에 그쳤는데도 상황은 그러했다.

그것은 북이 핵을 폐기할 생각도 없고, 비핵화 문제를 남한과 논의할 생각도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냉정한 현실이자, 앞으로 군사회담의 전망이 불투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남측이 제안한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서도 답을 내놓지 않았고, 공동보도문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특히, 북이 ‘비핵화’와 ‘긴장 고조 행위 중단’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뜻이 없음을 굳이 감추지 않은 것은 김정은이 진정 남북 화해의 길로 들어설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남북 회담을 비핵화를 골자로 하는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대화로 이어가야 한다. 고위급 회담의 수석대표인 조 통일부 장관이 기조발언에서 "상호 존중의 토대 위에서 협력하면서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며 비핵화 등 평화 정착을 위한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런 차원일 것이다.

한마디로, 남북 회담은 북핵 해결을 위한 디딤돌이자 단계적 절차여야 한다. 북한이 핵 보유국 도달과 핵 무력 완성을 아무리 외쳐도 한반도 비핵화는 우리 세대가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다.  

南 고리로 한 평화 제스처

그렇다면, 한반도의 이같은 핵심현안을 무시한 채 북한은 왜 이번 회담에 응했던 것일까. 그 배경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대북제재 국제 공조에 균열을 내고 국제사회에서 대북 온건론을 끌어내기 위해 남한을 약한 고리로 삼아 평화공세를 펴고 있다는 분석이 현재로선 설득력을 갖는다. 구체적으로는, 남북대화를 바라는 한국 정부와 북핵 폐기를 바라는 미국 정부 사이를 벌리는 계기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회담전 날 북한의 선전 매체들이 일제히 한반도에서 ‘평화적 환경부터 마련해야 한다’며, 이런 환경을 깨는 것으로 남한의 ‘대규모 전쟁 연습’을 주장하면서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지를 겨냥한데서도 잘 나타났다. 또 ‘동족끼리 힘을 합치면’을 유달리 강조하며 ‘외세에 의존하지 말라’고 주장한 것도 한국과 미국의 틈을 벌리려는 속셈을 보여줬다. 즉 한국에 유화적 손길을 내밀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공조를 깨는 한편, 북한 핵 무력 완성의 시간을 벌기 위한 조치로 풀이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은 혹시라도 한미 동맹의 근간인 연례 군사훈련을 '북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겠다'는 북한측 약속과 맞바꾸는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의 남북 합의는 북한을 핵 무력 완성이라는 마지막 고지에 오르게 하는 숨통만 틔워주는 것이며, 북한의 대화 제안 속셈에 놀아나는 격일 뿐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완성을 위한 마지막 단계에 와 있는 김정은은 시간 벌기를 위해서라면 어떤 평화 제스처라도 취할 것이 틀림없다.

국제 공조 시스템은 구축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와해는 순식간이다. 북한의 제안에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되, 이벤트성 평화공세에 취해 남북대화의 본질이 북한의 비핵화로 향하는 여정에 있음을 한순간도 망각해선 안 된다. 북한의 이번 회담 배경이 한미 간 틈을 벌리려는 술책이라면 가당치 않은 하책(下策)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한미동맹을 균열시키기 위한 차원의 통남봉미이거나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평화공세라면 더욱 강력한 제재와 봉쇄에 직면케 될 것이다.

이같은 對北 응징전망은 미국 주요인사들과 언론들의 분석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폼페이오 미 CIA 국장은 이번 남북회담 성사가 발표된 지난 8일 "과거 역사는 이것(북의 대화)이 속임수(feint)라는 걸 보여준다. (대화는) 김정은의 (핵) 전략적 전망에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또 지난 9일 뉴욕타임스의 칼럼 제목은 '북한이 남한을 또 갖고 놀고 있다'였고, 월스트리트저널은 "평창올림픽이 지나면 심판의 시간(a time of reckoning)이 올 것"이라고 했다. 북이 평창올림픽을 이용해 어떤 쇼를 해도, 결국 북핵 문제는 '진실의 순간'을 맞을 수밖에 없으며, 그 시기는 늦어도 올해 중반일 것이란 예상들을 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북한을 둘러싼 기류는 중국이 얼마 전 철강과 기계의 대북 수출 전면 금지 조치를 취했듯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이 날로 위력을 더하는 모양새다. 때문에 한국 대표단은 앞으로도 남북 관계를 개선시켜야 한다는 ‘바람’에 매몰돼 자칫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공조에 빈틈을 허용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위한 기술적 필요에 의해 잠시 제재를 완화하는, 그 시기와 분야에만 국한하는 이른바 ‘핀셋’ 조치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北 '합의파기' 역사

과거 북한의 거듭된 남북합의 파기의 역사는 그 근거를 더욱 뚜렷이 증빙한다.

지난 19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 되었을 때 국민들은 경악과 흥분과 감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념적 대립과 함께 북한의 남침에 따른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적대감이 팽배했던 남북한이 조국통일의 원칙을 설정하고 대화개시에 합의한 것은 실로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5년, 남북관계는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가. 대립과 긴장과 대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통일을 위한 실질적인 성과와 변화는 전혀 없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토록 흥분하고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에게 언제까지 실망과 좌절감을 안겨줄 것인지, 오늘의 남북상황은 안타깝기만 하다.

물론 지난 세월 남북간에 정치 경제 체육 적십자 등 각 분야에 걸친 회담과 고향방문 예술단교환 스포츠 교환경기,그리고 국제대회에 단일팀 출전 등 일부 성과가 있었던 경우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7·4성명이라는 '대합의'에도 불구, 남북관계가 개선되지 않은 최대의 요인은 철저한 상호불신 경계심과 일방적인 성명정신 파기 및 불이행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남북의 집권세력이 때때로 기득권 확보와 관련, 관계개선과 통일노력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던 점도 지적 돼야 할 것이다.

특히, 7·4성명 발표후 북한의 행태는 말 그대로 파기 그 자체였다. 성명발표 직후부터 그 이면에선 남침용 땅굴을 파고, 무장간첩 남파와 판문점 도끼만행을 자행했으며, 금지하기로한 상호비방 방송을 3개월만에 재개하는 등 성명정신 파기를 일삼았던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우리의 기억은 북한의 합의에 대한 실천 보다는 파기와 그로 인한 긴장고조만으로 가득차 있다. 북한은 지난 1985년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고도 국제원자력기구와의 핵안전협정 체결을 미루며 핵사찰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속에서 남북은 1992년 2월19일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효 시킨후 수많은 합의서를 교환했다. 그런데도 화해·협력·교류·핵문제중 어느 한 분야에서도 가시적 진전은 없었다.

그해 12월 이후에는 아예 남북고위급회담 각종 위원회 대표 접촉조차 끊겨 버렸다. 그것은 북한이 합의의 전제조건인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선언 번복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사찰 수용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다시말해 당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서 규정된 상호핵사찰이 제대로 이행만 되었더라면 북한 핵문제는 그토록 국제적으로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의 이런 자세 때문에 당시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마련된 화해,군사,경제,사회 문화분야의 공동위원회도 전혀 가동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이른바 통일수행을 위한 조건을 내걸었다. 한 미동맹의 파기, 주한미군의 철수, 팀스피리트 훈련의 중지, 그리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보호철회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들 사항들은 한국의 주권및 자위권에 관한 문제로서 북한이 대화의 조건으로 요구할 수 있는 사안들이 아니었다. 참으로 적반하장이었다.

▲ 지난 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 종료회의 모습. ⓒ뉴시스

核합의 수시 번복 

또 북한은 지난 2002년 12월 제네바 합의사항인 핵 동결 조치를 해제하고 핵 시설을 재가동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 북핵 문제가 또다시 한반도 안정에 위협요인으로 등장케 했다. 제네바 합의가 파기된다면 북한은 핵동결 의무로부터, 한.미.일.유럽연합은 대북 경수로 공급 및 중유제공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짐을 뜻했다. 즉, 이것은 북한이 언제라도 원자로를 가동, 풀루토늄을 추출해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북한이 NPT를 탈퇴하고, IAEA의 핵사찰을 거부함으로써 야기된 한반도 핵위기가 그 때 다시 8년 만에 재현된 셈이었다. 북한은 당시 핵동결 해제가 미국의 중유공급 중단에 따른 전력 생산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핵무기를 생산하는 영변 흑연감속로의 재가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참으로 심각한 사태 발전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북한의 '합의파기'는 그 후에도 참으로 점입가경이었다. 2013년 3월에는 급기야 정전협정의 백지화 등 남북불가침에 관한 기존 합의를 모두 폐기하는 것은 물론, 비핵화에 합의한 1992년 남북공동선언도 파기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노동신문은 인민군 장성의 말을 인용, “대륙 간 탄도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미사일들은 핵탄두들을 장착하고 대기 상태에 있다”고 이른바 '전쟁준비'가 끝났음을 전하기도 했다. 당시 그 행위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 2094호 채택에 반발하는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여기에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북한 정권의 상황은 사실 최악이었다. 중국조차 이 안보리 결의안에 찬성했고, 북한을 포기하고 한반도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소리가 중국 고위층에서도 공공연히 흘러나왔다. 북한 대내적으로는 주민들의 생활과 의식이 장마당 경제 등을 통해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이런 측면들이 북한으로 하여금 벼랑 끝 전술을 찾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 때 한국으로선, 북한과의 대화가 결국 공수표가 되어버린 형국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의 햇볕정책이 북한 정권의 호전성만 키워 주었다는 비판론이 일어났던 것도 그런 연유였다.

결국, 북한 정권이 붕괴되기 이전에는 핵 포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전망들을 대두케 했다. 북한 '합의파기'의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다. 하지만 그 때마다 한국으로선, 합의파기에 따른 對南 위협을 단순한 협박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북한은 언제든 비(非)이성적 도발을 자행할 가능성이 있었던 탓이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 등의 경우 사전 예고를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을 언제나 상기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非정치·군사분야 파기 관행 

뿐만 아니라, 비정치적 비군사적 분야에서의 합의 파기도 수시로 되풀이 됐다.

지난 1990년 5월, 북한은 일본언론에 보도된 '무상공여'라는 표현을 트집잡아 이미 합의를 본 현대그룹과의 경협을 돌연 취소하고 현대와 체결한 금강산 공동개발계획등 모든 남북경제협력 사업계획을 무효화한다고 선언했다. 이와함께 예술단 및 고향방문단 교환사업 등 우리측의 적십자회담 제의마저 북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의 한국내 공연불허를 이유로 거부, 남북한간의 물적ㆍ인적교류 통로마저 완전 차단해 버렸다. 당시 그 원인으로는, 남북한 경제교류 확대가 몰고올지도 모를 개혁바람에 대한 우려와 남한 국내사태의 혼란에 자극받아 대남전략을 변경한 것으로 읽혀졌다.

그러면서도, 그해 북한은 북경회담에서 미국과 6ㆍ25전쟁중 실종된 미군인의 유해를 송환하는 문제에 합의하고, 워싱턴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 학자도 보냈다. 워싱턴과 평양사이에 미소가 오갈 것이란 기대를 갖게하는 움직임이었다. 즉, 한쪽 얼굴에는 미소를, 다른 한쪽 얼굴에는 예상밖의 강경반응을 보인 이중적 행보였다.

체육분야의 합의파기도 잇따라 재현됐다. 북한측이 남북 체육회담을 정략적으로 이용한 사례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지난 79년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 단일팀구성을 위해 북한측과 회담을 벌이다가 단일팀은 커녕 개별참가도 못하게된 적도 있었고, 심지어는 84년 LA올림픽을 불과 몇개월 앞두고 단일팀 참가를 위한 체육회담을 논의하려던 중 북한이 소련의 불참결정에 동조, 일방적으로 불참을 발표한 경우도 있었다. 1990년 북경에서 열린 아시아경기대회 남북 단일팀 협의 때도, 북측은 겉으로는 적극성을 보이는 체 하면서도 속셈이 딴 데 있었기에 막바지에 일이 꼬이고 말았다. 쌍방의 합의사항이 그 때도 깨져 버렸다.
남북한간 비정치적 중대 현안의 대표적 파기 사례로는, 2006년 5월로 예정됐던 경의ㆍ동해선 열차 시범운행이 북한의 일방적이고 전격적인 취소통고로 무산된 경우를 들 수 있다. 민족의 염원을 담고 기다려왔던 55년 만의 남북간 철도개통이 겨우 하루를 앞두고 허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당시 북측은 전화통지문을 통해 군사적 보장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점과 남측의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철도시험운행을 할 수 없게 됐음을 통보해 왔다.

이렇듯, 북한은 남북 양측의 책임있는 당국자 간에 약속된 사안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북한과 어떤 협의를 하더라도, 과연 언제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할지 회의감부터 들게 됐다. 구체적 일정까지 합의된 사안들을 손쉽게 파기함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신뢰기반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북한이 손바닥 뒤집듯 합의사항을 파기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는 집단임을 자발적으로 만천하에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남북관계 진전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국제사회에 신뢰도와 위신 추락을 더 크게 불러올 게 뻔한 '자충수의 시대'에서 북한은 이제 그야말로 거듭 나야만 할 것이다.

北, 신뢰회복으로 공존공영을

'북핵 문제' 해결은 남북한의 신뢰를 좌우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지금 국제적 중대 현안이다. 한국은 이번 '평창 합의'를 시범으로 삼아 인내와 유연한 대응으로 북측과의 접촉과 대화를 추진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사적 반복사례 처럼 다시 '신뢰'의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이번 합의에 대한 북측의 의도를 재평가, 대응방향을 새롭게 수립치 않을 수 없다.

물론, 일단 시작된 남북대화인 만큼 북핵 폐기 협상으로 이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북으로서도 실제 그 길밖에 없다. 정부는 남북대화의 목적이 북핵 폐기라는 사실에서 언제나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북이 끝내 핵 폐기 대화에 응하지 않을 때의 대책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빠른 결과에 너무 집착해서도 안될 일이다. 모처럼 조성된 관계개선의 동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긴 호흡으로 준비해야 마땅하다. 남북 관계의 전면적 개선과 한반도 비핵화는 하루 아침에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핵 동결이 대화의 입구라면 완전한 핵 폐기는 대화의 출구’라는 정부의 방향성 정도가 유효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합의파기'로 이어지던 한반도 위기의 악순환을 평화올림픽-남북관계 개선-북핵 문제 해결이라는 선순환적 3단계로 전환시키는 지혜가 그야말로 절실하다. 이를 위해서는 엄중한 안보위기 상황을 고려해 단호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일 대한노인회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과거처럼 유약하게 대화만 추구하지 않겠다”고 한 말을 실행에 옮겨야 할 것이다.

결국, 한반도 비핵화의 첫걸음을 어떻게 떼느냐가 관건이다. 남북한 간에는 이미 역사적인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발효돼 있고,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도 채택되어 있다. 바로 우리가 대북 정책수립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기본원칙이다. 합의서와 공동선언에 담겨진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바로 북핵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다.

이제, 북한은 40여년전 온겨레에게 희망을 주었던 7·4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더이상의 망상을 떨쳐버리고 당연한 핵폐기로 평화의지를 공인받을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할 때다. 그렇게 해야만, 떳떳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주변국과 협력할 수도 있고, 남한과도 경계와 경쟁대상이 아닌 협력의 대상으로 공존공영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병도는…

1952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했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후 1981년 연합뉴스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 야당출입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저서로는 , <6공해제>, <97년 대선 최후의 승자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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