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홍의 대변인]文 눈치보는 재계…'강자한테만 약한 게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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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홍의 대변인]文 눈치보는 재계…'강자한테만 약한 게 어때서'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7.05.25 16: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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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사람은 똥을 싼다.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먹고 마시면 변(便)을 본다. 아마 배변할 때만큼 인간에게 자신이 평등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 주는 시간은 없으리라.

그러나 손과 입으로 똥을 싸는 경우는 다르다. 그것은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주변 사람들을 심히 불편하게 만들고, 시쳇말로 '빅똥(大便)'을 쌌을 때는 사회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래도 '변'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옛말이 있다. 순간의 빅똥으로 평생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는 옛 선인들의 지혜다.

<시사오늘>의 '박근홍의 대변인'은 우리 정재계에서 빅똥을 싼 인사들을 적극 '대변(代辯)'하는 코너다. '변'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

대한민국 재계를 위한 최종변론

요즘 국내 재계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마냥 흐뭇합니다. 최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벌그룹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천명했습니다. 또한 너 나 할 것 없이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자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임직원들의 복리후생 강화와 임금인상을 검토하는 기업도 많다고 합니다.

높으신 양반들께서 미천한 것들을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행보를 친히 보이고 계시니, 참으로 존경스럽고 경탄스럽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칭찬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손이 부서질 때까지 박수를 쳐줘도 모자랄 판국에 되레 이를 폄훼하고 깎아내리는 불경한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적폐 청산을 내세우고 출범한 문재인 정권의 눈치를 보고 재계가 알아서 기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재계의 진정성을 왜곡하는 이 같은 처사를 더는 바라볼 수 없어 이렇게 변론대 위에 섰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얼마 전 SK그룹(에스케이그룹), LG그룹(엘지그룹), 롯데그룹 등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LG U+)가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약속한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이들 업체들이 이전부터 정규직으로 전환할 여력이 있었음에도 늦장 조치를 한 게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비난을 일삼고 있습니다.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외면할 때는 언제고, 이제야 손을 잡아주는 척하느냐는 겁니다. 이는 재계의 사정을 잘 모르고 하는 헛소리입니다.

SK, LG, 롯데가 지난 박근혜 정권 하에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까. 연말 성금보다도 많은 돈을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으로 지출했을 정도입니다. 아직 재판 중인 사안이라 조심스럽지만 아마도 당시 청와대 측으로부터 각종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총수 사면도 없고, 사업권 승인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렇게 정치권에 마구 휘둘렸던 업체들에게 과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추진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겠습니까? 박근혜 정권이 막을 내리고서야 그런 여력이 생긴 겁니다. '박근혜·최순실게이트' 재수사를 지시한 문재인 대통령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결단코 아닙니다.

막말로 문 대통령 눈치를 보는 거면 청와대나 여당 쪽에 대관팀을 동원해 로비를 벌이거나, 검찰들을 복집으로 모셔서 돈 봉투라도 뿌려야지, 왜 뜬금없이 정규직 전환을 선언하겠습니까. 뭐 여론전이라도 펼칠 요량이라면야 그럴 수 있겠지만,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 멍청합니까? 터무니없는 억측에 불과합니다.

▲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 중심의 경제, 재벌개혁 천명으로 국내 재계가 어수선한 분위기다. 이 가운데 몇몇 업체들이 마치 문재인 정권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행보를 보여 세간의 조롱을 사고 있다 ⓒ 각 사(社) CI, 뉴시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허창수 GS그룹(지에스그룹) 회장님은 최근 한 포럼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했습니다. 그간 GS그룹의 사회공헌활동이 다른 대기업들에 비해 미미한 수준임을 감안하면 허 회장님의 발언은 지극히 이례적이라는 게 세간의 평가지요.

이를 두고 혹자들은 '박근혜·최순실게이트'의 원죄가 있는 허 회장님께서 새로운 정부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고 있는 게 아니냐며 어처구니없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따져봅시다. 아니, 허 회장님께서 경남고 선후배 사이인 문 대통령의 눈치를 볼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새 정부의 유럽연합·독일 특사이자 문 대통령의 싱크탱크로 일했던 조윤제 서강대 교수가 8년 가까이 GS그룹 사외이사를 역임했습니다. 또한 GS그룹은 우리나라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과 사돈지간입니다. 인맥이 이렇게 풍성한데 뭐 하러 정권 눈치를 보겠어요?

도대체 왜 허 회장님의 진정성을 폄하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물론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문제, 장남 허윤홍의 경영권 승계 사안 등 몇몇 근거가 있긴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겠습니까. 단언컨대, 모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식입니다.

허 회장님께서는 온 나라를 강타한 '박근혜·최순실게이트'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국익을 위해 전경련 회장직 유임을 결단한 사람입니다. 본인이 싼 똥은 본인이 스스로 치우겠다는 투철한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분이지요. 결코 누구 눈치를 볼 회장님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모든 점을 차치하고 재계에서 문재인 정권의 눈치를 보고 알아서 기는 거라고 칩시다. 까놓고 말해서 그게 뭐가 잘못입니까.

기업이라는 집단의 최대목표는 이윤추구예요. 대한민국이 어떤 곳입니까. 돈을 벌려면 강자한테 고개를 숙여야 되는 사회 아닙니까. 지금 현 정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누굽니까. 문 대통령이잖아요.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려면 마땅히 문 대통령에게 잘 보여야지요.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지난해 한 고위공무원이 발언해 논란이 됐던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는 말도 떠오릅니다. 가축들은 잘해 주면 주인 머리 위로 기어오르는 특성이 있어요. 재계에서 갑자기 잘해 주니까 '재계가 문재인 눈치를 본다'는 허황된 논리를 펼치면서 마구 짖어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기업들이 강자 앞에서만 약한 겁니다. 약자 앞에서 약해 보이면 약자들은 더 많은 걸 요구하지 않습니까.

존경하는 재판장님, 혹시 '심계천하(心系天下)'라는 사자성어를 들어보셨는지요. 높으신 분들께서는 특권을 누리되, 널리 세상을 걱정하시고 그만큼 책임을 다한다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국내 재벌 오너가(家)들에게 딱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실형을 선고 받아도 형기 전에 특별사면을 받는 특권을 누리되, 대한민국의 발전과 경제활성화를 위해 고민(만)을 하셨습니다. 고귀한 몸이 상할까 염려해 군(軍)면제라는 특권을 누리되, 대한민국의 안보와 시장경제질서 유지를 위해 정기적으로 보수단체들을 후원하셨고요.

또한 동네 빵집이 저급하고 값싼 재료를 써서 국민 건강을 피폐하게 만드는 게 안쓰러웠는지, 몸소 골목상권에 나서서 좋은 재료로 맛있는 빵을 만들어주셨지요. 임대료가 좀 비싸긴 하지만 민간형 임대주택 보급에 힘쓰고 계시는 것도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투철한 선민의식과 애국심을 갖고 계신 분들께서 어찌 다른 의도를 가지고 정규직 전환을 추진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겠습니까. 모쪼록 이 같은 점들을 헤아려 '재계가 문재인 눈치를 본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판단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준비한 최종변론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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