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타살의혹으로 본 박정희 정권의 YS 구속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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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타살의혹으로 본 박정희 정권의 YS 구속사건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2.08.17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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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4대테러 의혹①> YS 구속사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유신독재 시절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다 의문의 죽임을 당한 고(故)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이 37년 만에 다시 부각되면서 박정희 정권에서 자행된 테러 의혹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박 정권 시절 수많은 테러 의혹들이 있어왔으나, ‘김영삼(YS) 초산테러’, ‘김대중 납치사건’, ‘장준하 의문사’, ‘김형욱 암살사건’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사건을 ‘박정희 정권의 4대 테러의혹’이라고 말할 만하다. 이에 <시사오늘>에서는 이 사건들을 추적해 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백조그릴서 구국선언 낭독 후 가투
결국 군법회의에 넘겨져 YS 구속

▲ 1963년 박정희 정권은 내란선동죄로 김영삼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했다. 사진은 김영삼의 수감기록. 수감번호와 '김영삼'이라는 이름이 나와있다. ⓒ시사오늘 정세운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79년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숨지기 전까지 ‘김영삼’은 늘 눈에 가시였다.

YS 초산테러가 일어난 것은 1969년이었지만, 그 전부터 YS에 대한 무지막지한 탄압은 여러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백조그릴’사건이다.

1961년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군부세력은 1962년 3월 4천여 명의 정치인들에게 ‘정치활동정화법’이란 재갈을 물려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뒤로는 공화당 사전조직을 서둘렀다. 

YS 등 정치인들이 다시 정치를 할 수 있게 된 시점은 1년이 지난 1963년 2월 1일이다.
정치활동이 해제된 이들은 민정당(民政黨)을 만들어 군정에 대항했다.
이에 당황한 쿠데타세력은 1963년 2월 18일 민정불참을 선언했다가, 이를 바꿔 3월 16일에는 군정을 4년 더 연장할 것을 공표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YS 등 야당인사들은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군정연장반대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물론 이 일의 주도는 YS가 했다.

3월 22일 무교동 백조그릴 위장결혼식장으로 김준연 김도연 박순천 등 정계인사 150여 명이 모여들었고, 이후 윤보선 유진산 정해영 등이 입장하면서 모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정치집회장소로 변했다.

각계 인사들은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백조그릴을 시작으로 을지로 태평로 광화문을 거치자 군중들은 늘어갔고, 시위대는 ‘박정희는 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광화문에 다다르자 경찰들은 시위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YS를 포함한 이들을 수도방위사령부 보통군법회의 관할관으로부터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영장을 발부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했다. 당시는 계엄령으로 군인들이 모든 것을 장악한 살벌한 시기였다.
 
군사재판은 빠르게 진행됐고, 이들은 남산 근처에 위치한 군사재판정에 계속 불려 다녔다. 박정희 정권은 YS에게 ‘내란선동죄’를 씌우려고 했다. 내란선동죄는 ‘사형’이다.

그러나 서슬 퍼런 쿠데타세력도 미국 앞에서는 꽁무니를 뺐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구속정치인 석방’을 요구하자, 미국 눈치를 보느라 이들을 서둘러 석방했다. 결국 YS는  22일 만에 서대문형무소에 풀려났다. <계속>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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