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죽음으로 본 박정희 정권의 DJ 납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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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죽음으로 본 박정희 정권의 DJ 납치사건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2.09.05 20: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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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4대테러 의혹③>김대중 납치사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유신독재 시절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다 의문의 죽임을 당한 고(故)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이 37년 만에 다시 부각되면서 박정희 정권에서 자행된 테러 의혹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박 정권 시절 수많은 테러 의혹들이 있어왔으나, ‘김영삼(YS) 초산테러’, ‘김대중 납치사건’, ‘장준하 의문사’, ‘김형욱 암살사건’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사건을 ‘박정희 정권의 4대 테러의혹’이라고 말할 만하다. 이에 <시사오늘>에서는 이 사건들을 추적해 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1972년 10월17일, 10월 유신이 발생할 때 일본 도쿄에 있던 김대중(DJ)은 귀국을 하지 않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박정희 유신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를 참을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은 DJ납치 계획을 세웠다.
1973년 8월8일 오후 1시경. DJ가 묵고 있던 일본 도쿄의 팔레스 호텔 22층 2212호실 앞에서 건장한 청년 다섯 명이 DJ를 보자 방안으로 밀어 넣고 마취약을 코에 들이대고 마취를 시도했다.

1973년 8월9일 범인들은 DJ를 해안에서 모터보트에 실은 뒤 다시 용금호에 옮겨 항해를 계속했다.

그리고는 5일이 지난 8월13일 밤 10시경 DJ를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애국청년구국대원’이라고 밝힌 뒤 DJ를 가르키며 “외국에 나가 경거망동하는 놈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밝혔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해 밝혀진 일이지만 ‘애국청년구국대원’은 다름 아닌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였다.

당시에도 백주대낮에 일본 수도인 도쿄 한복판에 벌어진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은 박정희 정권의 소행으로 의심하고 있었으나 서슬이 퍼런 유신치하에서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를 참지 못한 김영삼(YS)은 1973년 9월2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총리 김종필, 내무장관 김현옥, 법무장관 신직수를 상대로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했다.

YS의 추궁 이후,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범행 배후로 의심했지만 정부는 이름뿐인 수사본부를 꾸리고 보도 통제에만 급급했다.

박정희 정권, 일본에 고개 숙여 사과

▲ 2009년 김대중 납치사건 35주년을 맞아 행사를 갖고 있다. ⓒ뉴시스
또한 이를 확인한 일본도 가만있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과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총리였던 김종필을 일본에 보내 사과까지 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해 11월 22일 김종필 총리는 일본 다나카 총리와 만난자리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일본에서 납치돼 우리 나라로 돌아왔으니 일본에 결과적으로 폐를 끼친 것 같아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사죄했다.

김 총리는 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겠다”며 김대중을 가중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대한민국 총리가 한국 정지지도자를 처벌하지 않겠다고 일본 총리에게 약속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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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법나치 2022-08-06 13:54:55
가르키며 (X) —> 가리키며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