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남빌딩·삼흥빌딩] YS와 DJ, 명승부 펼쳐진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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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남빌딩·삼흥빌딩] YS와 DJ, 명승부 펼쳐진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7.11.05 0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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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기수론’ 내세워 1970년 신민당 경선서 맞붙은 YS와 DJ
YS는 무교동 광남빌딩에, DJ는 을지로 삼흥빌딩에 캠프 차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1987년 통일민주당 후보단일화를 놓고 만난 YS와 DJ. 하지만 후보단일화는 이뤄지지 못했고, DJ는 4자필승론을 앞세워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그해 대권에 도전했지만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 김영삼민주센터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탄생시킨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각본 없는 드라마’로 기억한다. 지지율 2%의 ‘군소후보’ 노무현 후보가 지지율 20%를 훌쩍 넘기는 ‘대세’ 이인제 후보를 무너뜨린 2002년 경선은 역사에 남을 ‘대역전극’으로 아직까지 회자된다.

그런데 정치 전문가들은 32년 전,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경선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1970년 9월 29일,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맞붙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그것이다. YS와 DJ라는 스타 정치인의 대결이었다는 점, 단 하루 만에 승자가 뒤바뀐 극적 서사 등을 고려하면 극적인 요소는 2002년보다 더 많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YS는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젊은 나이에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서울 중구 무교동에 위치한 광남빌딩 703호에 사무실을 내고, 본격적인 세몰이에 나섰다. 하지만 당 원로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몇몇 원로들은 구상유취(口尙乳臭)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까지 강하게 반발했다. 이러자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YS는, 조윤형을 보내 DJ에게 도움을 청한다. 40대 기수론에 동참해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자는 제안이었다.

처음에 DJ는 YS 제안을 거절한다. 아직 당이 40대 기수론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은 데다, 자신의 목표는 1975년 대선이라는 이유였다. 이때 DJ의 마음을 돌린 사람이 김상현이다. 김상현은 DJ에게 “이번에 동참하지 않으면 앞으로 지도자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할 수 있다”고 설득했고, DJ는 결국 YS 사무실 근처인 서울 중구 을지로1가 삼흥빌딩에 캠프를 차리고 경선에 뛰어든다. 그리고 이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역전극의, YS 입장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대역전패의 서막이 됐다.

경선 하루 전까지만 해도, 아니 당일까지도 YS가 승리할 것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의원 40%를 거느리고 있던 당수 유진산이 경선을 앞두고 YS의 손을 들어준 데다, 이철승도 YS 지지를 약속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YS는 경선 전날 밤 후보 수락연설문을 준비할 만큼 승리 확신에 차 있었고, 중앙정보부조차도 ‘박정희 vs. 김영삼’의 대통령 선거를 예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YS 캠프가 있던 광남빌딩은 시그너스빌딩(좌)으로, DJ 캠프가 있던 삼흥빌딩은 효덕빌딩(우)으로 바뀌었다 ⓒ 시사오늘

그러나 승리의 여신이 마음을 바꾸는 데는 채 하루도 필요하지 않았다. 전당대회 당일, 1차 투표에서 YS 421표를 얻는 데 그친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지를 읍소한 DJ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1차 투표에서 승부가 갈릴 것이라던 예상이 빗나가자, YS는 ‘멘붕’에 빠졌다. 결선 투표를 생각지도 못한 YS 측에 결선 투표 전략이 있을 리 만무했던 까닭이다.

반면 ‘잘해야 결선 투표’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DJ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DJ는 결선투표가 시작되기 전 이철승에게 ‘다음 총재 선출 때 이철승을 지지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줬다. 이에 이철승은 YS와의 약속을 깨고 DJ에게로 표를 몰아줬다. 결선투표 결과는 YS 410표, DJ 458표. 박정희와 맞붙을 신민당 대통령 후보는 DJ로 결정됐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경선은 이렇게 끝났다.

이때의 상황을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에 22표 모자랐다. 2차 투표에 들어갔는데, 이철승 표가 몽땅 DJ에게 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가 났을 때, 김동영과 나는 단상에 다리가 붙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또한 김영삼과의 대결이 부담스러웠던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도 한몫했다. 당시 신민당의 조직분포는 최대계보인 진산계와 이재형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김영삼은 두 계보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선거 당일 이재형계가 김대중에게 표를 던졌다.

훗날 이재형은 YS와 만나 "박정희 정권이 세무조사 등 협박을 해 와서 어쩔 수 없었다"고 사과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아쉽게도 이 명승부의 ‘베이스캠프’였던 광남빌딩과 삼흥빌딩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YS 캠프였던 광남빌딩은 1975년 서울고등법원이 내린 ‘재산세부과처분초과부분취소청구사건’ 판례 속에서 서울 중구 무교동 6번지에 위치한 76평 규모의 9층짜리 빌딩이었다는 사실만 확인이 가능했는데, 이는 현재 시그너스(Cygnus) 빌딩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그너스 빌딩은 청계천이 시작되는 무교동사거리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DJ 캠프였던 삼흥빌딩 역시 1970년대 신문에서 서울 중구 을지로1가 32번지라고 언급한 것이 자료의 전부였다. 서울 중구 을지로1가 32번지에는 현재 효덕빌딩이 들어서 있는데, 1970년에 준공됐다는 기록으로 미뤄볼 때 리모델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름이 변경된 것으로 추측된다. 효덕빌딩의 위치는 서울특별시청 바로 맞은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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